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에서 배워라

“다양성은 우리의 힘입니다. 차이는 우리의 선생님입니다. ”-해나 개츠비
해나 개즈비는 오스트리아 테즈메이아니 출신, 레즈비언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예술가이다. 비주류가 살아남기 위해 수치스러움을 덮는 겸손함으로 가장한 자기 비하로 스스로를 낮춰 발언의 기회를 얻어서 라도 주류를 향한 매운 한방을 날리기 위해 분투했던 성소수자 여성 코미디언. 그녀는 재건된 여성이다. 그녀의 말대로 고통을 딛고 자신을 다시 세운 여성이야말로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
나는 해나의 스탠드 업 코미디를 보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거의 400 페이지가 넘게 기록한 자서전적인 책을 통해 그녀의 삶을 만나고 그녀를 만났다. 다소 낯설고 어색한 , 벽장에서 해골로 발견될 때까지 숨어버리는 수없이 많은 비밀과 수수께끼,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상처로 얼룩진 삶의 진실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우리에게 진실된 삶이란 무엇인지, 자신을 알고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고 서로 이해하고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한 지, 사회적으로 재구성되고 설계된 자신의 모습이 아닌 진정한 자아를 사랑하는 방법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독한 농담처럼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당신의 정체성대로 삶을 삶답게 살고 있는가. 그녀는 자신도 알지 못하면서 수동적으로 수용된 사회적 통념에 맞춰 살면서 자신의 정신생태학적 문제와 심리적인 오류로 인해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숱한 우울증과 고립감 그리고 공황장애와 멜트다운을 겪으며 살다 자신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준 예술사를 공부하면서 차츰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관념들이 오래된 악습이거나 악의적인 편견, 혹은 타인을 고립하고 악마화한 결과물로 이익을 얻고자 한 기득권층의 적대적인 편 가르기와 잘못된 신화화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고 자신을 우울증과 고립감으로 숨게 했던 증상이 자폐 스펙트럼과 ADHD라는 신경계 질환으로 인한 것임을 20대 이후에 알게 되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자신을 토닥거리며 자신의 정체성과 병증을 인정하게 된다.
그녀의 이야기는 독한 감기약처럼 두통을 사라지게 하며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왜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데 타인의 더 한 고통과 상처 한 꼬집이 필요한 것일까?
그녀가 살면서 치러야 했던 수 없이 많은 모욕과 관계의 어긋남으로 인한 자책과 자기 비하, 그리고 우울한 고립감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자신을 다시 들여다 보고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희화화해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만나는 과정에서 드러내면서 차츰 치유가 되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역으로 건드리며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가졌다. 타인과의 관계성, 그리고 대화성이 결국은 서로를 구제한다.
그녀의 말대로 분필에 물이 스며들듯 우리의 영혼을 설계한 것들을 뒤집고 전복해서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자리를 보전해 주며 평화롭고 안전한 자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어쩌면 스탠드 업 코미디의 공연예술이 되었던 , 미술영역이 되었던 소설이나 글, 그리고 여러 인간들의 모임의 형태로든 일단 서로에게 적대적이 아닌 공감 어린 대화가 그 첫 단추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한번 굳어진 개념의 벽은 단단하고 두텁다. 때로는 해머와 탱크가 밀어붙이는 힘이 필요할 때가 있다.
한 인간의 용기 있는 진솔한 자기 고백이 산을 옮기기도 하고 잘못된 인식과 생각의 틀을 순식간에 바꾸기도 한다. 마치 한꺼번에 쏟아지는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나고 길이 허물어져 지형이 바뀌는 것처럼. 때로는 침묵하고 가만있던 사람들이 물꼬를 트는 사람이 있으면 아우성치며 쏟아져 나오기도 하니까.
해나는 단지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당한 성소수자로서의 적대감과 차별을 고발하고 그 부당함을 알리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는 백인중심주의가 낳은 인종차별주의, 식민지화로 인한 토착원주민들의 삶의 강탈, 신의 이름을 빌려 마녀사냥하듯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낸 호모포비아 및 정상성과 비정상성.
