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가장 푸른 눈- 토니모리슨

숨그네 2023. 3. 9. 22:21

1993년 미국 흑인여성 작가로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 <비러브드><재즈><파라다이스>등의 작품을 20여 년 전에 읽었다. 금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얼마 전 < 가장 푸른 눈>을 읽었다. 이미 오래전에 구입해 둬서 다행이다. 왜냐면 이미 품절이거나 절판된 책이어서 중고책방에서 구입하려고 하면 책 상태가 좋지도 않은 것이 2만 원을 호가한다. 잠자리 독서로 매일 30분씩 영문판으로 먼저 읽었으나 전문 번역가가 아닌지라 번역이 까다로운 부분이 상당히 있었다. 그래서 다시 번역본으로 읽었다. 토니 모리슨 작품은 읽어내기가 너무 고통스럽다. 그녀가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소재와 이야기들은 사회역사적으로 소외되고 차별당한 이들의 고통스러운 내러티브이고 그 과정에서 폭력적으로 파괴되고 황폐화된 내면의 풍경을 마치 불에 달군 인두로 생채기를 후비듯 파헤치고 있다. 내부로 향한 그 시선은 냉철하면서도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곳에 얼룩져있는 폭력적인 야만의 흔적들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작가는 작가 특유의 차갑고 뜨거운 상징적인 비유와 문학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의 시선과 마음의 파동을 이끌어내어 소설 안에 버무린다. 소설 속 인물들과 감정적인 얽힘을 통해 독자인 나는 가슴앓이를 하기도 하고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때론 책을 덮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가장 푸른 눈>은 백인들이 설정한 일방적인 미의 기준이, 피부색이 다른 흑인에게 강요될 때 파생되는 대물림되는 상흔을 고발하며, 진정한 미의 기준이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질문하고 있다. 이글의 화자는 어린 소녀 클라우디아의 시점과 전지적 작가시점, 그리고 어른이 된 클라이드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모리슨은 단순히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착종된 미의식과 왜곡된 성의식으로 야기된  흑인들인 피해자들의 고통과 비통한 현실만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폭력과 야만의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왜곡된 허위의식과 기만을 심어주고 자신의 삶을 질곡 속으로 내몬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다양한 인물들, 대표적인 인물인 피콜라,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강간하여 아이를 갖게 한 아버지와 가정폭력으로 얼룩진 상처받은 내면을 모두 못생긴 자신의 외모 탓으로 돌리며 백인의 가장 푸른 눈을 선망한다. 그 푸른 눈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아빠 촐리는 어떠한가. 기차역에 버림받고 할머니 손에 사랑으로 자라지만 백인에게 능욕당한 경험과 생부에게 다시 내처진 뼈아픈 현실에 주저앉아 술과 폭력으로 자신을 저주하며 결국 딸에게 몹쓸 짓을 하고 만다. 그리고 촐리의 아내, 피콜라의 엄마 또한 가정폭력에 노출된 자신의 자식들을 구해내지 못하고 백인들의 가정부로 살며 그들의 삶을 열망하고 만족해한다. 빗나간 영성과 뒤틀린 욕망 속에서 아동성애자로 고뇌하는 소우프헤드 처치의 과거는 인종차별과 지배문화의 다층적인 횡포를 하나하나 고발한다. 이들의 무책임한 행동은 결국 정신이상이 되어, 자아분열로 생긴 또 하나의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피콜라의 비극을 종국에는 초래하고 만다.
유일하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시점인 클라우디아와 그의 언니 프리다를 통해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들에게 착종적으로 주어진 이미지와 인식을 하나 둘 거둬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토니모리슨은 <아름다움은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 작품을 통해 왜 피콜라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지, 또한 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지, 그녀의 욕망 속에 숨어있는 인종적 자기혐오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깊게 사유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즉 왜 아름다룸이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왜 폭넓은 대중의 지지가 필요한가. 그것은 외부의 시선 때문에 생기는, 상처만 안겨주는 열등감을 벗어버리자는 것이다며, 한 인종 전체를 "귀신 들리게"하는 무엇인가가 사회의 가장 여린 구성원인 어린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상처받기 쉬운 소녀에게 어떻게 뿌리내리는 가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말한다.
소설기법에 대해 모리슨은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이 소설에서 특정 인종의 자기 멸시라는 쓰라린 상처를 건드리고 노출시킨 다음. 그것을 마취제가 아니라 언어로 진정시키고자 했다. 인종 간의 위계질서와 우월감을 배제하고 , 자유로운 산문체로 내 작품의 토대가 되는 전략을 세웠다.  첫 문장인 " 모두가 쉬쉬 했지만"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될 비밀을 말할 때 하는 말이다. 여기서 공모란 연루되면서도 배제되고, 드러나면서도 숨겨져 있다.  하나의 사적비밀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비밀의 폭로이다. 우리 자신들과 외부의 세상이 쉬쉬해왔던 비밀말이다. 
이 글은 강간의 피해자들이나, 잠재적 피해자드르이 관점에서 여성 폭행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느낌과 의미가 가득한 언어 때문에 겪었던 문제들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그런 언어가 널리 사용되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문명화된 언어'들은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가장 푸른 눈>은 피콜라의 삶처럼 쫓겨나고 무시당하고 오해받았다. 피콜라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정도가 되기까지 무려 25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럼 책 속으로 들어가 모리슨이 절묘하게 묘사한 언어들을 따라가 본다. 

