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시노랑을 읽는 오후-장석주 인문에세이

그는 말한다
"나는 슬픔의 부족, 재의 천국에서 길 잃은 여행자였다. 겨우 문자를 해독하고, 낮과 밤을 분별하는 가운데 농작물처럼 자라났다. 나를 빚은 건 태반이 대지의 시간이다. 독서편력은 내 자아에 윤곽을 부여하며 나를 사람꼴로 빚어냈다. -- 스물 안팎 무렵부터 지금까지 계통 없이 읽은 책은 나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사유의 덩어리를 잘게 부수고 헤집으며 심연으로 침잠하는 시간은 행복했다. 내 사유의 원소들, 즉 몸, 음시, 사랑, 불행, 재난, 죽음. 전염병, 통증, 날씨, 노동, 고독, 여행, 정치, 망각, 국가들에 대해 쓴 것들을 여기에 모았다. "
책 속에서 서성이며 책에서 길을 잃기도 하고 길을 발견하기도 하면서, 책 밖 현실에서 길항하기도 하고 좌초되기도 하면서 언제나 되돌아와 자신을 돌아보며 위로받고 힘을 다시 내게 하는 것이 독서였을 것이다. 책이 아니었으면 작은 풍랑에도 쉽게 휩쓸리며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넘지 못했을 유약한 존재였던 나. 생물학적인 몸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것은 부모였지만 세상 속에서 존재의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며 나를 사회적인 몸으로 살게 한 것은 책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어쩔 땐 진저리처지도록 밉기도 하고 멀리 도망가서 가볍게 사뿐사뿐 책이라는 덜미에 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도 많다. 책과의 밀당을 하면서 만난 또 다른 책이 장석주 님의 이 책이다.
아침잠이 많아 거의 물 먹인 솜처럼 뭉글뭉글 가라앉아 있는 나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축제 먹거리 마당의 아줌마 역할. 나는 부스스한 얼굴과 덜 깬 눈두덩을 간신히 추켜올리며 새벽같이 가까운 시골마을에 있는 작고 오래된 중학교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만들어 학교축제를 하는 이쁜 중학생들에게 아침식사로 먹였다. 동이 터오는 새벽길의 뿌연 겨울아침 모습도 좋았고 모처럼 내가 하는 노동의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행복한 나눔의 시간이었다. 집에서 가져온 물건들로 아나바다 장터도 구경하고 동네 면장님과 행정실 직원들 그리고 바쁜 농사일로 학교에 많이 오시지 못했지만 어려운 발걸음을 한 학부모님들 몇, 그리고 생떼같이 이쁜 고사리들을 교육하느라 애쓰시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같이 음식을 나눠먹는 풍경은 오랜만에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장면이었다. 약간의 귀찮음과 어색함을 뒤로한 용기 있는 한 걸음은 나에게 살아있다는 묘한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나누고 함께하는 즐거움이 이렇게 크구나. 타인을 위한 모든 행위는 결국 자신을 위하고 구원하는 행위라는 것을 또 한 번 알게 됐다.
좀벌레처럼 영혼을 부식시키는 권력을 휘두르는 무뢰한들의 몰염치와 상대방 망신주기와 모욕주기는 이제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아까운 문화예술인이 오늘도 검찰독재의 망신주기식 수사와 정권의 부조리함과 몰상식적 작태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호도하기 위한 몰아치기식 수사로 진실이 규명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명예훼손적인 의혹제기를 증폭시키고 시민들의 양심적인 판단을 마비시키는 극우유투버들의 황색저널리즘과 선정적인 보도들, 진실탐색을 멈춘 검찰의 나팔수와 같은 무기력하고 부도덕한 언론. 그리고 쉽게 왜곡보도에 넘어가는 나를 포함한 편향적인 시민들. 오늘의 죽음은 명복을 빕니다로 쉽게 잊힐 수 있는 죽음은 아닌 것 같다. 황색언론에 쉽게 넘어간 게으른 지성에 대한 자성과 원인규명을 통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억울한 죽음과 분통한 자포자기식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우리는 아니 나는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 나는 나이기도 하지만 너이다. 그래서 인간이다. 타인의 죽음에 냉정할 수 없는 이유이다.
"행복해지려면 얼마나 더 많은 불행을 견뎌야 할까. "
그렇지만 오늘의 행복을 살자. 우리는 살아남아야 할 운명이니까. 그도 니체처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가운데 구상되지 않은 어떤 생각도 믿지 마라. "에 깊게 공감한다. 산책자로서의 삶. 걷는 것은 어쩜 멈춤이 끝. 움직임으로 세상을 만나고 나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아주 하찮게 겨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경이로움에 겸손해지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삶의 효용성에 주눅 들어 자신을 매질하듯 다그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오만한 폭주와 일중독을 멈칫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책 제목이기도 한 '에밀 시오랑'은 작가처럼 어린 짐승이 소금을 핥듯이 책을 아껴가며 읽은 루마니아 출신의 가난뱅이 철학자, 불안에 대한 처방을 비관과 회의에서 구했고 '인간이므로 우리는 나쁜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라고 언명하며 비관주의자들을 열광케 했다. 그는 알츠하이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비관주의자로 꼿꼿하게 살았다.
자살이 환멸과 무기력에 빠진 자의 최후 결단이자 용기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회의주의자로서 자신의 철학에 얹혀 오랫동안 자살하지 않고 살았다.