캐논은 누가 만드는가. 누가 이익을 보는가. 간혹 우리는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들에 대해 반문하고 뒤집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웃기다. 타인의 약점을 비하하며 쌕썍거리며 웃는 비열한 웃음이 아니다. 또는 탈현실적인 공허한 웃음도 아니다. 웃음은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창이기도 하고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본 생에 대한 혹독한 슬픔과 오욕을 씻어내고 다시 삶을 살 수 있게 재건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녀는 나약하면서도 강인하고 힘든 적대적 삶에 가스라이팅당하여 주저앉아 울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왜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힘든 것인지 다시 찬찬히 그 원인을 따져보고 분석하고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행성을 만들어 나간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데 지지대가 되어준 것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성장한 형제들과 동네 할머니 할마버지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과 지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를 응원한다.
이 책은 특이한 한 퀴어여성의 성장통과 같은 생존기로 읽히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편집되어 지워지거나 잘못 신화화한 수없이 많은 오류들을 수정하고 다시 재건하기 위해 힘들게 싸우고 노력한 여성인간의 이야기로 읽힌다.
”내가 자랄 대 우리 집 모든 여자는 바늘을 사용했다. 나는 그 바늘에 매혹되었다. 바늘은 마법을 만들어냈다. 바늘은 구멍이나 찢어진 곳을 수선할 때 사용된다. 잘못을 용서하겠다는 뜻 같았다. 그리고 절대 공격적이지 않았다. 바늘이지 핀이 아니니까. “-루이스 부르주아
책을 따라가 보자
-나는 자폐인이고 십년지기와 만나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곤란함을 겪는다.
-2018년 <나네트> 쇼가 넷플릭스에 공개돼도 몇 달 만에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장안의 화재가 되었다
-얄궂게도 벼락성공 이후의 야단법석이 나의 쇼 자체보다 웃겼다. 매일 영혼에 회초리 세계를 맞는 기분.
-오스트리아 출신에 자폐인에 경제적 취약계층에 젠더퀴어에 질 소유자로 살아온 , 참새 같은 골격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나네트>를 쓰기 전에 웃음이라는 미명 아래 편견과 비방을 거리낌 없이 전시하고 홍보하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코미디에 나는 지쳐 있었다.
-엄마의 육아방식은 실패의 은유를 통해 성취를 기리는 방식이었다.
-스물일곱 살까지 정처 없고 위태로운 상태로 집도 없고 직업도 없이 떠도는 철저히 혼자였다.
-엄마는 어떤 주제건 5분 만에 강한 의견을 펼칠 수 있었지만 아빠는 과연 살면서 자기 만의 관점이 표출해 본 경험이 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나는 오스트리아 서부해안의 숨 멎을 듯 지루한 태즈메이니아 스미스턴에서 성장했다. 그곳은 식민지 개척자들이 건너와 정착한 곳으로 원시림이 목재로 배에 실려 더 이상 살 만한 곳이 아닌 황무지 그 자체
-아빠의 중립적이고 관망적인 태도는 엄마에겐 짜증의 원천이었다.
-엄마는 가장 강인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다. 그리고 솔직하며 따스하다. 언제나 진심이라 그만큼 상처도 쉽게 받고 쉽게 준다.
내가 안전하고 어딘가에 속해 있고 존재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면서 자랐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 성장기>
테즈매이니아는 식민지 죄수 유배지였던 시드니가 나름대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죄질 나쁜 죄수들만 보내기 위해 특별히 지정한 유배지였다.
-테즈매이니아는 심하게 두 가지 정체성으로 분열된 있었다. 환경주의자들은 벌목업자와 광산업체와 충돌하였고 동성애자 인권활동가들은 법 개정을 위해 투쟁했고 토착민들은 토지권리회복을 위해 싸웠다.
-1997년까지 동성애가 범죄였다.