-피콜라의 아버지가 그의 씨앗을 검은 피부의 자기 딸에게 뿌렸던 것처럼 우리도 검은흙으로 덮인 작은 땅에 씨앗을 파종했다. 우리의 순수와 믿음은 피콜라의 아버지가 지녔던 욕정과 절망만큼이나 비생산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죽었고 우리의 순수도 사라졌다. 그 씨앗들도 메말라 죽었고 피콜라의 아이도 죽었다. 왜라는 말의 해답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 라는 말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가을 >

-수녀들은 욕정처럼 소리 없이 지나가고 술 취한 남자들과 술 취하지 않은 눈들이 그리크 호텔의 로비에서 노래를 부른다. 
-어른들은 우리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단지 지시만 내릴 뿐이다. 정보는 주지 않고 명령만 내린다. 우리가 무언가에 걸려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면 우리를 흘깃 본다. 무언가에 베이거나 멍이 들면 넋이 나갔냐고 말한다. 감기라도 걸릴 양이면 우리의 부주의에 넌더리를 치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쫓겨나는 것과 나앉는 것은 차이가 있다. 쫓겨나면 갈 곳이 있지만, 거리로 나앉으면 갈 곳이 없다. 계급과 계층 모두에게 소수인 우리는, 삶의 주변부를 이리저리 떠돌며, 삶의 중심부로 기어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우리는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백인 인형을 꼬집으면 황홀하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겠지, 이런 무자비한 폭력이 얼마나 혐오감을 주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의 수치심은 은신처를 찾아 발버둥 쳤다. 최상의 도피처는 사랑이었다. 그래서 초기의 잔학성이 날조된 ㄴ증오로 그리고 그 증오가 거짓된 사랑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것은 셜리 템풀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었다. 한참 후에 청결에서 기쁨을 알게 되었듯이 셜리 템플을 숭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런 변화가 진보가 아닌 순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브리드러브 집안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것은 석탄난로였다. 그것은 집안의 모든 것, 모든 사람과 상관없이 존재했다. 결국 증오하는 가구 한 점이 초조하고도 막연한 불안을 불러일으켰다. 그 불안은 그 집구석구석에서 위용을 떨쳤고, 그것과 상관없는 것 들에 대해서도 기쁨을 느낄 수 없게 했다. 
-브리드러브 가족은 공장의 인원감축으로 생활이 일시적으로 힘들어 생긴 상점 자리에서 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한 흑인이기 때문에 거기 살았다. 자신들이 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렀다. 대대로 물려 맡는 가난이 망신스럽긴 해도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한 몰골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추하지 않다는 확신을 줄 수 없었다. 
-그들은 추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망토처럼 걸치고 세상을 배회했다. 그리고 피콜라는 자신의 추함 뒤에 숨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추함을 가릴 가면이 생기기만을 기다렸다. 
-그들 부부의  싸움을 박탈하는 것은 삶의 모든 열정과 분별을 없애는 것과 같았다. 촐리의 습관적인 음주와 고약한 성질 덕분에 그들 부부는 삶을 견딜 수 있었다. 
- 피콜라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밤 푸른 눈을 달라고 기도했다. 남자 어른들의 눈 속에는 무관심, 혐오, 심지어 분노를 보았다. 그들의 멍한 표정에는 뭔가 날카로운 것이 있다. 눈썹 아래쪽 어딘가에 혐오가 배어있다. 그녀는 그런 혐오가 모든 백인의 눈에 도사린 것을 보아왔다. 그 혐오감은 그녀와 그녀의 검은 피부를 향한 것이 틀림없다. 
-메리 제인 사탕. 어쩌 던 사탕을 먹는 것은 푸른 눈을 먹는 것이고 메리 제인을 먹는 것이다. 메리 제인을 사랑하고 메리 제인이 되는 것이다. 
 
