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숨 쉬는 법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

김진영을 읽는 일이 나한테는 상처로 숨 쉬게 하는 일이다. 그이의 책을 너무 늦게 접했다. "이별의 푸가", "아침의 피아노", "낯선 기억들" 그리고 벤야민에 관한 글과 롤랑바르트, 프루스트를 사랑한 그의 글들은 젊은 시절 내가 사랑하면서 어렵게 읽었던 독서의 기억들을 소환하는 일이기에 너무 반가우면서도 그의 해석을 따라가는 일이 즐겁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한겨레 신문에 실린 촌철살인과 같은 시대 읽기의 글들은 그의 따뜻하면서도 냉철한 사유를 보여주는 뛰어난 단편으로 읽힌다. 그가 세상에 남겨두고 떠난 철학적 글들은 사탕발림으로 우리를 위로하는 가짜의 인문학적 힐링과는 차원이 다르게 무디고 너무나 편안한 우리의 사고와 일상을 매질하듯 돌아보게 한다. 두 번에 걸쳐 읽은 김진영 님의 책 < 상처로 숨 쉬는 법>은 그가 합리적인 사유와 철저한 부정적 사유를 한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의 <<미니아 모랄리아>> 분석을 통해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 관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는 객관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그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무사유적으로 여기는 여러 가지 일상의 이슈들과 관점들에 대한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을 통한 세상 읽기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어 매끄럽고 말랑말랑한 말들과 언설들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우리를 "객관적 권력"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친절하면서도 매섭게 아도르도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합리성과 도덕 철학은 엘리트의 모랄을 지키려 애썼고 타자의 고통에 대해서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졌던 그의 예민한 감수성에 큰 상처를 입히는 사건과 맞닥뜨려진다. 68 학생운동 때 강의실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사회적 실천이라며 강의하던 그에게 누드로 항의했던 여학생의 도발적인 몸짓으로 그는 결국 신경증을 얻어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는 슬픈 결말을 맞지만 아도르노가 남긴 <미니아 모랄리아>라는 책은 수십만 권이 팔려 서구지식인 사회에서 읽히고 사유된다.
최소한의 도덕 <미니아 모랄리아>는 김진영의 해석에 의하면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이 끝까지 은폐되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그것들이 늘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를 끊임없이 빠져들게 만드는 세이렌의 마지막 유혹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유혹을 건너가지 않으면 은폐되어 있는 삶의 진실들을 우리가 건너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라는 것이다. 우리의 사유가 인식의 딜레마를 겪으며 도저히 걷어찰 수 없는 마지막 긍정성을 걷어차고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진리, 내지는 진실이 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우리가 알아야 할 마지막 것을 알게 만드는 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무의식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의식이 할 수 있다는 합리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가 아도르노이다. 아도르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인 시스템, 자본주의에서 문화는 인간적인 욕구를 시장으로 끌어들여서 돈벌이를 위해 조작하는 것이고 결국 인간의 욕구가 조작되고 가짜로 채워줬다가 다시 빼앗는 것이며 상품이 약속하는 가상 행복에 의해서 인간의 본질적이고 숭고한 결핍이 농락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자유시장경제를 통해 이데올로기화된 리버럴리즘, 개인의 자유, 개성은 가짜이며 결국 이 사회는 약육강식, 거짓문화, 불평등 경제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를 끊임없이< 돈 많이 버세요, 부자 되세요>, < 꽃길만 걸으세요>라며 돈이 행복을 살 수 있는 최후의 보증수표라도 되듯 공허하게 광고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거짓행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식의 도구를 <미니아 모랄리아>라는 세밀한 현미경적인 분석틀로 제시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이 책을 쓰면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믿음이 "사유에 대한 믿음"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저 조건 없이 주인을 모시는 하인근성인 "트로이에"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도덕의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그러기 위해서 지식인이 쌓는 교양은 많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 삶에 대한 태도를 배우는 것.
2강부터 따라가 보자.
2강. 사유의 첫걸음.
