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싯다르타 그리고 . 호의 관용 연민 인내

숨그네 2024. 4. 29. 17:39



“나는 사고할 수 있습니다. 나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나는 단식할 수 있습니다. “-싯다르타
 
싯다르트가 할 수 있는 일이 세상의 이치에 맞게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겐 너무나 쓸모없고 허깨비 같은 일로 들릴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다시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는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을 이용한 효용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인간실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던가. 
헤세의 두 번째 작품 ‘싯다르타’를 독서모임 회원들과 함께 읽고 토론했다. 
 
생각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기다리며 귀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과한 일차원적인 욕망을 비워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몸이 앓아누워도 단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짐승은 인간밖에 없다고 그랬으니…
 
책으로 자신의 삶을 가져와서 성찰하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서로 공감하며 때로는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고민하고 합의에 이르면 자신을 넘어서서 너와 나를 위한 작은 실천을 고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독서모임이 거의 3년이 되어가고 있다. 
적어도 나는 혼자가 아니라고. 자유로운 개인주의를 포용하면서 함께 사는 공동체의 공익을 위해 소극적으로나마 참여할 수 있는 토대를 위해 우린 읽는 공동체를 만든게 아닌가 생각한다. 
 
때론 느슨하게 살아가면서 일상에 매몰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경계하기 위해서도 책 읽기는 필요하다. 
티벳인들은 40의 나이가 되면 숲에 신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것을 원한다고 그러는데 갈수록 육체적인 삶의 나이가 길어지지만 자신의 영성을 위해 시간을 아껴두는 일을 좀체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생활에 내몰리는 나를 비롯한 현대인들에게 헤세가 거의 40 중반의 나이에 집필한 싯다르트는 자신을 찾아가는 대서사시로서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브라만의 아름다운 아들이자 젊은 매인 싯다르타는 그의 고매하고 열렬한 사상, 불같은 의지, 높은 소명감을 가장 사랑한 그의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삭발하고 도를 닦으며 떠돌아다니는 탁발승 사마나들의 행렬에 참여한다. 
그가 존경할 만한 스승, 아버지 그리고 현명한 브라만들조차 그에게  정신적인 만족과 안정을 주지 못했기에 그는 신성한 에너지인 아트만을 숭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가 찾는 아트만은 어디에 있는가. 자아로, 자신에게로, 아트만에게 나아가는 다른 길을 찾아서 그는 자아 속에 흐르는 샘의 원천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결국 싯다르타는 사마나들이 내뿜는 고용한 열정의 향기, 몰아적인 헌신의 향기 그리고 가차 없는 자기부정의 향기에 이끌려 길을 나선다. 
 
싯다르타에겐 하나의 목표만이 있었다. 바로 해탈. 갈증에서 벗어나고, 욕망에서 벗어나고 기쁨과 슬픔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아를 죽이는 것, 더 이상 자아에 갇히지 않는 것, 자아를 초탈하여 사유하는 가운데 기적을 아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호흡을 죽여하는 몰입수행도 수천번 자아를 떠나 몇시간 동안 며칠 동안 무아의 경지에 머물렀지만 다시 결국 언제나 자아로 돌아왔다. 또다시 윤회의 번뇌를 느낀 것이다. 
 
그는 “ 깨달음 앞에서는 알고자 하는 것 배움보다 더 사악한 적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싯다르타는 고타마, 숭고한 자, 붓다라고 불리는 사람을 만난다. 그가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바퀴를 멈추게 해서 젊은이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고 듣게 된다. 
 
그가 도성을 지나서 싯다르타는 그를 보게되고 그의 완벽한 마음의 평온, 조용한 자태만으로 그를 사로잡는다. 그의 자태에는 갈구함, 욕망, 모방, 어떠한 노력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 다만 광채와 평화를 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붓다는 그의 새끼 손가락 움직임 까지도 진실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문답에서 자신의 고뇌를 이야기한다. 
 
세상을 하나의 완전한 사슬, 즉 인과율로 이어진 영원한 사슬, 단일성, 모든 사건의 연관성, 생성과 소멸되는 일에 포함되어 있다는 가르침이 있지만 이 단일성과 연관성은 작은 틈새를 통해 단일한 이 세상 속으로 낯선 것, 증명될 수 도 없는 것이 흘러든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리고 그는 가르침을 통해 해탈에 이르지 못함을 고타마가 몸소 체험한 비밀, 그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고타마를 따르는 사마나들의 무리에서 벗어난다. 
그때 고타마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 오 사마나여 그대는 영리합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친 영리함을 경계하십시오. “
 
고타마의 자태, 그렇게 자유롭고 고귀하게 , 그렇게 신비롭게, 당당하게 천진난만하게 은밀할 수 있는 그의 자태에 싯다르타는 매혹되지만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결국 싯다르타는 그의 친구 고빈다를 붓다가 머무르는 기원정사에 남기고 이별을 한다. 
 
