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를 읽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는우리가 죽음을 자신 앞에 불러들여 성찰하는 것이 유한한 인간의 실존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 했다. 죽음은 마치 피하고 싶은 역병이나 전염병처럼 혹은 악취 나는 쓰레기처럼 일상 속에서 유예되고 회피되고 터부시된다. 마치 우리는 영생할 것처럼 죽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삶의 저편에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언제 간 삶의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다. 친인척의 자연사, 그리고 사회적인 죽음과 여러 다양한 죽음을 직면하지만 과연 노후로 인한 자연적인 죽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나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정으로 사유한 적이 있는지. 바로 나의 죽음에 대해. 두렵고도 불안한 그러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내용임이 분명하지만 마치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지 못하면 기차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내릴 수 있는지 사유할 필요가 있다.
2016년 미국 노년 정신의학회지에 따르면 '좋은 죽음'의 정의를 밝히는 논문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아쉬움없이 잘 살다가 고통과 두려움 없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답했다한다.
함께 돌보고 살았던 가족공동체가 해체되어가면서 그에 따른 주거공간뿐만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장례절차가 예전과 다르게 병원위주로 되어가면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죽음을 그저 사용가치가 사라진 상품처럼 폐기되지 않고 존엄하게 인격적으로 맞이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나이들어감에 따라 죽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시간들이 늘고 또 주변에서 부모님 세대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좀 더 가깝게 죽음을 내 곁으로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에 박중철 님의 책은 좋은 안내서가 되어주었다.
그에 따르면 2016년 죽음과 관련된 가장 큰 사건은 세브란스 병원 김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었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죽음을 선언하는 것도 연명치료를 하며 생을 지속시키는 것도 병원에 의존해 왔는데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죽음의 질지수>에서 한국은 보건의료의 질은 높지만 평화로운 임종을 위한 임종의료체계가 미흡하고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들의 수도 적으며 그로 인해 많은 말기 환자들이 사망 직전까지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를 받는다고 한다. 즉 연명의료 없이 고통 경감에 주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의 확대가 죽음의 질을 높이는데 매우 중요하고 그 비용은 국가에서 전액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대다수가 집이 아닌 병원에서 죽는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와 병원이 명실상부 죽음의 공간이 된 가장 큰 원인은 도시화이며 그 과정에서 의료기관의 장례식장 운영으로 인한 영리 추구다. 병원 임종의 가장 큰 문제는 죽음이 인간적인 마무리가 아니라 하나의 의학적 사건으로 처리된다는 것이다.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병원에서는 위중한 환자들 뿐만아니라 말기 환자들의 퇴원까지 막았기에 중환자실에서 마지막까지 연명의료를 받다가 임종하는 것이 사회적 풍토가 되었고 병원임종 역시 심화되었다.
<죽음이 사라졌다>에서 저자는 실패와 노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는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문화를 대신하여 의료를 도구삼아 죽음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항노화의학과 연명치료를 발전시켰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노화와 죽음에 대한 부정은 현대인의 죽음의 질과 이해에 있어 큰 결핍을 낳게 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살아 있는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현대사회의 풍토는 삶을 성숙시키는 실존적 과제로서의 죽음을 더 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과거 철학이 담당했던 죽음의 문제는 이제 의학의 영역으로 넘겨졌다. 끝 모르는 생명력에 대한 애착과 욕망이 무의미한 삶의 연장과 비참한 죽음만을 남게 만든다. 이것을 저자는 <생의 전체화>라고 명명한다.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정수남교수는 공포의 사사화라 칭하는 것을 말하는 데 이는 공포가 사사화된 사회는 생존을 공동체가 아니라 철저히 개인에게 책임 지우므로 개인은 도처에 널린 불안과 고오를 해소하기 위해 외부적으로 전문가 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내부적으로는 괴로움의 감정들에 빠르게 무뎌지면서 공포에 순응하며 살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생존만을 절대시 하는 회피와 억압의 방어기제는 강박적으로 인생의 화려함과 밝은 면만 좇게 하여 균형 있는 삶의 시각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초조함 음 스스로를 늘 약자로 여겨 타인에 대한 연민을 차단하고 자아를 우선시하는 도덕적 이기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에서 ' 우리는 각자 존재하고 , 나는 홀로 소멸한다."라고 진단했다.