자살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고 언제가는 죽음을 실현시킬 것이다. 그의 말대로 날마다 우리는 제 죽음을 허공에 묻고 사는지도 모른다. 영원히 죽음을 유예시키면서 사는 듯한 착각이자 기만을 대가로 우리는 생을 연장하고 있지 않을까.
"한 사람의 가치를 재는 잣대는 그의 생업이 낳는 사회적 효과, 효용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은 생계수단 그 이상이다. 일은 영혼의 부패를 막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노동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 행복을 더하는 수단이고, 남들을 이롭게 하는데 보탬이 된다. 생업을 잃는 것은 돈벌이 상실만이 아니라 사회공동체와의 결속에서 결락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중의 소외이다. "
영혼을 마르게 하고 딱딱하게 굳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의 귀착점이다. 일은 기본적으로 소통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타인을 살피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옹고집과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자폐와 배척이 적어질 수 있다. 명퇴 이후 사회적 고립을 극복하려고 애쓰며 친구들과의 만남과 취미생활, 그리고 여행과 독서를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마음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전함과 소외감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을 자주 느낄까.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 소비적 삶이 아닌 타인과 함께 성장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내는 연대의 삶. 그것을 실현시키려면 어떤 방법으로...
고통은 기본값이라고. 어머니에게서 몸을 받고 태어나는 찰라 우리는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비용 청구서를 받는다고.
한나 아렌트는 고통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 가장 사적이면서 가장 전달할 수 없는 경험. 타인에 공감할 수는 있으나 타인을 고통을 내 것인 듯 생생하게 겪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사회적 연대는 개별적인 존재들이 겪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달래고 의미 있는 삶으로 편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만 실존적 존재로서 개별자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은 공감할 수는 있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개별적이라 함께 할 수는 없는 것.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인지적 감수성이 덜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서적이건 도덕적이건 자기와 타인에게 항상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려고 욕망하는 사람들이 더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완벽주의자들이거나 스스로 세운 높은 요구 수준 때문에 불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
요즘 관심있게 간혹 보는 프로가 김창옥 인문강의다. 그는 인정욕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일. 그저 너이기 때문에 좋아. 괜찮아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우리가 그렇게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삶에 지쳐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그 능력은 신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능력의 한 부분이라고...
외로움의 원인이 다정한 타자의 없음에서 오는 결핍이 근간이라면 고독은 관조적 삶에 투자하는 것. 더 나은 자아로 가는 도정을 향해 고요하게 열린 상태이다. 외로움은 상실과 결핍에서 빚어진 감정이지만 고독은 능동적인 선택이고 존재의 도약대. 고독역량을 키워야 한다. 고독의 몰입속에서 무의미와 싸우며, 자아를 성숙시키는 계기를 찾는 사람이 고독역량을 키우는 사람이다. 그것은 침잠과 집중이다.
나는 고독역량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자신의 긍정적인 힘을 발견하기는커녕 자신의 부족함 즉 관대함의 부족과 잦은 분노와 참을성 부족, 터져 나오는 울분, 과도한 자기 연민으로 인해 힘들다. 나는 종종 친한 친구에게 구걸하듯 나의 장점을 말해주라고 부탁하곤 한다. 그러면 착하고 슬기로운 친구는 내 장점을 그럴듯하게 나열하듯 번호를 매기며 말해주곤 한다. 유치한 일이지만 그 칭찬을 듣고 있으면 내 안의 불안이 스스로 잠들고 위로가 찾아온다. 덧없는 일이지만 절박할 때는 생명수 같은 일이다.
"국가는 국민과 영토을 볼로로 삼는 권력의 생산자이고, 종파주의적 분파들이 뭉쳐 공동운명체를 꾸린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이것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걸 심감하는 것은 어렵다. 이 짐승은 자기가 한 일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 꼬리를 감추는데 익숙하다. 정치적인 것을 배분하면서 '공정과 상식'을 내세우지만 이 짐승의 실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변신술에 능숙하다 이 짐승은 기만이고 거짓의 불을 뿜으며 제 정체성을 숨긴다. 그 민낯은 피도 그리움도 모르는 폭력기계인데 이게 바로 국가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국가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존재가 아니고 그저 공포를 관리하고 재활용하고 제입지를 지키는데 안간힘을 쓴다고 말한다. "불을 뿜는 개" 니체가 말한다. 이것은 공포. 공포는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일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라고 말한다. 즉 국가는 폭력과 공포라는 두 기제를 통치수단으로 쓴다. 정치는 정의 실현이 목적이 아니라 타락한 정치 집단에서 나오는 거짓된 구호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행위는 국가라는 이익 공동체를 통치할 권력을 배열하고 그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일이다. 니체는 국가를 " 누군가로부터 훔친 이빨로 무는 존재"라고 했다. 국가가 국민이다. 이건 거짓말이다. 국가란 사악한 눈을 가진 혐오이며 법과 관습에 대항하는 죄이다. 국가는 선과 악이라는 모든 언어로 거짓말을 한다. 국가가 훔친 이빨로 제 국민을 물어뜯을 때 그것은 짐승 그 자체로 변신하는 것이다.