-나는 2년 동안이나 소아성애자에게 강간을 당했다. 자신이 생존을 위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외상을 일으킨 비밀을 지켜야 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 트라우마 사건을 공식적인 버전의 자기 자신과 통합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회피하게 된다. 하루도 잊어버리지 못하지만 거기다 언어를 갖다 붙이지 못한다. 언어가 없으면 공유할 수 없고 공유할 수 없으면 다시 안전해질 방법을 찾을 수없다. 그러 다보면 그 사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의 깊고 어두운 수치심에 묻혀버린다.
-단지 자기 잘못이라는 막연한 느낌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버린다. 수치심은 원래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법이다.
-여자들이 성격을 숨기지 않고 사는 경우는 결혼생활을 오래 한 여성들이었다.
-나는 나를 알고 고쳐가며 살고 싶었다.
—정상성 역설계. 정상성 모방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건 쓸모없는 에너지 소비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수줍음이 많고 벽장 속에 깊숙이 숨어있었고 뚱뚱했고 선택적 함구증에 미진단 상태의 자폐가 있었다.
-흡연은 나의 사회적 불안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술을 생각하는 것은 쾌락이었고 그 무엇보다 정신을 안정시켜 주었다.
-엄마 딸로 산다는 것은 약간의 긴장을 수반한다. 그것이 엄마으 ㅣ사랑의 언어다 엄마 본인의 문제를 딸에게 전가했다.
-반동성애법이 인권에 대한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의견에 만장일치가 나왔고 그 뒤로 백래쉬는 활화산같이 일어났다.
<방랑의 세월>
코미디언 취이식전에는 27년간 내 능력에 대해 그 어떤 자신감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컴임 아웃을 했을 때 엄마는 “ 나는 그런데 흥미 없어. 엄마한테 왜 그렇게 끔찍한 말을 하니 만약에 너한테 엄마가 살인자라고 하면 기분이 어떻겠니?”
-우리는 같은 행성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롤러코스터를 타다>
“행복은 침대 옆 협탁.
-나는 어디에도 맞지 않는다는 느낌. 내 몸은 영혼의 엉덩이 골에 영원히 끼어있는 팬티와도 같다는 느낌
-나의 겸손형 코미디는 나라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확장이었고 무대 안에서나 밖에서나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불결함: 잔자레인지 접시에 스파게티 캔을 부어 데우지도 않고 먹었다
-관계의 문제:원룸에 한 달 동안 꼼짝하지 않고 숨기. 공황발작과 광장공포증
-나만의 공간이 없는데 나만의 하이드를 어떻게 숨길까.
-헌신적으로 살기; 반려견 입양. 나는 사소한 승리에 집중했다. 이를테면 식물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 더글라스가 똥을 먹지 못하게 훈련만 성공해도 나 자신을 칭찬하기
-경계성 인격장애, 불안정한 관계, 자해, 분노폭발.
-만성적인 공허감.
-이놈의 자궁단을 다 걷어내 버리면 어떨까요 요즘 미니멀리즘이 대세잖아요.
<진단 이후 ; 처음 만나는 자유>
나의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직감에서 진단까지 가는 길이 그리 험난하진 않았다. 장년여성, 논바이너리, 젠더퀴어가 이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아주 드물다는 사실
진단결과를 이야기했을대 묵살과 일축은 신속 정확하게 내리 꽂혔다. 자페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교적이다. 자폐라고 하기에는 공감력이 뛰어나다. 여자라서 자페가 아니다. 내 진단 결과에 반대하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려하지 않았기에 나의 자폐고백은 빠르게 지루해졌다.
나의 두뇌는 추상의 영역에서는 작동하지 안흔다.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위키피디아이다.
가끔씩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내 두뇌 안에 이는 폭풍 때문이기도 하다 언어적 능력을 잃어버리는 쪽에 가까운데 특히 감각 정보가 과도하게 쏟아지는 와중에 감정 스트레스를 분간하고 자제하려고 할 때 더욱 그렇다. 선택적 함구증.