아도르노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문화가 산업이 되어버린 황량한 시절에 거꾸로 그것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면서 삶의 속살 풍경을 열어 보이고 있다. 아도르노는 " 우리의 사유 시스템은 너무나 견고해서 극단적인 충격이 오지 않으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유리병에 SOS 편지를 넣어 바다에 던지는 심정으로 이 글을 썼으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이 책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사유는 방법론이 아니다. 올바른 삶이란 뭘까를 생각하는 윤지적 사유이다. 소유와 무관한 자기 삶의 영역을 가지고 있냐라고 김진영은 묻는다.
그는 공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슬픈 학문은 거짓 진실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괴로운 진실과 직접 만나기 위해 밤새워 공부를 한다. 기쁜 일이건, 괴로운 일이건 공부는 진실을 피할 수었는 것이기에"
직접적인 삶에 대한 진실을 마주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삶의 소외된 형태와 개별 실존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규정짓는 객관적 힘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가짜 힐링과 긍정의 철학들 그리고 종교와 신화, 상처들을 확대 재생산하고 상처들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으려 하는 객관적 권력을 공고하게 하는 산업문화들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객관적 권력을 파악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비판적인 정신이 필요한지. 푸코식으로 말하면 권력은 편재하기 때문에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또한 내 안의 미시권력, 파시즘을 파악하고 있지 않다. 나 또한.
하나의 힘과 그 힘이 대치되는 다른 힘이 함께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변증법적 사유이고 이런 사유가 필요하다는 것.
아도르노가 볼 때 진실은 워낙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고 이데올로기화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나와줘해도 사유라는 이름의 주문을 걸어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
아도르노는 희망의 영역을 마르크스가 전혀 응시하지 않았던 "소비의 영역"에서 찾았다. 소비는 철저하게 절약의 원칙을 따르지만 한편으로는 늘 가상을 동반한다는 것. 생산영역에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또 다른 삶의 영역, 그것을 함께 생각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단지 실용성을 넘어 상품에 꿈을 투여한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상품 주물주의=패티시>가 또 다른 가능성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물론 비평적인 시선이 필요하겠지만.
3강. 상처 안에 머물기
아도르노에게 올바른 삶이란 사적인 삶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삶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비적인 관계 속에 종속되어 버리고 공공성에서 완전히 소외된 개인적 삶으로 왜소화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삶은 실종되었는데 물질적 풍요나 자유주의가 가상으로 주어지면서 이것을 마치 행복한 삶, 자유의 삶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허위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 시스템에 포획되었다는 것. 아도르노는 이데올로기 화되고 허위의식적이며 즉자적 관계를 대자적 관계 속에 포함해버린 나르시시즘에 빠진 삶. 삶이 가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삶이 원하는 행복을 가상한다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그는 전제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성찰할 수 있는 개인, 즉 주체가 가능한가.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다들 자기 생각에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기지만 객과적인 권력을 통찰해서 우리를 들여다보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다. 즉자적으로 전혀 주체가 아니라는 것. 하지만 아도르노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 성찰력이다. 자신이 얘기하고 생각한 것에 대해서 또한 번 생각해 보고 또 한번 부정하는 것.
아포리즘은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궁극적인 인식을 얻으려 하는 아주 짧은 글이다. 하지만 허위의식을 갖게 된 주체가 그 주체를 감시하는 객관적 권력에서 벗어나 잠언적인 글쓰기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품는다. 아도르도의 사유는 헤겔적인 변증법적 사유가 아닌 머무름의 사유이다. 즉 부정변증법. 이 사회의 시스템에서 개인은 행복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 행복하다 믿는 대자적인 허위의식은 잘못 만들어지고 현대사회가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문을 건 결과하는 것. 즉 공적인 주체성을 다 잃어버리고 사적인 영역에서만 주체임을 주장할 수 있는, 사실 주체가 될 수 없는 상처 덩어리라는 것
개인은 있지만 주체의 자리는 텅 비어 있다는 것. 오로지 환상만이 들어 있는 곳.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입당하고 주문당하고 도취당하고 자기 환각만을 일으키도록 되어있는 텅 비어 있는 장소. 이것이 상처이다.