국가는 민주주의니 정의실현이니 국민을 들먹이며 시민들에게 얼마나 많은 폭력을 자행했으며 이를 정당화했는가. 80년대는 군홧발 파시즘의 형식이었다면 현재는 선출된 극우 파시즘으로 미시적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복제 시대 이후 사진과 영상에서 파생된 재생에너지가 넘치는 세상에서 무엇인가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장 보르디야르가 지적한 대로 21 세기가 미디어와 가상현실, 네트워크의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디지털적인 이미지는 엄청난 자기 증식을 통해 그 공허를 채워나간다. 주체는 사라져도 이미지는 도처에 남아 떠돌아다닌다. 사라진 것들이 사라지지 않은 채 현실이건 가상공간이건 어딘가에 남아 영원히 떠돈다는 거. 끊임없는 이미지 재생의 그물망 속에 잡혀 "부유한다는 것은 끔찍할 수 있다.
죽음뒤에 남겨지는 이미지와 기록들을 제거해주는 디지털 장의사가 있지 않은가.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죽은 자의 이미지를 재생시켜 살아있는 자와 만남을 주고받는 홀로그램의 경우도 있지 않은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삶의 공전은 얼마나 끔찍한가.
"우리는 사는 동안 끊임없이 사라짐을 연기합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짐의 연기를 하는 것이고 세상이 더 이상 우리 연기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짜로 세상에서 사라지겠지요.." 모든 사라지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고 했다. 그 흔적이 누군가의 기억의 형태이든, 아니면 자손들을 통한 유전자이든. 실재 없는 이미지의 부유는 유령처럼 무섭다.
디지털 세대는 종이채 읽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고요한 눈과마음을 더는 갖지 못한다. 날마다 디지털을 끼고 앉아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면서 고요한 눈과 마음을 키울 시간도 동기도 다 잃는다. 인지신경과학자들은 읽기가 후천적 학습의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호모사피엔스의 뇌에는 읽기 능력이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오늘날 새 인류의 뇌는 디지털 기기들이 쏟아내는 수만 기가바이트의 정보과잉으로 인지적 과부하가 걸린 상태다. 뇌는 읽기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복잡한 사유과정이 생략된 원시인의 뇌로 회귀한다. 읽기의 효과는 정보 편집력 키우기, 타인과의 공감과 소통력 키우기, 시뮬레이션 능력 키우기 본질을 통찰하고 복잡한 사고를 수행하기의 분야에서 성과를 드러낸다.
디지털 기반의 환경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심심함 속에 머무는 능력이다. 깊은 심심함은 정신의 이완에서 얻어지는 편안함의 정점이다.
엄지족을 넘어 사이보그가 되어 산지가 불과 몇십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미 폐기 수준에 이른 문물들과 그들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신문물들에 멀미가 나고 체증이 걸린다. 새로운 디지털적 인지력을 새롭게 탑지하는 것도 힘들지만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문명의 진화속도를 따라 잡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교체되던 세대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서로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향유 그리고 삶의 태도가 너무 빠른 속도로 달라져 갈등은 더 가속화되고 있는 듯하다. 옛날엔 후세대에 전승되는 문화를 말했지만 과연 그게 가능한가.? 이미 화석화된 문화지층 속에서 함께 공존하며 사는 것 같다 할까.
우리는 디스토피아의 세계에 살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사냥꾼의 사회'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자유쥬의적 기구화의 결과로 파시즘, 광신주의 인종주의, 테리리즘 따위로 소동을 빚는 세계를 마주한 채 죽이거나 주거나 하는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도록 강요당한다. 유동하는 공포와 혼란이 뒤섞인 사회가 디스토피아라면 분명 이곳이 디스토피아이다. 지옥은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재단에 드리는 제사를 주재하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그 제단에 바치는 봉헌물이다. 전 세계 부의 90퍼센트를 세계인구의 1퍼센트가 소유하고 그 나머지 10퍼센트의 부를 99 퍼센트가 나눈다. 당신과 나는 99 퍼센트의 인류에 속한다.
문제는 99퍼센트에 속한 인류를 부를 독점하는 1퍼센트 극보수 유한계층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고 그들의 세계관을 탑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이상화하고 욕망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적 논리가 지배적이라는 것이 아닐까. 문화 또한 마찬가지로 저급하다.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리얼리티 쇼의 관음증적 병증과 토론문화조차 오락거리로 전락하고 다큐는 진지바보들의 놀이정도로 여겨진다. 미디어는 시대착오적인 가치를 무한반복하는 드라마와 전자거래의 일상화로 홈쇼핑 채널이 즐비하고 노래니 춤이니 무슨 경연이 또 그렇게나 많은지 이웃의 불행과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수도 없는 즐거움의 지옥도다.
작가도 우울증을 많이 앓았나보다. 마치 딸꾹질하듯이 일조량이 준 겨울에 우울증이 찾아들어 대인기피증으로 고립된 채 지내며, 스스로를 구제불능의 실패자로 여기고, 통제력과 의욕을 상실한다. 우울증에 잠식되면 사고의 균형을 잃고 모든 정보를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인지왜곡에 빠져드는 까닭이다. 그럴 땐 작가는 아무 데라도 떠라라고 권고한다. 맞다 바짓가랭이를 잡아끄는 것들이 일상에 얼마나 널려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자기 함정인지도 모른다. 마음먹기 나름. 우리를 일상에 매달아 놓는 것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그 함정에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들어가는지도 핑계 삼아... 떠날 수 있기를. 더 낯선 곳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 마치 이방인처럼 자유롭게 한나절이라도 가서 서성거리며 기웃기웃하기를...