현대 도시인의 삶의 특징 세가지는 첫째, 효율성이 중요한 가치가 되어 질병, 노화, 고통, 죽음과 같은 현상들을 배제하려는 경향 둘째, 가족 간의 유대감과 부양에 대한 책임감이 약화되면서 이제 늙거나 병들어 쇠약해지면 병원, 요양원드의 의료기관으로 옮겨지고 죽음도 그곳에서 맞게 된다는 것 , 셋째 이렇게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으로 축소되고 사회공동체 차원에서 죽음의 의미를 숙고하고 공유하는 노력이 없게 된다는 것. 즉 이것이 <죽음의 개별화>
죽음이 타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는 허무함과 안타까움. 자신의 삶과 상관없이 타인의 죽음이 세상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무의미한 사건이 되어버린 <죽음의 범속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공포를 다루는 방식은 개인차원에서는 철저히 망각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일상으로 부터 배재하는 억압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죽음의 의료화>는 오늘날 죽음이 배재되고 소외되어가는 과정의 종착역이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두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죽음을 연기하는 기술주의 의학의 적용, 즉 죽음은 위험 관리 차원에서 다뤄진다.
둘째, 죽어가는 육체를 일상의 공간으로 부터 격리하는 것. 하지만 병원에는 임종실이 없다. 의료법상 병원 안에서 임종을 했거나 병원이 아닌 곳이더라도 의사의 마지막 진료 후 48시간 이내 동일 병명으로 사망하는 경우에는 병사로 사망진단서가 가능하지만 병원이 아닌 곳에서 다른 이유로 사망했거나 병원 퇴원 후 48시간이 경과한 경우 사망진단서 대신 사체검안서가 발부된다. 이런 이유로 편의주의로 인해 병원에서 사망하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의 안락사 논쟁은 1982년 우리나라 권투선수 김득구가 미국 라스베이거에서 시합 중에 뇌출혈로 뇌사에 빠진 사건과, 1997년 보라매병원사건, 2008년 세브란스 할머니 사건이다. 1982년 당시 미국현행법상 뇌사판정과 장기기증 없이는 뇌사자의 기계호흡장치 제거가 불가능했지만 이듬해 미국은 뇌사도 죽음으로 공식인정하면서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된다. 김득구 선수 사건 이후 한국에서 생소했던 뇌사라는 의학적 용어가 사회적 용어와 함께 사용되었다 한다.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법적 처벌이라는 두려움에 빠진 의료계는 기존의 관행을 버리고 새로운 규법에 맞춰 최선이라는 이름 아래 연명의료가 준법이 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다 2008년 기계호흡장치로 연명하던 김할머니 의 가족들이 세브란스병원측에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하고 나중에 민사소송까지 가면서 기계호흡장치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김 할머니 사건 이후 한국사회는 첫째 의학적 무의미성이 제기되면서 생명을 절대시 하던 기존의 생명윤리가 흔들리게 되었고 무조건적인 최선이 오히려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존엄을 파괴하는 악행일 수 있다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둘째, 환자의 자기 결정권이 의료인의 판단보다 우선시 된다는 것이다.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사회적 담론과 공감대 형성 노력은 건너뛴 채 바로 입법작업에 착수하면서 규범이라는 굴레 속에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결과를 낳았다.
연명의료결정법으로 인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공식이름과 법정서식이 정비되고 효력 역시 법으로 보장되었다.
그리고 뇌사와 심폐사만을 죽음으로 인정하던 관례에서 임종과정이라는 새로운 죽음의 범위가 등장했다.
그리고 말기 환자의 경우 호스피스 완화치료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완화하고 삶의 질을 높이도록 국가가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직접적인 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지만 유럽에서는 1984년 네델란드에서 안락사를 허용한 판결이 나왔다.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안락사 (euthanasia), 그리고 인도적으로 허용하는 것을 존엄사( death with dignity)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연명의료결정법은 불가피성을 확보하기 위해 말기환자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판단을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 1인을 통해 이중으로 판정하도록 규정한다. 그리고 말기 환자에게는 연명의료를 피하고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게는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법으로 보장한다.
안락사의 경우 스위스는 의사 조력 자살만 허용하고 룩셈부르크와 프랑스는 현재 직접적 안락사만 허용한다.