싯다르트는 그이 수많은 스승들과 고타마가 그에게 가르침을 주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것은 자아다. 그가 벗어나려고 했고,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의 자아였다. 
그가 살아있다는 이 수수께끼, 하나의 개체이며 다른 모든 사람과 구별되고 자신이 되게 하는 자아. 그는 그 의 자아를 부수고 껍질을 버셔 그 미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핵심을 , 아트만을 신성한 것을 찾아낼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하다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을 찾아 나선다. 
 
자신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누구와 함께 삶을 나눌 것인지, 누구의 언어를 구사할 건지...
 
<제2부>
 
싯다르타의 깨달음으로 그는 모든 것이 늘 존재했다는 것을. 자신이 그것을 보지 못했음을 , 그것을 마음에 두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유원에 사는 카밀라라는 유명한 고급 매춘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의 열락에 빠져든다. 가진 것이라곤” 사고하고, 기다리고 단식하는 일” 밖에 없는 그를 카밀라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도성의 상인인 카마스바미를 찾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읽고 쓰는 능력을 이용해 상술을 익힌다. 그리고 돈을 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사소한 쾌락을 위해 사소한 명예를 위해 애쓰는 것을 보았고, 고생하고 늙어가는 것을 보았고 서로 책망하고 모욕을 주는 것을 보았고, 사마나라면 웃어넘길 고통에 비탄하고, 사마나라면 느끼지 못할 궁핍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본성의 원천에 따라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존재의 원천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딘가로 보이지 않게 흘러갈 뿐…
 
우리 모두는 바람에 나부끼며 흩날리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나뭇잎과 같으나 고정불변의 궤도를 걸으며 어떤 바람도 그들에게 도달하지 않는 별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쾌락의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에 완전히 빠져들지 못한다. 여전히 사고, 기다림, 단식의 기술이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고의 바퀴와 분별의 바퀴는 점점 느려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고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약간은 비웃듯 경멸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부러워하는데 그들이 인생에 부여하는 중대성, 기쁨이나 불안에 대한 그들의 열정,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열병이라는 불안하고도 달콤한 행복을 부러워 한다. 
점차 세속이 그를 사로잡 쾌락, 욕망, 타성, 그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경멸했던 악습도 점차 그에게 깃든다. 심지어 그는 때때로 부끄러움과 역겨움의 도피처로 도박과 술에 빠져든다. 
점차 그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 인생의 가을에 대한 두려움,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은폐된 불안감으로 가득 차게 되고 결국은 그런 무의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도성에서의 권태와 비참함과 죽음으로부터 그에게 이 세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강가에서 그는 그가 갈망하던 위대한 구토를 느낀다. 무기력하고 학대받은 영혼을 강가에서 응시하고 침을 뱉는다. 그리고 마침내 한 음절 된 “옴” 신성한 것, 완성이라는 옴이라는 소리를 귓전으로 듣는다. 드디어 그의 의식 속에 ‘옴’이 파고든 순간, 비참함 속에서 그리고 방황 속에서 자신을 깨닫는다. 
그러한 절망과 깊은 혐오를 느끼면서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는 사실, 그의 안에 그 새가, 즐거운 샘물과 지저귀는 소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기쁨을 느끼며 미소 짓는다. 
 
너무 많은 지식, 너무 많은 경구, 너무 많은 제사 규범, 너무 많은 금욕, 너무 많은 실천과 노력이 그를 방해했다. 그는 교만으로 가득했고, 항상 가장 영리한 사람, 항상 누구보다 한 걸음 앞선 사람, 학식 있고 지성 있는 사람, 현자였다. 그 교만 속으로 그의 자아가 파고들었고, 그곳에 확고히 자리 잡고 앉아서 자라고 있는 동안 그는 그 자아를 단식과 참회로 죽일 생각이었다. 그가 스승의 가르침을 멀리하고 혼자서 세상 속으로 가서 쾌락과 권력에 여자와 돈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로 인해 혐오감과 공허를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강가에 그는 이르렀고 강은 그에게 말해주려는 특별한 것, 그가 아직 알지 못한 것, 그가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강가에 머물면서 알게 된다. 
“ 강은 언제나 흐르고 흘러 언제나 거기 있고, 항상 똑같았지만 매 순간 새로웠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향해 갈 때 그를 배에 태워주었던 뱃사공 바수데바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주는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남김없이 한다. 
그건 마치 강의 소리를 듣고 강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면서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강으로부터 고요한 마음으로 영혼을 열고서 기다리는 마음으로 격정을 일으키거나 욕망을 드러내지 않고,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의견을 말하지 않고서 경청하는 법과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다. 
일체의 번뇌는 시간이라는 것을. 시간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즉시, 이 세상의 모든 힘든 일, 모든 적대감은 사라지고 극복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마나를 따라 고행자가 된 카말라는 뱀에 물려 뱃사공이 된 싯다르타의 무릎에서 생을 마감한다. 
카말라와 싯다르타 사이에서 난 아들은 이후 싯다르타에게 번뇌의 씨앗이 된다. 
마음이 강퍅하고 거만한 아들은 기꺼이 이제껏 없었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인내하고 관대함으로 대하려는 싯다르타의 기대에 완전 어긋난다. 
물이 바위보다 강하고 사랑이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려는 아비 싯다르타에게 아들은 결국 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어떤 지식보다 더 강한 그의  맹목적이면서 고통스러운 사랑과 애착, 두려움은 실패로 끝난다. 아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지고한 사랑과 관용을 적대시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달콤함과 안락으로 도망친다. 아들에게 그는 귀찮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의 무례를 웃음으로 욕을 다정함으로 악의를 호의로 답하는 아버지는 그저 늙은 위선자의 가장 혐오스러운 술수로 보인 것이다. 
아들이 나룻배의 노를 망가뜨리고 자신의 세계로 도망가 버린 후 남겨진 싯다르타의 비탄과 비애는 결국 강의 가르침에 위로를 받는다. 기다리고 인내하고 귀 기울이는 것. 
이후 상처는 늘 화끈거렸지만 그는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한 대신에 더 따뜻하고, 더 호기심을 가지고 관심 있게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소인배라고 경멸했던 사람들의 행동이 오히려 사랑스럽고 심지어 존경할 만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행위 속에서 생명을 생동하는 것을 , 불멸하는 것을 , 브라만을 보았다. 
결국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과 그로 인한 슬픔으로 그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겪었을 슬픔, 숙명적인 윤회의 슬픔을 알게 된다. 
 