시간은 흐르지 않고 시간에 포박된 물질이 흐른다. 인간과 물질은 시간의 흐름속에서 늙거나 낡아간다. 만물의 쇠잔, 소멸은 시간 때문이 아니라 엔트로피가 일으키는 결과일 뿐이다. 모든 장소에서 시간이 똑같은 속도로 흐른다고 마디잔 시간의 위치 장소에 따라 흐름이 다르다. 물리학자는 시간이 산에서 더 빨리 흐르고, 평지에서 더 느리게 흐른다고 말한다. 고층에서 사람이 더 빨리 늙는다고 물리학자는 말한다. 미래는 게으름 속에서 밀도가 높아지고 무르익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게으르고 싶다. 느리게 살고 싶다.아무것도 하지 않는 부리런함으로 살아가고 싶다. 타향에서 한달살이를 꿈꾸는 유행도 어지 보면 일상의 지루한 반복적 삶을 떠나 느리고 무위로 살아도 괜찮을 곳을 찾아 떠나고자 하는 욕망 아닐까. 게으른 것이 죄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터라 굳이 게으름을 욕망하고 싶을 때가 있다. 죄의식 없이 맘껏 게으르게 살고 싶다고. 게으름은 나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더 게으름에 관용적이 되길..
여행자는 불가피하게 출발지와 도착지 그사이 어디쯤에 머무는 사이의 존재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다. 위기의 경험을 돈주고 사는 것이다. 여행은 우리의 내적형질을 바꾸고 뜻밖의 운명으로 데려가기로 하는 것이다. 쓰디쓴 실패, 무참한 낙담을 안겼을 때조차도 여행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내면에 잠든 꿈과 백일몽들이 갑자기 깨어나는 찰나가 있다. 여행자의 뇌는 창의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고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이 반짝인다. 알랭드 보통은 " 때때로 큰 생각들은 큰 광경을 필요로 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가 필요하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라고 했다. 여행은 낭비적 소비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자시자신을 위한 값진 투자다.
낯익은 것들로 부터 이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자꾸 발목을 잡고 혹여나 벌어질 위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유경험자들의 여행담을 검색해서 잠재적인 위험을 기피하기 노력한다. 그리고 힐링메뉴를 하나정도 준비해 간다. 그건 마치 탯줄로 연결된 태아가 울음을 터트리며 세상에 탯줄을 끊고 나왔을 때의 원초적 두려움과 많이 닮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닳고 닳은 현실의 권태로움과 단조로운 일상을 탈출하여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 닳아버린 감각을 쇄신하고 무던한 일상 속에 잠든 영혼의 핏톨 을 건드려 순환하고 싶다. 인간들이야말로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생존이 아닌 영혼의 순례를 떠나고자 하는 유일한 종이 아닐까. 여행자로서 나는 완전히 다른 자아가 된다. 그걸 경험하는 것은 경이롭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괴테.
아름다운 것은 찰라이면서 영원하다. 굳지 않고 말랑말랑하여 시간의 오랜 결을 따라 움직인다. 손에 잡히지 않고 언제나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마는 허망함 또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하지만 불멸의 영원성을 찾아 예술가들은 뭔가를 탐색하고 평생을 바쳐 영혼을 불태우지만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과정이 아름다움이고 불멸이지 않을까. 현재에는 없는 것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과 갈구가 없었더라면 딱딱하고 울퉁부퉁 한 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에 영혼을 바치는 일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들을 존경한다.
청년을 한 묶음으로 호명하는 움직임은 하나의 관행이다. 1990년생이 오고 MZ세대가 몰려온다. MZ세대가 물러난 자리를 또 다는 청년세대로 채워질 것이다. 빈부의 양극호, 취업절벽, 계층이동 사라리의 실종의 시대에 살아남음은 그 자체로 절박한 서바이벌 게임일 것이다. 젊음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자를 경계하라. 기만과 위선을 직시하라. 청춘 지상주의는 기만에 불과하다 그들의 젊음은 상업자본주의에 수탈당하고 미래는 그들이 쓰지도 않은 가상의 빚 때문에 차압당한다.
세대 간의 차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이윤을 만들어내는 상품들이 얼마나 많은가. 단지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써 젊음이 사용되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의 현실인식을 마비시키고 대신 세대 간 갈등을 키워 늙음을 악마화하거나 적대시하여 혐오감정을 유발해 그들의 불만을 타자화시킨다. 젊음과 늙음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로 존중하고 연대해야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상업자본의 기만을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자는 누구인가? 패스워드. 그것은 배재의 맥락 없이 이해하기 힘든 일종의 분류기술이다. 한화가치 1조를 훨씬 뛰어넘는 가상화폐의 소유자 루마니아 기업가가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비트코인 계좌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럴 경우 그의 자산은 디지털 지갑에 묶여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단지 자산가치에 대한 패스워드의 상징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개별자로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개인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 SNS 활용을 통한 사생활의 노출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지만 과연 우리는 디지털 드웰러로 사는 것이 원시시대 동굴드웰로와 뭐가 그렇게 차이 나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상상력은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빈곤한 상상력은 정치의식의 퇴행과 낡은 관습에 기대는 행동을 낳고, 구태를 재연하는 정치의 당위성으로 굳어니다. 싱크탱크라는 기자들의 상상력 빈곤은 곧 현실인식의 나태함, 속화된 인지의 바닥이 한국 정치의 민망한 수준이고 참담한 민낯이다.
