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똘이를 추억하다.

숨그네 2023. 1. 3. 16:14

겨울의 햇살이 문틈으로 쏟아져 들어와 똘순이가 머물렀던 빈자리에 가득 고여있다. 깔판을 두었던지라 햇빛에 바래지 않고 색깔이 더 진한 한평 남짓한 녀석들의 빈자리가 햇볕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한참을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지난 15년 동안 그들의 삶이 머물렀던 빈 공간에 섞여있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본다. 따스한 햇볕에 약간의 한기가 몸살처럼 나를 훑고 가서 그냥 침실로 향해 멍하니 누워있다.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이라는 책을 똘이가 별나라로 가기 전날 읽기 시작했다. 시간의 두께를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란 물리적 시간과 발자취의 깊이를 곱한 것이 "시간의 두께"다. 두 녀석과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우리는 어디에서 연유되었는지 모르는 흩어진 영혼으로 만나 시간의 두께를 만들면서 함께 공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살게 되었을 것이다. 우연의 만남을 가능케 한 선택과 적절한 타이밍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연결했을 것이다.

순이, 똘이의 짝꿍은 두달전 2022년 10월 31일에 먼저 별나라로 갔고 어제 2023년 1월 3일에 무지개다리를 건너 먼 여행을 떠난 똘이를 반갑게 맞이했을 것이다. 똘이는 남편이 작고 힘없이 한쪽에 쳐 저 있는 것이 가엾고 분양받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 같아 순이 짝꿍으로 데리고 왔다. 순이는 이름처럼 순하기가 그지없어서 우린 처음에 짖지 못하는 아이인가 이렇게 의심해 볼 정도로 조용하고 가만가만한 아이였다. 몸 관절이 유연해서 안기면 모든 관절이 유연해져서 우린 그 아이를 "요가순이"라고 칭하며 귀여워했다. 순이는 저항 없이 잘 안기고 조용했지만 사람을 잘 따르거나 사랑스럽게 애교 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순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널 준비를 할 때도 백내장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은 눈으로 꺼멍꺼멍하니 위를 쳐다보기도 하고 걷다 부딪히기도 하고, 결국 위장장애로 잘 먹지 못하면서 조용한 성격처럼 죽음을 순하게 맞이했다. 순이의 죽음으로 홀로 남겨진 똘이는 왠지 슬픔 때문인지 평소의 활기찬 모습을 조금씩 더 잃어갔고 약한 슬개골 때문에 말썽이던 다리의 힘이 급속도로 없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2개월이 지난 어제 완전히 걷지 못하고 누워만 지내던 녀석은 우리와 작별을 했다. 순똘은 작은 뜰의 한 모퉁이에 나란히 묻혔다. 순똘의 죽음으로 가족은 함께 했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하고 울컥이며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이데거는 " 죽음은 분명히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이 아닐 뿐이다. "라고 말했다.
2008년에 우리 곁에 와서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함께 시간을 보내 준 똘이. 가족 중에서도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한 사람만 골라 그를 지키느라 옆에 앉거나 만지기만 해도 사납게 짖어 대 우리는 똘이를 " 평화주의자" 충성쟁이라고 불렀다. 유독 홀로 남겨지는 것을 싫어해 밤에 몰래 침대에 기어들어와 조용히 눈치 보며 발치에 누워 자던 똘이. 간혹 마음이 상한 일이 있거나 불안하거나 두려우면 잽싸게 우리 발가락을 물어서 야단맞던 똘이. 죽기 전 며칠간 새벽에 있는 힘껏 짖어 이웃사람들 민폐라며 잠을 못 자게 짖는다고 꿍하니 군밤을 때리기도 했던 똘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배변이 마려워서 그런 것이었는데 주인이 무식해서 그만. 그래도 고마워. 임종을 지키게 해 줘서. 가는 길에 외롭지 않게 위로를 할 수 있게 시간을 아껴 나를 기다려 준 똘이. 잘 가.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려줘...

아난데 족은 어떤 이들에게 닥치는 우연한 불운을 요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술은 불행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찾게 해 주는데, 집단에서 요술사라 지목된 이도 지나친 규탄을 받지는 않는다. 게다가 모두에게 요술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원인이 분산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술에는 불운의 원인을 사회 전체로 확산해 해소하는 힘이 있다. 요술은 불가항력인 불행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하고 그 책임을 사회전체로 퍼트린다. 우리 사회의 구조와 한계를 명확히 바라보는 데 있어 요술은 대단히 쓸모 있는 장치이다. 이때 요술은 마치 " 구멍 뚫린 원"을 메우듯이 독립된 두 사건이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지 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연한 질병, 필연인 죽음

죽음을 겪은 모든 이들에겐 위안이 필요하다. 때로는 동료의 위로의 말이, 가족의 말없는 다독거림이, 그리고 불가항력의 힘을 가진 자연의 침묵이. 세상에 진정한 우연이 있을까. 우연은 필연의 부정이 아니라 우리의 합리적 이성이 따라가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자연적 운명의 나타남일지도 모른다.




 

ㅣㄹ

우리는 점과 점이 아닌 관계성을 가진 선을 그리길 원한다. 자신의 존재를 지켜서 남기길 바란다. 만약 정말로 그러길 원한다면 지금 선이 그려지고 있는 곳에 내려서야 한다. 나 혼자에게만 열려있는 시간이 아니라 수많은 점들이 선을 그리려 분투하고 있는 두꺼운 시간에 성립된 세계로 내려서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 엮은 의미의 그물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이다라고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남긴 말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 속에서 사람이 살아간다고 했다.
자신의 운명에서 찾아낸 의미를 타산하지 않고 다가오는 세대를 위해 벚나무를 심는 산골 마을 사람들처럼 머나먼 미래로 이어지는 선위에 짜 넣으면 비로소 그 의미는 Webs of Significance"라고 부르기에 적합하다.

함께 발자취를 남기며 살아 갈 수 있길. 그래서 서로의 관계성으로 인해 죽음이 죽음을 넘어서게 되기를
똘이와 순이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