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올드 오크 ( The Old Oak)- 연민과 희망을 향해
버나드 쇼 ( Bernard Shaw)
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추고 비이성적인 사람은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기 위해 꾸준히 애쓴다. 그러므로 모든 진보는 비이성적인 사람에게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 켄 로치 감독은 1936년생, 만으로 87세다. 영화와 함께한 세월도 60년이 넘는다. 보통의 감독이라면 진즉 은퇴하고도 남을 때이지만, 로치 감독은 신작 '디 올드 오크'(The Old Oak)를 들고 돌아왔다.
로치 감독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것은 이번이 무려 15번째다. 그보다 더 많이 경쟁 부문에 진출한 감독은 없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세계에서 단 9명만이 황금종려상 2회 수상 기록을 갖고 있다.
로치 감독은 불평등, 노동 문제, 복지 사각지대 등을 주제로 한 영화를 꾸준히 다뤄 '블루칼라의 시인'이라 불린다. '디 올드 오크'에서는 쇠락한 산업도시 주민과 이민자로 시선을 옮겼다.
로치 감독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미안해요, 리키'(2019)를 마친 후에도 "임무가 끝나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처럼 어떤 노동자들은 아파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죠. '미안해요, 리키' 주인공처럼 긱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 유급휴가 권리가 없어요. 이번 영화에서는 조직화한 노동자 계급이 해체되고 공동체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디 올드 오크'의 배경은 영국 북동부의 한 탄광 마을이다. 석탄 산업 호황과 함께 번영을 누렸던 주민들은 술집에 모여 신세를 한탄하는 처지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석탄 산업 쇠퇴 후 새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절망에 빠졌던 노동자들과 황폐한 마을을 종종 볼 수 있다.
"우리는 오래된 산업이 죽고, 공동체마저 죽는 것을 목도해왔습니다. 1980년대 당시 영국 정부는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탄광을 폐쇄했죠. 노동자들이 강력하고 급진적인 노동조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우파 정권이 들어서자 마거릿 대처 총리는 위협이 되는 노조를 파괴하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이에요."
'디 올드 오크'와 앞선 두 영화의 차이점은 외부에서 온 또 다른 약자, 어찌 보면 영국의 노동자보다 더 약자인 난민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로치 감독은 이들의 '을 대 을 갈등'을 짚는 것에서 나아가 약자 간의 연대에 관해 이야기한다. 술집 주인 TJ(데이브 터너 분)가 난민 여성 야리(에블라 마리)와 우정을 쌓는 모습을 보여주면 서다. 과거 탄광 노조 활동을 한 TJ는 누구보다 연대 의식의 중요성을 아는 인물이다. 노동 문제든, 혐오와 차별 문제든 결국 열쇠는 연대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로치 감독은 "연대는 인종차별을 포함한 모든 차별의 해독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자 계급 투쟁에서도 연대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개인은 힘이 없지만, 집단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이죠. 제가 처음에 영화계에서 일할 때만 해도 영화인들은 가장 먼저 노조에 가입했어요. 그걸 자부심으로 여겼고요. 하지만 그런 위대한 유산이 이제는 파괴 돼버렸습니다."
그는 노조가 약화한 틈을 파고들어 "정부가 가난을 무기 삼아 노동자들을 길들이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분노와 문제의식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게 해 준 힘으로 작용했다고 그는 말했다. 또 87세의 나이에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행운이라고도 덧붙였다.
"'저 연급 수급자 일 좀 더 시키라'라고 하는 사람들 덕도 있었죠. 하하. 하지만 제가 아직도 영화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운, 운, 운 때문이었습니다. 창의적이고 저를 지탱해 주는 좋은 팀을 만났잖아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물리적인 힘이 필요한 일이에요. 저는 코스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점프를 하다 넘어지는 늙은 경주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아마 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릅니다."

사회 현실주의의 영국 거장인 베테랑 켄 로치가 그의 아마도 마지막 영화로 돌아왔다. 'The Old Oak'는 서서히 죽어가는 영국의 옛 광산 마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첫 장면.
시리아 난민 그룹이 마을에 도착하자, 지역 술집 주인은 마을에 새로 도착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싸움을 시작한다. 시리아 난민들이 오래된 폐광마을에 버스에서 내려 결코 환영하지 않는 냉담한 옛 탄광촌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걸어간다.