기자를 비롯한 사회적 인플르언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주요 직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이들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그들의 문화자본은 상위 계층 그것도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고 부모세대로 부터 물려받은 유산자본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는 이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교육기회의 불균형은 갈수록 심화되고 선발기준 또한 상대적으로 상위계층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로 인한 현대판 계급제도가 정착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혹자는 계급상승을 위한 사다리가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소외계층의 삶을 살아보지 않고 그들에 대한 공감능력이나 사회적 인식능력이 낮은 이들이 취할 수 있는 계급의식은 당연히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대변하고 그들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환경은 한 인간의 내면을 빚는데 영향을 끼치고 , 습관은 한 인간이 실존의 윤곽과 형태를 결정짓는다. 당신은 모습은 당신이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이다. 탁월함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습성이다. 인간의 능력이란 그것은 반복적으로 행하는 행위의 축적물일 뿐이다. 습관이 한 인간의 개성을 특화시키고 ,예측불허인 존재의 내면을 빚는다.
개인이건 사회건 위기의 징후는 일상의 습관을 안정적으로 지탱 할 수 없는 상황의 유동성이 커질 때 불거진다. 이 위기를 잘 넘어서려면 공동체의 내부에서 관용, 인내 환대와 같은 사회적 덕목을 발현시키는 착한 습관을 기르는 게 필요하다. 독서를 꾸준히 하면 사람의 뇌는 미묘하게 바뀐다고 한다. 이는 뇌의 가소성이란 특징 때문이다. 독서 행위는 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포괄한다. 뉴런의 연결망이 음속수주준으로 빠르게 반응하고 , 다시 같은 속도로 뇌 구조 전역에 걸쳐 연결이 일어나는데 특히 전두엽 앞부분의 브로카 영역과 측두엽 부근의 베르니케 영역 같은 언어중추 부분이 집중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독서는 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비판, 성찰, 상상, 공감, 연역, 귀납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독서의 힘은 인간이 가진 경험의 한계와 자의식 과잉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존감을 세우고 자아 밖에 있는 수 없이 많은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서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 다른 이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좀 더 관용을 갖게 하여 세상과 나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 아닐까. 나는 개인적으로 결핍감과 외로움, 소통의 실패에서 오는 위축을 넘어설 때 책 속에서 길을 찾았던 것 같다. 오롯이 책에 집중해서 책 속에 있는 또 다른 세계와 만나는 일은 그 무엇보다 더 큰 위안이었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었다. 그리고 나약한 나를 가만가만 성내지 않으면서 반성하게 하고 다독여주었다.
땅에서 멀어지면 행복에서도 멀어진다. 철학자는 "땅은 자아를 저 자신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해방시킨다. 디지털 정보의 늪을 빠져나와 정적을 받아들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의 순간을 느린 리듬으로 경험하는 것은 행복의 필수 조건이라는 뜻. 워커홀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한 장소에 고요하게머물며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신체 감각을 자연에 더 밀착시키는 기회를 잡지 못한다. 스탠퍼드 대학교에 미술사학을 가르치는 제니 오델은 반자본주의적 도피와 게으름을 퍼뜨리는 선동가로 유명하다. 디지털 디톡스 휴가를 권하고 자주 산책하며 새와 나무와 바위를 눈여겨보길 권한다.
티베트인가?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지만 지구의 어느 한 나라에서는 40의 나이에는 숲에 들어가 정진하는 것을 가장 좋은 삶이라 여긴다고 한다. 바쁜 현대인들에겐 요원한 이야기 같지만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나이가 들어 콘크리트 사방벽에 갇힌 채 아파트에서 살면서 하루종일 티브이를 보다 짧은 산책을 하고 돌아와 다시 티브이를 보다 하루를 마감하는 반복적 삶을 사는 우리 엄마를 포함한 주변의 어르신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많다. 자식들과의 소통능력도 많이 잃어버리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무표정한 얼굴에는 적막함이 가득하다. 나이 들어 한평 남짓이라도 땅을 일궈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둬들이고 새하얀 눈이 오면 적막하게 서있는 나목들의 쓸쓸함을 같이 느끼고 해동이 되면 움터오는 새싹을 보며 환하게 웃음 짓는 그런 노후의 삶을 꿈꾼다.
사람의 덕목은 동물적 욕구를 넘어서서 제 삶을 돌아보는 생각함의 바탕에서 나온다. 이것이 관조이다. 관조를 통해 우리가 선한 의지를 지향하는 세계의 작은 중심이라는것을 깨닫는다. 사람을 관조를 하면서 제안의 악을 분별하고 덜 어내며, 그 자리에 단단해진 도덕 감정을 새워 야만과 불의에 맞서며 그 너머로 나아간다.
인류의 무의식적 상징계에서 고양이는 불운, 악,나쁜 이미지를 뒤집어쓴다. 고양이는 사랑스러운 동물이다. 니체는 '별들이 깔린 카펫 위를 걸어가는 달'이라 하고 파블로 네루다는 '밤의 야경꾼'이라 표현하며 장 그로니에는 '짐승들의 세계는 온갖 침묵들과 도약들'로 이루어진다. 고 했다. 고요화 소란, 부드러움과 잔혹함, 애교와 무심함이 혼재된 매력을 갖는 고양이. 고양이가 내는 소리는 1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대단한 수다쟁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공지가 떳다. 지하주차장에 사는 길양이들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것. 길양이들이 아파트 주민들에게 끼치는 해악을 쭉 나열했다. 지하주차장에 주차된 차에 숨어 들어가 살면서 차를 손상시키거나 배설물로 인해 악취가 풍기고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 관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 등. 고양이를 키우거나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닌 나는 그래도 이 공지가 좀 무서웠다. 고양이 예찬론자도 아니고 열성적인 동물권보호론자도 아니지만 겨울철 먹잇감이 없이 숨어 들어온 고양이를 굶어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옳은가. 애초에 그들은 도시의 거류민이 아니잖은가. 그들이 살 수 있는 야생의 터는 갈수록 줄어들고 딱딱하고 메마른 콘크리트로 그들의 생존 환경을 빼앗아가는 건 우리일 텐데. 같이 좀 살면 안 된가. 좀 더 인내하고 관용을 보이면 안 될까.