“ 고통을 겪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은 다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
 
뱃사공 친구 바수데바와 오랜 시간 강가에서 사공으로 살아가면서 그는 강물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고 완전히 경청하는 데 몰두했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완성인 “옴”을 알게 된다. 그의 자아는 단일성인 옴 안으로 흘러간 것이다. 
바수데바는 “ 나는 숲으로 갑니다. 나는 단일성 속으로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긴 채 싯다르타를 떠난다. 
어느 날 강을 건너던 고빈다는 그의 친구인 늙은 뱃사공 싯다르타를 우연히 만난다. 
 
“누구나 구할 때는 그 눈이 구하는 것만 찾으려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기 쉽다. 항상 구하는 대상만을 생각하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구한다 함은 목표를 가진 다른 것이고 찾아낸다 함은 자유로운 상태 열린 상태 아무런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



그들의 만남에서 싯다르타는 그가 깨달은 것들을 친구와 함께 나눈다. 
 
“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할 수 없네. 지식은 전달 할 수 있지만 지혜를 찾아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지니고 다닐 수 있고 기적으로 행할 수 있지만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내가 알아낸 한 가지 사상은 “ 모든 진리의 반대도 진리다. 즉 진리는 오직 일면적일 때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고 말로 포장 할 수 있다는 것이네 사상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고,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인 것이네. 모든 것은 일면적이고, 모두 다 반쪽일 뿐이며, 모두 다 전체성, 원,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네.
하지만 우리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존재 자체는 결코 일면적이지 않네. 한 인간이 완전히 신성하거나 완전히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니네. 시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네, 세계와 영원사이, 번뇌와 행복사이, 선과 악 사이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간격 또한 착각이네”
 
“모든 죄는 그 안에 자비를 품고 있고, 모든 어린아이는 이미 자기 안에 노인을 , 모든 젖먹이는 죽음을 모든 죽어 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지니고 있네.  도둑과 노름꾼 안에도 붓다가 머물러 있다네. 내게는 죽음이 삶처럼, 죄가 신성함처럼, 지혜는 어리석음으로 보이네.”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꺼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내가 죄악을 몹시도 필요로 했다는 것을. 나의 영혼으로 육신으로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는 말을 사랑할 수가 없네. 그것은 아무런 단단함도, 부드러움, 색깔과 가장자리, 냄새, 맛도 지니고 있지 않네.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것도 아마 말 때문일지도…
열반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네. 그저 열반이라는 말뿐. “
 
“사랑이야말로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이 세상을 들여다 보는 것, 이세상을 설명하는 일,ㅇ 이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 일 것이네 하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이 세상을 경멸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외경심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이 나에게는 비할 나위 없이 중요하네. 그것이 
 
호의, 관용, 연민, 인내를 지니는 것.
 
아직 구도를 하면서도 끝내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친구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마에 몸을 구부려 입술을 대는 순간 친구의 얼굴이 아닌 수천의 다른 사람들의 얼굴들, 그리고 그 얼굴들이 강물에 흘러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끊임없이 변하여 새롭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얼굴들은 모두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 각형상의 얼굴은 모두 죽음에의 의지였고 덧없음에 대한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고백 있지만 아무것도 죽지 않았고, 모든 것이 변했을 뿐이며,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있는 싯다르타의 미소는  한결같고 우아하고 헤아리기 어렵고, 어쩌면 자비롭고, 어쩌면 조소하는 듯한 수천 종이나 되는 붓다 고타마의 미소였다.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얼굴에 붓다의 미소 같은 평온한 미소가 활짝 펴 있음을 그리고 싯다르타가 삶의 번뇌를 벗어나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목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