객관적 권력은 우리에게 기억을 불러 들일 수 있는 성찰의 계기를 봉쇄해 버렸다. 그래서 그 빈자리에 머물기. 상처를 치유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그 상처 안에 머물기. 나아서 상처를 관통해가기 왜냐면 개인은 이중적이다. 주체성을 담보하지 못한 사회적 시스템 혹은 객관적 권력의 종속물에 불과한 상처투성이 개인이지만 동시에 이 개인은 바로 그 상처 때문에 온갖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의 증거가 되 기에.
좌파는 정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총체적인 객관적 권력들의 문제들을 건드려야 해요. 그리고 자기 상처 안에 머물면서 자기라는 개인을 응시하고 읽어내야 한다. 절대로 자신을 예외적 자리에 두지 않기.
4강. 사랑이라는 영역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은 황금빛 뱃가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객관적 권력의 추악함이다. 공부의 즐거움은 공부의 괴로움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슬픈 학문이다.
아도르노 아포리즘의 밑바닥에는 서러움이 있다. 이 서러움은 생의 가장 귀중한 장소가 상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적대적인 사회에서는 세대관계 또한 경쟁관계이며, 그 뒤에는 적나라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모르지만 존속살해는 아는 상황으로 악화된다.
예전에 부모가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 그들을 돌봐준 것처럼 그 들을 보살필 수 없다는 불안감에 의해서만 단지 교란될 뿐이다. 그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그들이 가했던 폭력을 잊게 만든다. "
"하며 된다"는 의식은 사회적인 모순관계와 결탁할 수밖에 없다. 자발적 결탁에 의해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이거슨 곧 사회의식의 결여를 불러온다. 프로이트식으로 얘기하면 욕망을 억압하면 그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왜곡된 방식으로 귀환하고 이것이 반복 강박이다. 희생은 반드시 보상을 원한다. 나를 억누른 욕망, 이 욕망이 부메랑을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아버지는 자신이 복종했던 권위를 내면화해서 그것을 가정에서 폭력적으로 행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요즘 젊은이들, 리버럴리스트적인 욕망은 돈을 벌어야겠다. 10억 만들기, 재테크, 이것은 아도르노가 읽은 노회 한 젊은 세대, 조로적인 사회가 된다는 것. 한 개인의 삶을 크게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한동안은 리버럴리즘적인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지만 곧 때가 온다는 것. 오늘날 신세대가 겪어야 하는 불행한 인식의 단계, 마지막에 까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한 말. "나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마마를 기억했다. "
아도르노는 이 또한 아버지세대와 아들세대와의 저주의 화해라고 본다. 리버러리즘적인 삶의 패배는 예정된 패배이고 이 패배의 정서가 화해라는 이름으로 얘기되지만 결국 승자는 객관적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 객관적 권력이란 자본주의적 권력 와 선정주의, 효라는 개념. 핏줄을 강조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야한 사회. 핏줄관계는 끊임없이 폭력을 가하면서 그것을 중화시키는 방식을 알고 있다는 것.
객관적인 권력이 선정주의를 통해서 인간의 내밀한 정이라는 감정의 소통을 정치화하고 그것을 은폐의 도구로 사용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폭력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신세대는 결국 자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세대이지만 실제로는 너무 빨리 늙어버린 세대예요. 이 폭력의 관계성과 싸우지도 않고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
<물속의 물고기>는 자기가 물속에 있는 것을 모르는 것. 우리가 인식하고 언어화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로직이 작동한다는 것. 이것은 무목적적 목적성.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의심을 산다.”근대화 이후 집단화될 수 없는 무엇이 나에게 있다. 나는 가족에 속하지만 가족에 속하지 않는 나도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것. 카테고리화될 수 없는 것. 그것이 개인의식을 만들어낸 가장 위대한 발견이대. 모든 권력들은 이 차이를 봉합하려 하나도. 다 똑같은 것으로 만들려 한다. 나와 타자의 다름. 차이에서 출발한다. 리버럴리즘은 삶의 시스템 속에서는 있을 수 없었던 하나의 특별한 공간, 사이를 만든다.
너와 나의 사이는 근본적으로 헤어짐의 공간이다. 개인의 바랭은 한편으로는 커다란 발견이지만 동시에 이상적 관계가 상실되는 것. 나라고 하는 자유를 얻지만 동시에 그 자유가 무언가의 상실이대. 이 사이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사이는 자꾸 이어지려고 한다. 이어지려는 욕망은 “ 미메시스적 인폴드 “이다
미메시스는 자꾸 가까워지려는 충동이다. 미메시스는 타자 동일성의 원칙이라고 말한다.