음악은 인생의 누추함에 대한 보상이다. 삶이 급류처럼 위험할 때 조차 음악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괴테는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다. 음악은 흐르는 건축이다. 음악을 안다는 것은 우주를 안다는 것이다. 불안과.. 고통을 경감시키는 묘약.
고독의 작곡가 사티. 그의 음악<짐노페디>는 고독의 선율을 그대로 담아낸 음악. 실존의 각성 같은 고독 속에서 정신은 번쩍 깨어난다. 고독은 내면이 강한 자가 누리는 특권이다.
그를 통해 사티의 음악을 듣는 지복을 누린다. 그의 음악은 고독을 음으로 옮기면서 영혼에 새의 발자국을 꾹꾹 찍는 듯 고독을 타전하는 듯하다. 오랜만에 행복하다.
행복은 어떤 지복 상태이다. 행복은 감정이고 느낌이다. 조건이 아니다. 온전히 느끼고 향유할 줄 하는 능력의 문제이다 나는 영적인 깊이, 내적인 고요함, 오랜 우정, 계절의 신선한 느낌 같은 것들에서 행복지수의 밀도가 높아진다.
유머감각을 키우고, 작은 것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으며, 남과 더불어 기쁨과 보람을 만드는 일에 열정을 불태워야 할 것이다. 부디 우리안의 욕망을 덜어내고 , 복잡한 인생을 다운사이징하시라.
나의 행복지수는 뭘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기, 오늘처럼 짧은 책 리류를 쓰면서 생각에 잠기기, 음악듣기, 흐리고 바람이 없는 오후 가까운 산에 오르기, 좋아하는 친구와 산책하고 차 마시기,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같이 먹기, 낯선 곳으로 여행하기, 영어책 읽기.. 복잡한 욕망을 덜어내고 더 심플해지기.
도무지 알 수 없는 일. 사랑은 우리 안의 살아 있다는 기척이고, 사로잡힘이고 자기모순에 빠지는 사태다. 아울러 해방이자 구속, 애로스의 날갯짓, 헌신과 열정으로 포장된 욕망의 몸짓이다. 하지만 사랑은 재난이고 위험한 투자다. 사랑이 뜻밖에도 실존의 위기를 불러온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사랑은 메마름을 견디지 못한다. 사랑을 키우는 것은 증여오 환대다. 사랑은 당신을 조건 없이 품는 것이고 나를 선물로 내어주는 것이다. 과몰입에서 촉발된 사랑은 과몰입으로 종말에 이른다. 사랑이 끝나면 다시 공허하고 밋밋한 일상으로 떠밀려간다. 일상이 택배상자처럼 도착하고 메라는 일상이 반복된다. 사랑이 끝난 후 회한과 후회를 앙금처럼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사랑의 자본을 써라.
과몰입에서 촉발된 사랑은 과몰입으로 종말에 이른다. 깊게 공감되는 부분이다. 사랑은 마치 생물과 같아서 번성기와 쇠퇴기를 거치는 것 같다. 종말에 이르러 회한과 후회 그리고 밋밋한 일상으로 복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쇠퇴기 즈음에 변화를 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비롯 사그라들었지만 그 열정의 불씨를 다시 다른 모습으로 살려 은근하게 꺼지지 않게 보살펴주는 것이 파국을 막는 방법이 아닐까. 사랑을 잃어도 사람은 잃을 수 없으니까.
아버지가 제 자식에게 애정을 쏟고 돌보는 현상은 낯설지 않지만 포유류 전체에서 보면 불과 5퍼센트 정도라고 한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기피해야 할 부정적 표상이었다. 반항하는 아들을 보는 아버지는 내심 그런 아들을 거두는 일이 버거웠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데면데면했고 나는 또 나대로 방황을 하며 성장토을 겪었다. 아. 아버지. 엷은 슬픔 속에서 탄식하듯이 불러본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은 너무 늦은 것이다.
