10월 제주여행 닷새 째 ( 금오름과 저지오름)
이성복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고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서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 왔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20대 에서 30대를 건너오는 즈음. 그리고 다시 50대에서 60대를 바라보고 있는 이즈음. 제주 여행을 하면서 현무암이 잘게 부서져 검은 흙위에 뒹굴고 있는 송이를 발길로 느끼면서 이성복의 이 시가 생각났다. 그의 화려한 시구와 깊은 사색이 만들어 낸 시는 젊은 날의 감성을 뒤흔들었고, 다시 시니어가 된 나의 게으른 사고를 채칙질한다. 어제 오랫만에 한라산 둘레길을 한지라 오늘은 좀 천천히 쉬었다 갈 생각으로 몇년전에 오른 저지 오름과 바로 옆 금악리에 있는 금오름을 오른다.


금오름은 제주 관광객을 먹여 살리는 흑돼지를 키우는 축사들이 가장 많이 있는 한경면과 한림에 자리한 오름이라 오르는 내내 썩 유쾌하지 않은 냄새가 진동했다. 아쉬운 것은 오름 꼭대기에 송전탑이 있어서 오르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이 된 널찍한 길이여서 별 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오름 꼭대기에 이르면 가을 억새가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먼저 눕는 쓸쓸한 풍경이 넓게 펼쳐져 있고 무엇보다 분화구의 색깔이 알록달록한 붉은 모습이어서 너무 예쁘다.날씨가 한랭기온으로 바뀌어 10도가 전날 보다 낮은데다 강풍주의보가 발령된 터라 옷을 두툼하게 차려입고 오름을 했다.

오름안에 있는 분화구의 모습은 참으로 오묘한 색깔이어서 한참을 바라본다. 옛날에는 상당한 양의 물을 품은 못이었다 한다. 지금은 못은 말라버리고 예쁜 수풀이 우거져 있다. 제주의 모든 오름이 그러하겠지만 신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금오름에서 한경면 금악리의 모습이다. 마늘, 열무 등 가을 밭작물을 키우고 있는 밭들과 경계선을 이루며 있는 자연스러운 밭담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멀리 해안선이 보이고 짙푸른 제주바다가 멀리 있다. 수평이 주는 평화로움.

저지오름은 저지 예술인 마을에서 가깝다. 예술인 마을에 있는 김창렬 미술관을 비롯한 멋진 전시공간들을 관람하고 짬을 내서 오를 수 있는 오름인데 오르기 전에 잠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이 정말 좋다. 일단 소박하고 제주음식인 고기국수가 특히 맛있는 곳이다. 요즘은 맛집으로 알려졌는지 몇년전에 왔을 때의 한가함과 동네 사람들이 마실나와서 잠깐 요기하는 모습들이 보였는데 이제는 오후 2시도 안되었는데 재료가 소진되어 맛있는 고기국수와 돔배고기를 맛볼 수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이 건물을 끼고 옆으로 대략 5분 정도 걸으면 내가 좋아하는 저지오름을 갈 수 있다.




저지오름의 가장 큰 매력은 낑낑거리며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물론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여느 오름과 달리 오래된 나무들이 무성한 숲길이 마치 둘레길처럼 쭉 한바퀴 돌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그 길을 천천히 그리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 제주에 오래 머무르면서 강약을 조절하여 여행을 할 경우 중간에 쉬는 코스로 이 오름이 진짜 좋은 것 같다.

예전에 없었는데 이렇게 선홍빛의 맨드라미와 제주의 현무암 담벼락이 너무나 잘 어울린다. 제주에 오면 어릴적에 보았으나 점차 눈에서 사라져가는 꽃들을 볼 수있어서 너무 좋다.

서귀포 쇠소깍 가는 길에 있는 테라로사 커피숍의 공간구성은 참 모던하면서 편안하다.정면을 향해 탁 트인 전경을 볼 수 있도록 한 통 유리문도 근사하고 나무계단을 놓아 눈높이를 달리해 단조로운 공간구성을 해체한것도 마음에 들고 긴 벤취형 탁자도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