영국의 북동부, 석탄산업의 시대가 막을 내린 후 폐광된 지역에 잔류하게 된 탄광촌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절망, 무기력, 연대감의 상실을 겪는다. 마침 이곳으로 오게 된 시리아 난민들은 그들의 적대감을 투사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 된다. 삼삼오오 난민들을 대하는 그들의 시선이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난민 중 한 명인 아라의 카메라가 시리아난민들의 마을 입성을 반대하는 극렬한 사람들 중 한 사람에 의해 파손된다. 이 카메라는 아라가 시리아에 남겨진 아버지가 그녀에게 마치 유품처럼 남긴 물건으로 영화의 주요 캐릭터인 TJ와 만나 관계를 맺고 탄광촌의 옛 역사를 기록한 기록사진을 보게 되며 나중에 아라가 백인노동자계급으로 이루어진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면서 그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상징적인 도구이기도 하다.
결국 파괴된 것들의 온전한 복구가 가능한 것일까.

술집 주인 TJ Ballantyne(Dave Turner)는 이혼하고 자신과 말을 하지 않는 어른 아들 때문에 우울해한다. Old Oak는 그의 펍의 이름으로, 북동부의 가난한 광산 마을에 있는 유일한 커뮤니티 모임 장소이며, 간판의 글자가 뒤집어있을 정도로 장사도 잘 안되고 무기력한 경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의 단골들은 분노로 끓어오르고, 주택 가격 폭락에 분노하며, 이민자에 관한 YouTube 동영상을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부동산 회사가 이웃 부동산을 대가로 구입하고 착취적으로 임대하여 은퇴를 효과적으로 완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주택의 가치를 붕괴시키고 지역 사회의 노폐물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 그러자 겁에 질린 시리아인들이 버스로 도착하고 긴장은 더욱 심해진 것이다.

술집주인 TJ는 마을 친구들이 박살된 시리아 난민 소녀 아라의 카메라를 수리해 주고 석탄산업이 한창 번성할 때 석탄 노조연합활동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의 생활과 연대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해서 전시했던 술집에 딸린 방을 그녀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아사드 정권에 의해 투옥된 아버지의 소식이 절실히 필요한 그녀의 오빠와 나이 든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젊은 시리아 여성이다. 그녀는 사진을 보면서 생각한다. 그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생동감 있고 서로에게 친절하고 열렬하게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이제 퇴락해 가는 마을의 경제상황과 무너진 공동체에서 피폐해져 가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기 시작한다.

영화장면 중 감동적인 장면중 하나. 아라는 티제이의 도움으로 점차 현지인들과 섞이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 시리아 난민들만큼이나 경제적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백인 현지인들의 상황을 알게 되고 영양실조에 허덕이는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친절을 베풀어 그 아이의 집에 데려다주고 냉장고를 뒤져 음식을 해주고자 하나 갑작스레 아이 엄마가 들이닥쳐 마치 도둑취급하듯 아라를 내 쫓는 장면.. 하지만 선의는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상대방에게 가 닿는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이 적대와 경멸 그리고 부정은 맞닿는 긴장을 뚫고 서서히 이해와 합의 그리고 온정으로 이어진다.

티제이는 아라의 초대로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그리고 아라 가족들이 겪은 슬픔과 곤란, 그리고 아픔을 서서히 알게 되고 공감하며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포갠다. 일부 술꾼들과 친구들에게 비웃음을 받지만 티제이는 그녀와 그녀 가족과의 우정을 쌓아간다.

무너진 삶의 일터는 그들의 경제적인 터전만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연대의 터전마저 앗아갔다. 그들의 분노는 결국 더 약한 존재인 시리아 난민에게 가서 폭발한다. 티제이의 절친이자 정치적인 동지였던 그의 친구도 그 무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공격의 대상은 시리아 난민과 그들을 돕는 티제이에게 향한다.

삶의 연대는 거창하고 대단한 모습으로 행해지지 않는다. 사진기를 들고 아라는 동네 미용실에 모여든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찍고 기록하며 그들의 일상 고민을 듣고 공감한다.

티제이는 외로운 사람이다. 젊은 시절 노조활동으로 분주하게 사느라 가까운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일찍 떠나가고 아들은 돌보지 않은 아버지에게 타인보다 더 냉대적이다. 삶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래서 티제이는 잃고 난 후의 상실감과 외로움을 댓가로 여기고 담당하게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왜냐면 희생의 댓가로 그의 일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또 얻었으니까. 그래서 티제이는 꺽이지 않은 마음이 되었을까.

티제이의 동반자. 마라. “ 마라는 내 친구이자 내 자신이고 서로 힘이 되어주는 것. 그리고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라는 뜻이죠. “ 마라는 심술궂은 철부지 10 대들 이 맹견을 풀어둔 바람에 어이없게도 물려서 죽는다. 티제이는 모든 것을 잃고 너무 외롭고 자신이 미워서 자살을 각오하고 바다로 걸어 들어갈 때 어디에선가 낑낑거리며 자신에게 달려와 그의 목숨을 살린 개였기에 그의 마음의 상실감과 아픔은 너무나 클 수밖에 없다. 외롭게 사는 티제이의 곁을 지켜주었던 마라의 죽음. 그는 마라를 처음 만났고 매일 산책을 가곤 했던 바닷가 해변에 묻는다.
현지인들은 TJ에게 오랫동안 휴면 상태였던 펍의 뒷방을 그들의 불만을 토로할 만남의 장소로 열어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야라(에블라 마리)를 포함하여 현지인과 시리아인 모두를 위한 푸드 뱅크 스타일의 커뮤니티 저녁 식사 장소로 재치 있게 허용한다..