사나흘을 둘째딸네 집에 머물다 가시는 엄마의 힘없는 등을 보면서 갑작스럽게 왈칵 올라오는 울음을 참아냈다. 그리고 또 후회한다. 엄마 앞에서 날카롭고 비정하게 쏟아냈던 비수 같은 말들을 온전히 회수할 수만 있다면. 아침에 다정하고 살갑게 인사하며 맞이할 것을, 아님 어깨라도 만지며 엄만 여전히 미인이야. 그깟 피부질환으로 생긴 뾰루지가 대수야. 엄만 등도 굽지 않았지, 다리도 튼튼해 잘 걷지, 남들은 그 연세에 틀니를 몇 번이나 교체하는데 엄만 치아도 튼튼해 겨우 충치하나 치료하러 치과에 가잖아.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늘 헤어지면 후회하면서 엄마와 나와의 심리적 거리는 천만리인 것 같다. 돌아가시기 전에 더 잘해 드려야지 하면서도 마음의 문은 굳게 잠겨있는 듯. 내 마음을 내가 어찌하지 못한다. 과거를 파먹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모든 것이 다 흘러갔다고. 내가 어떻게 감히 한 인간의 인생을 단지 엄마로서만 평가하며 이래서 옳고 저래서 잘못됐다고 할 수 있으련만. 나는 아직도 성장하지 못하고 어리디 어린 상처받은 아이를 품고 있다. 이제 그 아이를 보내고 어른인 내가 늙은 엄마를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그래서 나는 늘 엄마와 감정적으로 지치도록 싸우고 그래서 외롭다. 나도 때늦은 그리움과 탄식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부르며 통곡하게 될까 봐 무섭다. 나의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제발 돼주세요 살아생전에. 내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의연하게 맞설 담대함을 엄마한테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늙음은 죄악이 아니건만 다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을 기피한다. 젊음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회 통념이 늙음을 기피하는 세태를 부추긴다. 꼰대라는 어휘가 이즈막엔 나이 듦을 싸잡아 이르는 혐오 말로 통용된ㄷ. 과연 늙음이 수치고 , 하찮음이며 쓸모없음으로써 전락인가.? 안티 에이징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려 노화를 늦추자는 것이다. 안티에이징의 유행은 젊음을 숭상하는 것에서 유래된 것일 것이다. 우리 주변엔 어른 노인은 없고 철없이 날뛰는 가짜 청연들만 득실거린다. 이 볼썽사나운 나이 든 철부지들에게 성숙한 인격이 깃들 여지가 없는 까닭에 어른 됨의 의젓함도 찾아볼 수 없다. 청춘이란 영예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지만 노년의 충만함과 완숙은 공짜가 아니다. 백발의 광휘와 위엄이 숱한 수고와 시련에서 살아남은 것.
나이가 들며 늙는 일은 당혹스럽고 인생에서 처음 겪는 사태이다. 하지만 미숙과 만용 실수로 얼룩진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싶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두려움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끝없는 혼돈은 자기 연민과 파괴욕을 낳기도 한다. 나이 들어 천천히 진행돼 온 노화의 증세들이 어느 한날 한꺼번에 드러날 때 그토록 유예해 둔 노년이 발 밑까지 와 있음을 실감하고 어지럽고 황당할 때가 많다. 아침마다 한주먹 먹는 별의별 예방약이며 영양제가 반갑지 않다. 깜박깜박하는 건망증도 노인성 치매 내지는 알츠하이머 초기증상 아닌가라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난다. 젊음이 부러운 게 아니고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될까 봐 겁이 나는 때가 많다. 죽음과 좀 더 친숙해지기 위해 두려움을 넘어서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메멘토 모리 '네 죽음을 기억하라.'
2024년 청룡의 해가 밝았다. 나의 새 해는 얼마간의 우울과 고독, 얼마간의 간지로운 웃음과 가벼운 즐거움, 얼마간의 고된 책 읽기와 글쓰기, 얼마간의 어쩔 수 없는 늙음에 대한 애석함과 고통이 함께 하지 않을까. 준비되지 않은 일들에 대한 놀라움이 내 삶을 많이 흔들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어 본다. 간혹은 신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내가 신을 찾아가기를.
나는 여전히 사는게 서툴고 관계들이 불편하다. 살아있음의 순간은 괴로움과 불편함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집단에게서 자신을 완벽하게 떼어놓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나는 남과 어울려 사는 게 어색하고 불편하다. 나는 혼자만의 내밀한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70이 가까운 작가의 남다른 이 고백이 너무 좋다. 함께 살기, 더불어 정을 나누고 연대하여 고통을 함께 지기. 거의 합목적성을 지닌 " 함께"와 "같이"를 도덕적인 정언 명령처럼 여기면서 ,늘 관계 맺기가 불편하고 어색하고 낯가림이 심한 나를 심한 정신적 장애를 갖고 사는 사람처럼 여기며 좌절하곤 했다. 그래서 더욱더 혼자 살아가며 깊게 사유하며 글을 쓰는 이들을 동경했는지 모른다.
미국 오와이아주 에서 태어난 작가 메리 올리버. 그는 누구보다도 개의 덕목을 잘 알고 그만큼 개를 향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개는 우리에게 우아한 운동능력을 지닌 육체의 쾌감, 감각의 날카로움과 희열, 숲과 바다와 비와 우리 자신의 숨결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개의 죽음은 우리 품을 떠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특정성과 , 유일성, 가시성의 세계에서 퇴장하는 일이다. 개들이 표표히 떠날 때 우리는 이별과 죽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개들이 우리에게 베푼 환대와 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개의 질주하는 삶은 너무도 짧다. 개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키우던 우리집 강아지 똘이와 순이가 한해 전에 나란히 세 달 간격으로 죽었다. 돌순의 죽음은 너무 빠른 노화의 진행으로 순식간에 찾아왔다. 생명이 코앞에서 사그라드는 모습을 날마다 지켜보면서 노화의 가차 없음과 속도감에 압도당하며 겁이 났다. 그리고 한없이 슬펐다. 도대체 마르지 않은 눈물과 격정적인 슬픔의 발로는 뭘까 생각했다. 엄마나 식구들이 먼저 가도 이렇게 슬플까. 스스로 자문할 정도로 울음은 강렬하고 매서웠다. 지금 와서 이 글을 읽으며 깨닫는다. 조건 없이 우리에게 준 개들의 친절함과 친밀성 그리고 환대. 자기의 고통과 죽음을 말없이 받아들이며 조용히 이 세상에서 물러나는 죽음에 대한 수락. 그게 나를 슬프게 했을 것이다.