개인이 개인과 교류하려는 미메시스적인 공간. 그것은 에로스적인 공간이고 은밀하고 공공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 은밀함의 공간은 무목적적 목적성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김진영 식으로 말하면 부드러움의 영역이다. 연애는 부드러움을 사용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우리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이 부드러움의 영역으로 빠진다는 것. 물속의 물고기처럼 더 이상 이유를 모르면서 그 안에서 편안해지는 거다. 하지만 인간사이의 에로스가 거주하는 영역, 사랑이 싹트는 영역이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오면 유통영역으로 변해간다.
5강. 슬픈 선행
트라우마가 왜 언어화될 수 없는가. 프로이트의 “말실수”는 두려움 때문이다.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끊임없이 그것을 피하면서 거짓말을 한다는 것.
좋은 사람이란 누구인가. 죄는 무엇을 위반헀기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거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안 하면 그것도 죄다.
톨스토이 소설 <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처럼 그것은 무관심이다. 소시민적인 차가움. 썩은 사과에서 안 썩는 쪽만 잘 베어 먹는 사람들. 교양 있는 사람들. 그들이 고고한 삶의 원칙은 정당한 분배과정, 정당한 생산관계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에서 온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확인이 되니까 서로 보는 것을 싫어한다. 가시가 밖으로 소아 있는 것. 이 가시는 거의 삶의 방식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 들끼리 후한 미소를 나누는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상호 경쟁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가면을 쓰고 예의 바르게 대화하지만 프루스트적으로 말하면 그 안에는 고슴도치들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6강. 자본주의 시대의 결혼 슬픈 거짓말
아도르노에게 거짓말은 진실을 해치거나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보존하려 하는 위대하하고 명예로운 인간의 능력이었다 하지만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오면 이것은 야만의 거짓말로 변하고 만다. 오늘날 우리 삶의 조건들은 부끄러운 삶을 피할 수 없다. 아도르노에게 결혼은 더 이상 축제가 아니라 저주와 치욕의 관계로 보인다.
경제의 문제, 돈의문제는 아도르노가 우리 사히를 지배하는 개관적 권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결혼을 자기 유지를 이한 트릭이며 이는 이익추구와 책임전가의 트릭이다. 돈을 벌면서 생기는. 부끄러움을 전가하는 트릭. 결국. 사랑의 관계가 상화네 모욕하는 관계가 된다. 사회의 객관적 권력 중에 섹슈얼러티를 관리하는 권력이 있다. 성적권력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적인 욕망을 철저하게 개관적으로 관리 통제하려는 권력이 사회 안에 있다.
7강. 선물 주기의 기쁨과 슬픔.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망각되거나 없어진 것이 선물 주기라고 한다 대신 자선행위가 생겼다. 비즈니스성격을 뛴 선물 주기. 그가 말한다. 선물 주기가 가능한 것은 두 가지 조건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는 상대방이 어떤 물건을 받아야 기뻐하는 가를 내가 알 수 있을 때고. 그 사람의 내밀한 기쁨을 알고 있을 때에만 선물을 주는 행위가 기쁜 일이 된다. 즉 선물은 내밀성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돈을 추구하면서 밖으로 안 내 보낸다. 돈을 추구하면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언가 내보내야 할 것들을 안에 꽁꽁 뭉쳐놓고 있는데 이 것이 주물주의이다.
현대적 자아, 자본주위적 자아는 내가 나에게 원한관계를 가지는 것. 상호 간에 내적 복수의 관계가 생긴다. 경쟁사회처럼.
8강. 타자에 대한 꿈.
톨레랑스, 배려.. 나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오늘날 사회는 획일화된 가치, 돈이 생존의 원칙이 되었기 때문에 상처를 피할 길이 없다.
가치가 획일화되어버리면 배려의 영역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가치를 잣대로 다 측정하니까. 차이는 차별이 될 수밖에 없다.