<겨울>

아빠의 눈은 눈사태 조짐을 보이는 눈 덮인 절벽 같고, 눈썹은 앙상한 검은 나뭇가지처럼 휘어졌다 아빠의 턱은 그루터기가 남은 눈 덮인 들판 같고, 툭 튀어나온 이마는 이리호의 얼어붙은 드넓은 수면 같아서 , 어둠 속에서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냉담한 생각들을 숨긴다. 겨울이 어떤 것으로도 볼 수 없는 지긋지긋한 매듭으로 뻣뻣하게 변할 때쯤, 무언가가 이니 어떤 사람이 그 매듭을 느슨하게 했다. 그 아이는 매듭을 풀어 은빛 실로 우리를 옭아맸다. 모린 필
나는 그녀를 보며 곤혹스럽기도 하고, 신경질이 나기도 했지만 , 넋을 빼앗기곤 했다. 
- 껌둥이, 그들이 삼켜버린 어리석음, 자기혐오, 절망은 텅 빈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타올라 '경멸'이라는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차갑게 식은 경멸은 성난 입술로 분출되어 모든 것을 소진시켰다. 
-깜둥이가 사는 곳에은 풀이 자라지 않았다. 꽃들도 죽었다.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들이 사는 곳에는 빈 깡통과 타이어만 수북했다. 그르은 차가운 검은콩과 오렌지 주스를 먹고살았다. 파리 떼처럼 배회했고 모여들었다. 
<봄>

처음 나온 작은 가지들은 가냘프고 초록빛이며 유연하다. 그것은 둥글게 휘어지지만 꺾어지지는 않는다. 봄에 꺾은 회초리로 맞으면 고통이 한참 이어졌다  아직까지 봄이 오면 나뭇가지에 얽히 아픈 기억이 떠올고 개나리꽃이 피었어도 전혀 기쁘지 않다. 
-붉은 낙엽이 떨어지듯 웃음을 쏟아냈다. 웃음이 소용돌이치고 부서지며, 도망치는 우리를 따라왔다. 
< 폴린;피콜라의 엄마>
사소하긴 하지만 심하게 다리를 저는 신체장애는 그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어디에서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고 어디서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자신이 혼자라는 느낌,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때 그녀는 늘 발 탓을 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가족이라는 고치에 갇혀 조용히 혼자만의 기쁨을 키웠다. 
그녀는 새로 태어난 것들과 적막한 길, 누군가의 손을 잡고 어디선가 나타는  나천 사람들, 태양이 지는 숲을 보며 늘 죽음을 생각했다. 촐리를 보았을 때 그녀는 고마움을 느꼈다. 친절하고 활기차고 세상에 많은 웃음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
촐리가 직장생활을 하며 즐겁게 밖에서 지내면서 그녀는 홀로 남겨지고 돈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백인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낭만적인 사랑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그것들은 인간의 생각 가운데 가장 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미덕이라 생각하며 집착했고 자기혐오에 젖어들었다. 영화를 보며 절대미의 기준을 찾아낸 그녀는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피셔 씨의 집에서는 물건들을 정리하거나 닦을 수도 있었으며 단정하게 줄을 맞출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폭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고 편치 않은 한쪽 발의 터벅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녀는 아름다움과 질서, 청결함과 칭찬을 발견했다. 
폴린은 이런 질서와 아름다움을 오로지 혼자서만 즐겼고, 지기 집이나 아이들에게로 흘러들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고결한 인격을 , 두려움과 함께 가르쳤다. 아들에게는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를 불어넣었고 , 딸에게는 성장에 대한 두려움,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삶에 대한 두려움을 불어넣었다. 
-<촐리:피콜라의 아버지>
그들은 욕정의 시기와 수유기를 거쳐온 그들은 눈물가 공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하는 장소에서 화를 낼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고 죽음을 바랄 만큼 지쳤으며, 고통의 실재를 무시하면서도 받아들일 만큼 무관심해졌다. 그들은 마침내 자유롭게 된 것이다. 이런 나이 든 흑인 여자들의 삶은 그들의 눈에 모두 담겨 있다. 비극과 해학이, 유약함과 평온이, 진실과 환상이.
-만일 백인인 사냥꾼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가졌으면 그는 파멸했을 것이다. 그들은 어른이었고 백인이었으며 무기까지 있었다. 반면에 그는 어린 흑인이었고 무력한 존재였다. 그들을 미워하게 되면 그 증오가 자신을 부드러운 석탄조각처럼 태워버려 오직 재와 연기만 남기리라는 사실을 그는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다. 
엄마 손에 쓰레기 더미에 버려지고 주사위 놀이를 선택한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신세였기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었다. 자신만의 취향과 욕망을 지닌 그는 혼자였다. 딸에 대해 그가 느낀 감정의 순서는 혐오, 죄의식, 연민 그리고 사라이었다. 죄의식과 무능함에 대한 인식이 불협화음을 내며 삐꺽거렸다 
<소우프헤드 처치>
사람들과의 사소한 접촉에 대한 혐오감을 느껴 물건 한 사랑한 늙은 남자. 어린 시절 그는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 듯한 이 혐오감 때문에 매우 불안해했다. 그는 독자, 조언가 그리고 해몽가가 되었다. 금욕은 피난처였고 침묵은 방패였다. 
그의 성격은 복잡했고, 대칭적이며 균형미가 있었고 견고하게 만들어진 아라비아 풍의 장식 같았다. 
그의 독백: 식민지에서 우리는 백인 주인들이 가장 눈에 띄는 특성들, 그들의 가장 나쁜 점들을 배웠죠. 기품보다는 속물근성을 갖게 되었고, 귀족적인 사람이 되기보다는 계급을 의식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권위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학대하는 것으로 교육은 학교에 가기만 하면 끝나는 것으로 알았지요. 우리는 폭력을 열정으로 게으름을 여유로 무모함을 자유로 잘못 알았으며 묵인을 여자다운 것으로 획득을 남자다운 것으로 당신이 주신 노동도 혐오했어요.