고통은 날것이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야비한 짓이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함으로 제 도덕적 자본의 빈곤과 감음능력의 빈곤을 동시에 드러낸다. 그런 남루한 인격을 가진자들의 말과 웃음은 늘 소름 끼치게 징그럽다. 수전손택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고통 없는 삶은 없다. 고통은 상수다. 질병에서 오건 불공정과 혐오, 따돌림과 증오에서 오건 고통은 삶을 망가뜨린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포르노그래피 보듯 하는 관음증은 널리 퍼진다. 타인의 고통을 단지 연민으로 소비하는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가장 낮은 단계의 감응이고 피동일 뿐이다.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고 폄훼하며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뻔뻔함을 넘어선 사악한 이들이 너무 많다. 인격살인으로 지옥으로 한 사람을 몰아붙여 결국 자신의 목숨을 끊게 하는 일. 고통마저도 오락과 관음의 대상으로 상품화되는 경우는 어떠한가. 너무 무서운 세대에 살고 있다.
얼굴은 계절이 만든 소모의흔적, 찰나의 감정이 현현하는 막, 세월을 탕진한 자의 허망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자리다. 표정은 외부의 힘과 질서에 반응하는 운동이고, 세계에 대한 너의 대응, 삶이 네게 강제한 수고와 노고에 대한 힘겨움을 드러낸다. 너 얼굴은 생존의 히스테리와 나르시시즘이 증식하는 주름진 표면이다..
거울을 보면서도 그곳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부정할 때가 많다. 아니야 뭔가 잘못 굴절된 부분이 있겠지. 내 얼굴이 아니겠지. 처진 지방살을 보면서도 낯설어진 자신의 얼굴을 애써 부정하고 싶어진다. 이젠 느슨하고 헐거워진 몸과 가물가물 구동력이 약한 뇌의 기억능력. 어쩌면 이렇게 서서히 느슨해지고 가물가물해지면서 세상과 작별하겠지. 하지만 날 서고 시무묵하고 무표정한 채 소통을 불허하는 얼굴로 늙고 싶지은 않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한평 남짓한 곳에 채마밭을 일구리라. 그러면 땅의 보슬보슬한 기운을 받아 미소 띤 환한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
바이러스 감염병이 팬데믹에 이르자 전세계의 산업 활동은 둔화되고 , 국경봉쇄와 지역 이동이 금지되었다. 그러자 뜻밖의 기적이 나타난다. 인도 펀잡 주에서 대기오염에 가려졌던 히말라야 산맥이 육안으로 관측되었다. 관광객이 끊지가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에 돌고래와 어류가 돌아왔다. 멕시코 아카풀코 해변에는 60년 만에 발과 ㅇ플랑크톤이 밤바다를 찬란하게 물들였다. 브라질의 한 해변에서 멸종 위기종 바다거북의 알에서 새끼 거북들이 잇달아 부화되었다. 인규가 생산활동을 멈추자 온실 가스가 줄고 대기 오염은 사라졌다 지구를 망가뜨리는 인간의 활동이 줄면서 지구 생태계가 제안의 놀라운 회복 탄력성을 드러낸 것이다.
공감한다. 인류는 지구 생물의 대멸종을 불러오는 유해동물임에 틀림없다. 팬데믹 이후의 삶의 방식이 변화했는가. 그렇게 혹독한 자연으로부터의 댓가를 치렀음에도 깨달음을 실천에 옮기며 살고 있는가. 나부터도 회의적이다. 자연을 토벌하고 착취하는 인간 종 중심주의의 생존방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은 특별한 윤리감각과 의식을 장착해야 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이 지구를 움직이는 자본중심주의적 시스템이 달라져야 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2121년 영국 옥스포드 사전에 한국어 표제어가 26개나 새로 실렸다고 한다. 한류, 먹방, 언니, 오빠, 갈비, 불고기, 김밥, 잡채, 동치미, 치맥, 트로트, 한복, 만화 그리고 대박. 말이 사회의 거울이라면 '대박'이란 말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대박은 큰 횡재나 큰 성공을 일컫는다. 무엇보다 대박이라는 말은 천박하다 조악한 이익추구라는 함의를 품고, 물신주의를 도드라지게 까발려 드러낸다. 일그러진 욕망의 천박함을 집단적 소망표상으로 포장한다. 대박사회란 대체적으로 윤리적 함량이 모자라는 사회일 테다. 자기가 투자한 시간이나 노력에 견줘 훨씬 더 수익을 벌어들이는 한탕주의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이 말은 정당한 노동과 수고의 가치를 무화시킨다. 대박이라는 말은 우리 안에 숨은 탐욕과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대박'과 더불어 '부자되세요' '꽃길만 가세요'라는 말들이 갖는 함의는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말을 들었을 때의 어색함 그리고 뭔가 쭈뼛거리는 느낌은 이 말이 함축하는 자본중심적 욕망과 일확천금의 망상이 투영되어서일까. 말은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유행어이기 때문에 별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라고 해서 다 쓸모 있고 괜찮은 표현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읽고 다시 숙고하면서 내 삶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 장석주 님의 글에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