자동화된 테크놀로지의 폭력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잊어버리는 게 무엇인가. 그건 바로 사이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이 사이가 없어진다. 오로지 즉자적인 관계만이 가능하다. 사이가 없어지면 다가가기가 없어진다. 조금씩 다가가기. 다가가면서 생기는 망설, 부드러움이 없어진다.
내가 테크놀로지의 지배를 받으면 마지막 남는 것은 고독. 고독에는 혼자 있음과 버려짐이 있다.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꿈을 기억해 내는 것이다. 그 방법론이 상처로 숨 쉬는 법이다.
<아파트> 혼자 있고 싶은 격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나를 만나고 잠깐이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
우리에게는 인테리어 가 없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내밀한 공간. 나를 만날 수 있는.. 사회적인 가치들로 인테리어화 되어 있는 공간은 타자의 꿈이 생길 수가 없다. 쓸모없는 공간, 다락방, 창고.
9강. 유보 없는 행복의 삶.
슬픈 성적쾌락.
프로이트의 용어 <트립> 충동. 무언가에 의해서 자꾸 밀리는 존재. 몰리는 존재. 프로이트는 성적 트립의 문제를 얘기할 때 두 가지 개념을 사용한다. 현실원칙과 쾌락원칙. 모든 노이로제는 쾌락 원칙과 현실원칙의 갈등 때문ㅇ 발생한다.
유보 없는 해복이라는 말은 맹목적인 육체적 쾌락이 절대로 유보되는 게 아니다. 이것들이 온전히 충족되는 거. 하지만 합리적인 것 또한 온전하게 유보없이 충족될 때 그 상태가 유보없는 행복이다.
<2학기>
1강. 슬픈 조폭
아포리아. 난제. 풀 수 없는 문제. 말문이 막힘. 아포리아를 관통해가면서 사유의 힘을 기르고 특별한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적과 나의 관계가 모호하다. 적이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악 없다. 권력의 중심부가 정확하면 혁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와 적이 착종되었다가 서로 엉켜 있다면 혁명은 불가능하다. 서로 엉켜있는 것이 내면화 순종이다. 그러니까 자기의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현대인이 갖는 자기실현의 딜레마. 자기를 돌보고 보존하면서가 아니라 자기를 억아바고 이용하고 자기를 희생해야지만 자기가 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 찌질이 달팽이에게 미미크리라는 동경이 생기나. 내가 살려고 한다는 것은 적에게서 이기고 싶은 것이 지만 너무 약하다 보니 적이 원하는 것이 되어서 살려고 하는 것 이것이 미미크리.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강한 것과 관계를 맺지만 그러나 잊지 않는다. "나는 저 강한 것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강한 것과 무관해지는 것.강함과 약함의 관계가 없는 삶. 다른 가능성을 찾는 것. 그것이 미메시스
아도르노가 말하는 것은 내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나가 아니고 사회의 미미크리라는 거다. 그렇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잘 돌봐야 한다. 나라는 깊은 상처를 잘 들여다 보기가 시작이다.
2강. 언어와 육체 그리고 남성성
언어가 육체에 대해 권력화되어가는 과정이 곧 우리의 글쓰기를 배우고 독서를 배우는 과정이다.
언어와 육체의 잃어버린 친화력을 찾아낼 수 있는 영역은 없을까.
무엇을 금기시하고 관리하는 방식은 억누르거나 금지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을 허용하는 방식도 있다. 허용함으로써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밀한 특성을 일반화시키고 있다. 처음에는 욕설 안에 언어와 육체의 관계를 금지시키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그사이 허용되는 순간 어떻게 되는가. 또 하나의 관리대상으로 편입된다.
약한 자기를 끊임없이 억압하고 관리 통제하고 경멸할 때에만 태어나는 마초형의 남성성. 하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늘 자신만만하지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 자기의 약함이 자기의 강함을 언제라도 다시 유약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는 것. 이 강함은 자기 안의 부드러움을 끊임없이 딱딱한 것으로 만들 때에만 얻어질 수 있는 슬픈 강함이다.
3강. 여자의 고고학
우리 사회는 욕정의 사회이다. 절대로 합리적 사회가 아니다. 끊임없이 계산하고 재테크하고 교환관계를 추구하고 합리적 원칙을 추구하지만, 근본적으로 욕정주의자들이다.