한국에서는 연명의료 결정에 있어 인위적인 무과 영양공급의 중단은 개인의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하지만 음식 섭취를 중단하는 아사는 실제 문명사회에서 통념상 자연사로 분류한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 스콧 니어링은 전쟁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반대하며 한 때 스파이로 몰려 재판정에 서기도 했는데 100세가 되자 서서히 음식을 끊고 주스만 마시며 지냈고 이어서 물만 마시다 임종을 맞았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죽음의 방식을 이렇게 밝혔다
"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 싶소,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죽고싶소. 죽어서도 의식의 활동을 멈추고 싶지 않소. 그러니 진통제나 진정제는 사용하지 마시오. 심장충격이나 강제적인 음식 주입, 산소공급등 응급처치를 하지 않길 바라요. 내 침대 주위의 사람들이 안정과 존엄을 유지한 채 나에 대한 이해와 즐거운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한 채 이 세상을 떠나고 싶소. 나는 화장을 한 후 우리 집 나무 아래에 뿌려지기를 원하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쳐가는 죽음의 모습을 "최빈도 죽음"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나른 말년에 요양시설과 종합병원 응급실, 중환자실을 떠돌다가 그 쳇바퀴 어딘가에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된다. 최빈도 축음의 쳇바퀴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첫째, 임종 전까지 통증, 호흡곤란, 발열등 고통스러운 신체증상이 집에서 대처 가능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가정 호스피스 제도가 우리나라에 있지만 모든 지역에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간병하는 가족들의 여건이 집에서의 돌봄을 뒷받침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있지만 그 대상 질환이 암과 일부 질환으로 제한되고 있어서 노환이나 뇌졸중, 치매, 심부전등은 해당되지 않는다.
생존은 그대로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지만 실존이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방식이다. 국가가 사회 안전망이나 공정에 무관심하여 개인이 빈곤과 차별에 처해 실존을 포기하고 생존만을 위해 살 때 개인은 자신의 삶이 모멸받는 폭력을 느낀다. 실존을 억압당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마치 기득권이나 강자들을 위한 먹잇감 또는 기계처럼 다뤄지면서 강자들의 실존을 위한 수단과 소재로 소비된다. 여기서 자존감은 자신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실존이라는 삶의 방식을 살아가는 것이고 자존심은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게 하고 위축된 자존감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벽을 세우게 하는데 이러한 자기 보호의 감정을 자존심이라고 한다. 자존심은 자아에 대한 불안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폭발하는 기체와 같아서 주변의 무시에 무척 예민하다. 영국의 심리학자 앤서뇌 스토는 저서 < 고독의 위로>에서 "혼자 있는 능력은 귀중한 자원이다. 혼자 있을 때 사람들은 내면 가장 깊은 곳의 느낌과 접촉하고 , 상실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태도를 바꾼다"라며 고독이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설명한다.
나는 나의 묘비명을 어떻게 쓸까. 고민한다. 묘비명에 나의 정체성을 담아 쓰고 싶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의 묘비명은 " 쓰고,사랑하고, 그렇게 살았노라"라는 말로 그의 59년의 삶과 존재의 의미를 함축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다양한 실험을 통해 학자들은 죽음 불안과 자존감의 상관관계를 연구했고 "인간은 존재 의미를 알기 위해 노력하면서 죽을 운명과 싸우고, 죽을 운명임에도 더 높은 자존감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라고 주장했다.
하버드 성인발달 연구에서 행복한 삶의 핵심 요인으로 성숙을 꼽았다. 성숙한 방어기제는 인내심을 발휘하거나 재치를 발휘해서 고통과 슬픔마저 성장의 원동력으로 사용하거나 자신이 힘들 때 오히려 기부나 봉사활동으로 자존감을 지키는 태도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올 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영국의 국민작가 줄리언 반스는 갑작스러운 인생의 동반자를 먼저 보내고 <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 하는 방법>이라는 죽음을 탐색하는 글을 썼다. 그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웃으면서 체념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저자는 친절한 죽음을 위해 다음 다섯 가지 과제를 제안했다.
첫째는 종합병원 임종실 설치 의무화
아직은 입법화되지 않았지만 2021년 자문형 호스피스 제도가 도입되어 말기 환자가 임종기에 들었을 때 1인실 비용에 대해 건강보험 혜택이 주어진다고한다.
둘째, 물과 영양공급 의무조항 삭제
연명의료결정법이 완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인공영양 의무조항도 없어져야 한다는 것
셋째, 호스피스 완화치료의 적극적 확대
현재 대상자인 암 에이지, 만성폐쇄성 폐질환, 간경화 이렇게 4개 질환군에서 대상 군을 확대하고 보편화해야 한다.
넷째 생애 말기 돌봄에 대한 대책 마련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삶의 질까지 살피는 간병에 대한 사회적인 돌봄 마련이 시급하다.
다섯째. 의과대학과 병원에서 죽음을 가르치자
환자와의 교감과 연대를 바탕으로 그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부합하는 의료와 돌봄을 제공하는 "서사적 생명윤리"가 대안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