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다

장마가 할퀴고 간 삶의 자리가 회복되기도 전에 다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억세게 들이치는 몇 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베란다에 내놓은 빨래가 고슬고슬 마르는 냄새가 반갑고 기분 좋은 후덥지근하지만 햇살이 비치는 날. 어제 다녀온 피아골 계곡의 물은 맹렬하게 산자락을 쿵쿵거리며 냅다 달리고 있었다. 수해가 날 때면 어린 시절 바닷물과 함께 전국 최고 강수량을 기록하는 내 고향의 여름 장맛비가 하천을 범람해 집을 절반가량 삼킨 기억이 난다. 허우적대며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윗동네의 낯선 이모집에서 며칠을 보낸 후 그칠 기미가 없이 매섭게 내리는 비를 원망하며 물속에 잠긴 집을 염려했던 날들. 장마가 그친 후 되돌아와서 본 집의 몰골은 말 그대로 처참하게 진흙으로 범벅이 된 채 난장판. 장맛비의 위력을 여려 차례 경험하고 난 후 여름이 무섭고 싫었다.
오랜만에 일상과 작가의 생각을 가지런하게 펴낸 단정하면서도 다정한 수필집을 읽었다. 그녀가 타전해온 메시지의 내용은 다정하면서도 야무지고 때론 눈물겹게 작은 존재들의 생존의 허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를 눈물 나게 하는 것은 뭐일까. 상실에서 오는 눈물도 있지만 너무 잘고 연약한 것들이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내며 버팅거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느끼는 연민과 공감의 눈물. 사라지는 것들에 색깔을 주고 냄새를 되찾게 해주는 회생의 글쓰기.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사는 것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 백수린의 글은 가만가만 삶의 결들을 들추며 별것 아니지만 별것인 우리의 일상과 내면풍경을 고슬고슬 햇빛에 말리듯 잘 꼼꼼하게 이야기로 들려주는 힘이 있다. 그리고 간혹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뭉클. 눈물 한 방울이 된다.
- 가끔은 씨를 뿌리고 수확을 하는 문제에서 지상의 온갖 피조물 중 단지 우리 인간만이 사물의 이런 순환을 비난하벼, 모든 사물의 순환이라는 불멸성을 넘어, 우리에게 개인적이고 고유한, 특별한 불멸성을 가지려 한다는 것이 얼마나 특이한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
무질서하게 자란 식물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생명이 나고 메마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봄이면 소생하는 순환의 과정을 지켜보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무용이 아름다움-유리벼잉 아름다은 것은 섬세하고 연약한 물성을 지녔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견고한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유리병을 좋아하는 작가는 오래된 물건들을 모으고 그 물건들이 살아낸 시간들을 아낀다. 언젠가는 누구를 위해서 사용되었을 물건들. 세월이 지나 버려진 것들의 쓸쓸한 풍경을 생각하면 무용의 것들은 결국 무용이 아닌 것.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결로 세분되는 행복의 감각들을 기억하며 살고싶다.
-완벽이란 말은 얼마나 폭력적인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게으름의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완벽한 것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결국 그 누구도 행동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속삭임이다.
All or Nothing이라는 굴레. 완벽주의가 만들어 낸 굴레에서 얼마간 거리를 두고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쉽게 허무에 지고 비관주의에 빠지는 내게 생긴, 그래도 아직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힐 수 있다고 믿으려 애쓰는 마음. -
며칠 전 ”경이로운 소문“이라는 넷플랙스 드라마를 몰아보다가 날밤을 샌 일이 있었다. 무엇에 빠지면 그것에서 허우적대다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 성격탓에 늘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재미라는 유혹에 매번 걸려 넘어진다. 환타지 드라마 였지만 주인공 소문이가 내뿜는 괴력의 힘은 결국 분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구제하기 위할 때 더 강해진다는 것. 우린 내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가진 미천할지 모르지만 작은 힘들을 사용했을 때 행복해지고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진실.
-내가 우리 동네를 처음 알게 되고 좋아했던 건 이곳에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미한 빛 속에서 저마다 서사를 품고 늙어가는 집들과 골목들이 얽힌 고요한 세계였다.
사람들이 편리를 쫓아 아파트에 살다가 나이 들면 동네에 들어가 처마들이 맞닿는 곳에서 서로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누고 담을 넘어가는 덩굴에 열린 감을 따먹거나 마당을 들여다보며 흙을 매만지는 사람살이를 그리워하는 생래적인 것들을 되찾고 싶어 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시간들이 흘러 쌓여 함께 늙어가는 것들을 보고 싶어 해서일 것이다. 오래된 집과 동네에 대한 슬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 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이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 델핀 오르빌뢰르의 <당신이 살았던 날들>
슬픔은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을 겪어낼 수밖에 없는데, 그건 슬픔에 잠긴 사람의 마음리란 살짝 스치기만 해도 쉽게 긇히는 얇은 동판을 닮아서다.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겪오 있는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끝내 포개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더없이 예민해지고, 슬픔이 단 한 사람씩만 통과할 수 있는 좁고 긴 터널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디 슬픔뿐이겠는가. 인간이 겪는 오만가지 감정들은 제각각으로 개별적이어서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어찌 보면 오역과 오해의 경계선에서 겨우 소통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모든 경험은 닮았지만 개인의 역사를 보면 다 개별적이고 고유한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것이 아름다운 것은 시간을 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사람이나 동식물처럼 생명을 지닌 것이든 고안처럼 그러지 않은 것이든, 무언가가 품위와 존엄을 가질 수 있는 건 수많은 상실과 슬픔을 견뎌낸 견디며 쌓아 올린 세월의 무게가 있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있다.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그것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더불어 인간도 그럴 것인데 오랜 시간 함께 친구였던 이들과 별별 이유로 헤어지고 연락이 끊기면서 이제는 외롭게 혼자 남겨진 나를 돌아볼 때면 나는 간혹 이런 생각이 든다.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나는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냥 나의 정신적 편안함을 위해 쉽게 이별을 선택한 건 아닐까. 그 세월이 얼마인데…
-인생이란 죽음과 탄생 사이를 날아가는 화살이 아닐까. 그 가냘픈 화살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과녁에 꽂힌다. 하지만 우리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에서 리베카 솔닛은 “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을 수많은 방식으로 맞닥뜨리는 것, 혹은 소멸로부터 달아나는 것, 혹은 소멸을 깨닫기 조차 회피하는 것이다. 혹은 이 모두를 동시에 겪는 것이디ㅏ.”
- 나는 사치와 상업, 공업과 항구와 공장, 옷감과 금속을 향한 마음을 당신에게 버린다. 그 너니 내가 연극을 위해 울고 모차르트를 듣고 라파엘로를 보며 온종일 바다의 파도를 바라볼 수 있게 내버려 두기를 < 귀스타브 프로베르 “가만히 걷는다”
-사회가 어떻게 노인을 타자화해 왔는지에 대해 깊게 사유한 시몬스 보부아르는 60대에 접어들어 쓴 노년에 관한 책에서 일찍이 우리는 노인을 타자로 여기기 때문에 노화 즉 나 자신이며 동시에 스스로가 타자가 되는 이 낯선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이 듦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는 가장 가치 있는 축복은 젊은 시절 우리의 눈을 가리는 허상과 숭배를 치워버리고 우리가 진정성에 가 닿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적었다.
아주 오랫만에 그녀의 책을 읽으며 행복하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