<여름>

탱탱해진 딸기를 으깰 때가 되면 먼지가 만호 하늘이 낮게 드리워지는 여름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름은 폭풍우의 계절로 기억에 남아있다 
우리는 피콜라 때문에 당혹감을 느꼈고 그 아이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그런 감정이 사라지자 그 아이에게 그냥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슬픔에 잠겨 새 자전거는 잊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슬픔을 나누지 않았기에 그 슬픔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혐오감을 느끼고 즐기는 듯했으며 충격을 받고 격분하거나, 심지어 그 이야기에 흥분하기도 했다. 
피콜라의 집 주변에 돈을 묻고 그걸 다시 파내면 안 돼 씨앗은 우리 집 뒤에 묻고 지켜보면 돼. 싹이 트면 모든 일이 잘 됐다는 뜻이야..
우리가 심은 꽃들은 결국 자라지 않았다. 내가 씨앗을 너무 깊게 심었다고 말했던 프리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은 호주머니 안의 손수건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 처음에는 모두 그 아이의 것이었고, 나중에는 그 아기로부터 받은 것이 었다 그 아이가 알고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아이를 통해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나서 아주 건전해졌다고 느꼈다. 못생긴 그 아이를 짓밟을 때 우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그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우리의 장식물이 되고, 그 아이의 죄는 우리의 죄를 씻어주었으며 그 아이의 고통은 위를 건강하게 빛나게 했고, 그 아이의 어색함은 우리가 유머감각이 있다고 믿게 했다. 그 아이의 주저하는 말투는 우리가 유창하다고 믿게 했다. 그 아이의 가난은 우리를 관대하게 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악몽을 잠재우기 우해 심지어 그 아이의 몽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숫돌 같은 그 아이를 보며 다듬었고, 그 아이의 연약함으로 우리의 성격을 강인하게 다졌으며 힘의 환상에 빠져 하품했다.  그것은 환상이었다. 우리는 인정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용감하다고 하며 도둑들처럼 삶으로 부터 숨기 위해 죽음에 호소했다. 그럴듯한 말투가 지성으로 둔갑했다. 성숙함을 가장하기 위해 습관을 바꾸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그 자체이다. 사악한 사람은 사악하게 사랑을 하고, 난폭한 사랑은 난폭하게 사랑을 한다. 약한 사람들은 약하게 사랑을 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 사랑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사람의 사랑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받는 사람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아를 망각하고 얼어붙는다. 
 
씨앗을 너무 깊게 심어서가 아니라 우리 마을의 토양 때문에 싹이 트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나라의 흙은 어떤 꽃들에게도 맞지 않다. 어떤 씨앗들에게는 양분을 주지 않는다. 열매를 맺을 수도 없게 한다. 
땅이 그의 의지로 무언가를 죽이면 우리는 묵인하면서 그 희생자는 살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너무나 너무나 , 너무나 늦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