정염과 광기의 사회이다. 합리성을 앞세운 욕정. 광기적 획일성, 공공적인 것을 사유재산 화하고 그저 자기 새끼밖에 모르는 것이 욕정이다.
여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를 닮으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약한 것에게 미미크리 한다는 거. 약함이라는 개념도 남자가 만든 것이다. 남자의 강함에 싸우려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만들어놓은 약자라는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 남자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켜주는 이데올로기.
매춘의 역사를 보면 화장이 왜 생겼는지를 알 수 있다. 화장은 원래 매춘녀들이 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자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원하는 존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자기 유지 전략은 곧 화장술의 발달인데, 화장은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자기를 무엇에 맞도록 바꾸는 기술이다.
헬무트 뉴튼의 작품 <그들이 온다> 하이힐의 패러독스는 군화이다. 도전성과 도발성이 근본적으로 군화와 하이힐이 가지는 유사성이다. 여자들이 진짜 여성해방을 하려 한다면 진짜 강자가 되려 한다면 강자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라는 구도를 해체해야 한다. 기호를 해석해 내는 것. 탈 기호화 하는 것.
부드러운 디스턴스: 디스턴스는 아도르노에게 중요한 개념. 대상에게 다가가려 할 때 대상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고 금방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늘 이 디스턴스를 지키면서 다가가는 것. 부드러운 사유과정
내밀성은 서서로가 서로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다가가면서도 디스턴스를 잃지 않는 상태이다.
4강 미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름다움은 자산이 된다. 사유재산, 자산, 재테크의 대상.
타자를 위해 나의 아름다움이 쓰일 때 그것은 곧 나의 아름다움이 약속한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
이것은 연민과 인식이다. 타자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 연민은 또한 파토스이다. 그냥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저항 의식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는 통찰. 나의 권리와 상대방의 권리가 합일을 이루어 서로 사랑하는 기간이 6개월. 사라의 시한이 6개월일까. 카르멘처럼.
5강. 사랑의 도덕
사랑은 프로이트식으로 얘기하면 리비도 운동이다. 새로운 것을 향한 욕망.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존재로서 발견되는 거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고,그러면서 두 개의 감정을 가져오은 데 하나는 두려움이고 하나는 관용이다. 사랑의 근본적 딜레마 때문에 믿음을 배반할 수 밖에 없고, 믿음을 환멸로 바꿀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두려움과 관용은 수용하는 것이다. 애착과 허망함 그리고 열패감. 그리고 부끄러움.
사랑의 도덕은 뭘까요. 사랑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고 환멸의 구조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랑과 시간의 관계, 사랑과 소유의 관계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낡아가지만 매번 새롭게 발견되는 사람. 사랑의 리사이클링..
사랑의 미메시스적 주체란 타자동일화 원칙을 지키는 주체. 다시 말하자면 연애 관계에서 상대방을 나와 똑같이 만들려는 주체가 아니라 내가 상대방과 동일해지려고 하는 그런 주체이다. 하지만 주체는 대상과 하나가 되려고 하지만 불가능하고 항상 빈 곳이 생긴다. 그래서 이 소유불가능성이 전제가 되고, 그것 때문에 욕망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
그를 탬색하고 연구하고 가까이 가려고 하지만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것.
객관적 권력은 사랑을 교환원칙으로 강요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욕망을 관리 통제 욕망을 시장 질서화한다.
6강. 두려움과 매혹 그리고 불면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광기의 사회. 정상화된 광기 사회
약육강식과 갖자 도생의 사회에서 개인이 치러야 하는 것은 고독, 버려진 외로움. 강요된 고독.
아도르도는 문명화된 사회 같고 아주 자유주의적으로 이념화된 사회 같지만 알고 보면 야만적 사회고 동시에 현혹사회라고 얘기한다. 두려움과 매혹.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객관적 권력이 마련해 놓고 있는 어떤 삶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것. 편입욕망. 필립로스 소설 <울분>
객과적 권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개인이 하나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사회를 신화사회라고 하나. 바르트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는 것인가. 카프카의 말" 아니요.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들 것은 아니다. "
"돌아보면 살아온 길들은 언제나 불만스럽고 충분치 못하다. 구부러지고 옆으로 빗겨나간 그 길들은 나의 인생이 본래 목적했던 어느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행의 의식이다.