디 올드 오크의 나눔의 장소로 시리아 난민들은 자신들이 만든 자그마한 음식과 선물들을 들고 찾아온다. 오랜 침묵과 절망으로 봉인되었던 방이 열리고 다시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 이 작은 방에서 현지인들과 시리아 난민들은 서서히 음식을 나누면서 웃음과 연대를 나눈다.

시리아 난민들과 경제적인 소외계층을 위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때론 아라가 찍어준 자신을 포함한 이웃들의 멋진 사진들을 감상하며 눈물짓던 곳. 티제이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시 보수해서 사용한 공간은 안전할까.
티제이의 친구들은 작은 희망과 연대의 장소를 결국 의도적으로 전기합선으로 파괴한다. 희망은 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오지 않는다.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던 나눔의 장소가 파괴된 후 티제이와 아라는 깊은 절망에 빠지면서 회의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티제이는 아라를 데리고 더럼 대성당을 보러 간다. 그녀는 합창단의 연주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고, 천 년 된 건물에 경외감을 느낀다. 더럼 대성당에 대한 티제이의 경외감은 건물외관의 화려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성당의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아버지를 포함한 건설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신성한 이곳에서 그들이 함께 신께 기도하며 예배 드렸던 공동체에 대한 것에서 옴을 말해준다.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녀는 로마인들이 건설하고 이슬람국가(IS)에 의해 파괴된 팔미라의 사원들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민한다.



아라가 난민촌에 들어와 살면서 동네 사람들의 삶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때로는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으로 찍은 장면들을 나눔의 장소에서 보여준다.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고 서로 멋쩍어하며 웃기도 하고 때론 경쾌하게 웃음을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느낀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어느 날 시위현장에 있었던 광부들에게 가서 격문이 아닌 아름다운 시를 낭송하자 그곳에 모인 광부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눔의 장소가 파괴된 후 티제이는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마지막 동지였던 친구가 그 음모현장에 있었음을 알게 되고 괴로워한다. 어느 한날 그는 조용히 그를 방문한다. 그리고 말한다.
“찰리, 난민들이 오기 한참 전부터 이곳은 이미 망가지고 있었어.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양을 찾아. 잘 살 때는 앞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약자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편하니까 원래 좋은 건 오래 못 가지.”
“ 평생 그렇게 싸웠지만 근처에도 못 갔어. 자기기만이야. 망할 놈의 펍도 이 동네도 … 증오, 거짓, 부패만 잘 돼. 악취가 진동한다고. 게다가 배신까지. 이 부자 나라에서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잖아. 그것에 자괴감을 가진 이들을 돕겠다는 데 가게문을 닫아야 하잖아. 자신에게 주어진 부당한 대우에는 찍소리도 못하고 가만있지. 입 다물고 나만 잘 살면 돼 이 동네에서 살면서 정글의 법칙만 배웠어. ”







티제이가 절망하며 자책을 할 때 아라는 “ 티제이 그래도 희망을 가져봐요.” 라며 말했다.
시리아에 남겨진 아라의 아버지가 실종된 후 결국 죽음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라의 가족은 처참한 슬픔에 빠져 아버지의 장례를 준비한다.
그러자 기적처럼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꽃을 들고 조문을 와서 아라의 가족들을 안아주고 위로하며 슬픔을 나눈다. 그리고 티제이를 배신했던 그의 친구 찰리도 아내와 함께 조문을 온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본다.
“슈크란” 고마워요 라는 뜻의 시리아어.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은 너무 감동적이다.
변화는 일사불란하게 한꺼번에 기적적으로 오지 않는다. 희망과 배신과 절망 노여움 분노 그리고 자책과 연민으로 범벅된 채 모든 것들을 함께 품으면서 조금씩 새 걸음으로 오는 것 같다.


개인과 개인으로 분절화된 고립된 사회에서 정글의 법칙으로 자신만 들여다보면서 돈과 명예 그리고 신분상승으로 행복을 느낄 수는 없다. 인간은 연민하고 연대하면서 결국 좀 덜 나쁜 사회를 지향하는 지리멸렬한 변화를 위해 함께 할 때 한 움큼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다수이고 좀 더 선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