30대에느누군가와 의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내기에는 나는 언제나 짜증을 유발하거나 짐이 되는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주기적 우울증과 불안증세로 거의 진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않았다.
-일단 나는 통제할 수가 없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겪는지 가만히 살피거나 돌아보는 대신 ‘도망가거나 싸우거나’로 들어간다. 고전압 발전소처럼 셧다운 상태가 된다.
-멜트다운은 봄맞이 대청소처럼 일단 청소를 하고 나면 몸이 리셋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감정조절에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걱정도 그치게 되었다. 나는 적대적인 환경의 사이클과 패턴에서 나 자신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는데, 이를테면 세련된 척하는 콘크리트 바닥 카페 같은 곳은 가지 않는다. 파란색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기 때문에 파란색만 입는다.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나는 나를 보호할 특권이 있다. 나는 나의 욕구를 말로표현하는 것이 항상 어려웠지만 나이가 들면서 언어능력과 사회성도 개선되었지마느 감각에 대한 민감성을 조절하는 능력은 개선되지 않았다. 스트레스 요인은 언제나 나를 괴롭히고 이런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내가 감정기복이 심하며 일관성이 없다는 인상을 받는다.
<수치심을 위저의며>
아직도 많은 양파가 내 일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양파들은 너무 날것이어서 지독하게 매웠다. 나에게 가해진 그 폭력, 강간, 학대.. 그리고 뒤죽박죽 섞인 이 어두운 기억들 속에서 아직도 내면화된 수치심의 덩굴에 꽁꽁 묶여 있는 내가 보였다.
-뭉쳐있는 십 대들을 갈라놓는 일은 물을 갈라놓는 것이 더 쉽다고 느낄 정도다
-정치인들은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증오에 투자한다.
-미의 기준은 언제나 사회적 구성물이었다.
-왜 파블로 피카소가 와 열일곱 살 마리 테레즈 발테르의 관계를 낭만적으로 묘사해야 하는가. 누가 봐도 나이 많고 권력 있는 남성과 어린 여성 사이의 학대관계 아닌가.
<가닥 모으기>
나는 패션좌파, 동정심 과한 진보주의자, 예술가 나부랭이 도시의 세련된 게이였다.
-나네트로 대본 쓰기.
-푸른색 옷 입기, 긍정적인 자기 자극에 참여하는 적극적 행동. 자폐적 정체성을 끌어안기 시작하기
-핀으로 나비 고정하기
-엄마“ 내가 널 이성애자로 키운 걸 제일 후회해. 네가 바뀌길 바랐어 세상이 바뀌지 않을 테니까. 엄마가 네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못해서 미안해.”
나는 자신에게만 몰입해 있어서 다른 사람도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두려웠던 것이다. 나를 위해 세상을. 바꾸어 줄 수없어서 겁이 났던 것이다
이제 내 이야기에 박혔던 핀을 뽑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이야기가 나네뜨이다.
-<여자의 일>
트라우마를 통해 나를 발견하는 데는 직선은 없다.
-버스정거장의 구타 사건에는 동성애 혐오가 있었다 내가 여성이긴 하지만 잘못된 방식의 여성이었기에 처음 본 나를 때렸다. 나를 자신의 남성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지옥 같은 기억에서 벗어나는 데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안전이란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위험에서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이다.
내가 예술을 이용하는 걱 역설이야말로 언제나 인간 조건의 핵심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술의 역사는 언제나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이었으며 퀴어 신체에 대한 서사를 완전히 새로 썼다. 즉 지웠다는 것이다. 우리 존재는 언제나 가스라이팅 당하고 지워져 왔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방식으로 정체화되지 않는다. 내 안에는 거대한 우주가 있다. 그 안에는 성별이 없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찻잔이 찻잔 받침에 들어맞는 소리. 그 소리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내가 사랑받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스티밍, 자기 보호, 자기 위로를 하는 행동 구명보트, 나를 토닥여주기 -엄마
<나의 이야기>
-힘이 없어서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회복탄력성이 당신의 인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