-손바닥 읽기, 성찰
7강. 죽은 자와 산자에 대하여
롤랑 바르트 "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신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한 일이다. "
-일할 마음조차 생기기 않도록 슬픔에 잠긴 사람은 보통의 감정과는 반대로 시장가치도 갖지 않은 것에게 마음이 끌린다. 문명이 지닌 상처이며 비사회적인 감성인 슬픔은 인간을 목적의 왕국에 종속시키는 일이 온전하게 성공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때문에 세 승은 다른 어떤 것 보다 슬픔이나 애도를 온갖 방식으로 치장하고 변질시켜 사회적인 형식으로 만든다-
슬픔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마음껏 슬퍼할 자유도 없다. 사람이 슬픔에 빠지면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 대상은 결코 슬픔의 감상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삶의 조건들에 눈뜨는 거다. 게 된다는 것이다.
죽은 자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들어가려는 병적인 슬픔에의 집착을 멜랑콜리라 하면, 반대개념으로 애도 작업은 슬퍼하지만 삶의 영역으로 다시 돌아 나오려고 한다.
죽어가는 자와 산자의 관계는 과거에는 이 사이 영역을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병원이 장악하고 테크놀로지가 장악하고 있다. 감정적 교류가 있어야 눈물이 나오지만 애틋한 사랑의 교류가 계속 있어야 죽어가는 사람에 대해서 눈물이 나는데 아무리 슬픔을 느끼려 해도 느낄 수 없다
옛날에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을 때 슬픔을 전달한 언어, 통로가 있었지만 지금은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슬픔을 재현해낼 수 있는 단어들과 어법들이 점점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져 간다.
죽어가는 자나 살아가는 자나 그런 슬픔을 드러낼 장치가 사라진 사회 시스템 속에 살았기 대문에 대체로 가만히 있다. 절망의 진공상태가 고통스러우니까 딴소리를 하든지. 이런 공간통제와 언어상실... 슬픔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죽어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박탈당하고 나아가서는 죽은 자 와 산자의 관계가 정의롭지 못한 관계가 되었는가.
8강. 우둔함과 사치
상처받은 것에 대한 복수심 바로 이것이 우둔함을 만들어 낸다. 숙소의 몰락은 곧 여행의 몰락이다. -
-취향은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취향은 역사적 경험을 정확하게 기록하는 지진계이다. 후기 시민사회의 소위 세련미는 무자비한 획일성이 강요하는 자족적 심미주의 일 뿐이다. 오늘날 취향이 있다면 모든 세련미에 대한 무취향일 것이다. -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사회의 자본을 경제자본으로 생각하는데 그것만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문화자본, 문화권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취향은 더 이상 개인적인 가치가 아니라 계급의식에 소속된다고 얘기한다.
즉 사치품과 세련성은 차이에이 열정이 아니라 소속에의 열정이다.
보들레르의 댄디즘에는 자기혐오와 멜랑콜리가 있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보들레르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대단히 사치스러운 사람이었다. 취향은 결고 자기를 그 어떤 가치에 의해서 비교하려는 게 아니라 다름에의 열정...
권력은 무취향이다.
9강. 상처와 허파.
상처는 허파다. 우리가 숨을 쉬려면 틈새가 있어야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막혀 있다면 유일하게 벌어져 있는 것이 상처이니까.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접근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미메시스적인 것 즉 감정적인 접근이다. 미메시스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이 테마로 가고 충동이라면 이 충동이 테마와는 상관없는 글 쓰는 사람의 감정일 수 있기 때문에 이 감정을 객관적으로 통제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거다.
벤야민"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권력적, 자기 위주의 글쓰기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스완의 계급에 속한다. 그리고 상처가 있다는 것. 이 상처가 허파가 되기 위해서는 오데트를 알아보는 일이다.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에서 얘기하고자 한 것은 결국 상처로부터 해방이 되려면 이 사회적인 상처를 볼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객관적 권력이 만들어 내고 있는 상처를 통해 그 개관적 권력을 알아봐야 하고 그랬을 때 나의 상처도 치유될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