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유리알 유희를 읽다

숨그네 2024. 5. 24. 11:30

 
1895년 뉴욕박물관. 앤드류 카네기가 90% 이상의 재산을 기부해서 도서관을 지었다. 피츠버그의 슬럼가 이민촌에 정착한 그에게 앤더슨이라는 사람이 개인도서관을 개방하면서 그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그의 삶의 전환점을 독서를 통해 만들었다. 그는 공공도서관을 통해 사람들이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위한 정치문화적 토론의 활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책이 없으면 신은 침묵하고 정의는 잠자며 철학은 불구가 되고 문학은 벙어리가 되며 모든 것은 야만의 어둠 속에 묻힌다. >
특히나 “붉은 청어”라 불리는 생성형 AI가 인류문명의 진보를 넘어 인류자체를 대체할 수 있도록 설계되고 있는 요즘. 더 이상 사고하지 않고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집중하지 못하도록 주의가 산만해져 있는 상황에서 어쩜 우리는 길을 잃고 인공지능의 세계에서 점차 소외되어 주변인으로 기계의 명령에 종속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다시금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근본 물음에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독서는 물론 재미도 있지만 때론 지루하고 답답하고 그럴싸한 문제의 해결책을 얻으려 하는 성마른 나와 같은 사람에겐 어두운 긴 터널처럼 빛이 쉬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싶고 한숨같은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독서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메마른 우물과 같지 않은가. 심연은 깊고 메마른 우물에 두레박을 하릴없이 던지는 것 같은…
하지만 비비안 고딕이 말한 것처럼”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성장한다. “ 라는 금언은 여전히 책 속으로 두레박질을 하게 만든다. 비록 세상을 구원하는 바는 너무 요원하고 나하고는 상관없을지 모르나 한 세상을 받아 생사고락으로 번뇌에 쉽게 빠지는 허약한 인간에게 나쁜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한 독서는 자기 구원의 한가닥 실을  쥐어주는 것 아닌가. 헤세의 또 다른 작품 유리알 유희를 읽는다.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보통의 소설집과 다른 색다른 서술방식과 유리알유희에 대한 방대한 역사적 고찰이 너무나 난해하고 방만해서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기까지 한 의도가 작가에게 있었나 이 모든 과정이 작위작인가 라는 의문이 들면서 독서를 멈추고 싶었다.하지만 중간을 넘어서면서 차츰 독서에 숨고르기가 되면서 빠져들었다. 그리고 두고두고 다시 재독하고 싶은 책이 되버렸다.

다음은 진형준교수의 해설을 인용한 것이다
 
[유리알 유희는 헤르만 헤세가 1931년에 집필을 시작해 1942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유럽 전체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집필을 시작해  제 2차 세계대전이 한 창이던 때 완료한 작품이다. 헤세 나이 54세에 시작해 65세에 끝을 낸 것이니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그것은 한 지식인로서 한 개인의 실존적인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성찰의 시간이고 역사적 맥락 내에서의 지식인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이 작품의 무대는 카스탈리엔 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인간의 정신적 가치와 지적인 가치가 총체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유리알 유희를 통해 정신적 가치가 생생하게 보존된다. 유리알 유희는 추상화된 구조와 상징을 통해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려는 열망과 노력의 결실이다. 
헤세는 인류의 이상과 역사 지식인과 사회의 통합을 이룬 이상적인 인물을 그리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첫째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주인공의 전기의 마지막 부분을 전설로 처리한다. 즉 그는 개인적 실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언제나 이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뒤에 덧붙여진 세편의 이력서를 통해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인물이 저 옛날의 기우사. 고해사, 고대 인도에서 살았던 인물로 여러 번 등장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인물의 비역사성, 편재성을 보여준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비역사적인 존재이다. 
두 번째 방법은 전기형식을 띤 이 작품의 무대를 역사적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몇백 년 뒤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무대를 미래로 설정함으로써 이 작품을 읽으면서 카스탈리엔, 즉 정신의 이상향에 대한 미래 전망에 동참하게 된다. 
하지만 광기와 야만의 잡문시대가 끝난 뒤 정신의 이상향이었던 카스텔리안의 시대는 지금도 요원하다. 오히려 정보화와 함께 더 몰개성화되고 윤리적 책임감이 점점 더 보기 힘든 사회가 돼버린 것. 
이 작품의 주요인물 중 토마스 폰 데어 트라베 선임 유희명인은 토마스 만을 그의 친구 테글라리우스는 니체를 그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던 야코부스 신부는 스위스의 역사학자 야콥 부르크하르트가 모델이 되었다 한다. 
그리고 크네히트가 살았던 시기른 23세기, 이 전기를 쓴 시기는 25세기 정도로 보인다고 헤세는 말한다.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남독일 산골의 작은 도시 칼프에서 태어났고 이후 속세를 벗어나 조용히 풍요로운 삶을 살다가 1962년 8월 9일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소설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전기’로 보았으며 길 잃고 헤매는 현대인의 영혼에 길잡이가 되는 작품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

 책속으로 들어가 본다. 
 
유리알 유희. 이게  뭐일까. 수수께끼 같은 책제목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다. 작가는 이 책이 왜 쓰였는지에 대해 책 서문에서 밝힌다. 
 
“ 유리알 유희의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 3세의 삶에 대해 일부분이나마 규명하고 그의 성격적 특징들을 굳이 묘사하려는 것은  우리가 한 개인을 숭배해서도  아니며 또한 우리가 관습에 저항하거나 우리들의 권위, 혹은 지적인 풍토에 적대적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정반대로 오로지 진리와 학문에 기여하겠다는 일념에서이다.. 우리가 말하는 개인은 그 인격체의 독자성이나 특이함을 넘어서서, 보편적인 것에 통합될 가능성을 지닌 인물, 초개인적인 것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인물을 말한다. “
그리고 유리알 유희는 우리 문화의 모든 내용과 가치들을 갖고 있는 유희다. 라고 천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학문과 예술의 종합이라는 이상을 지향하는 모든 정신의 움직임이 유리알 유희로 구체화되어 나타난 영원한 이념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라고. 그리고 그것은 학문의 통일성과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고. 
 
작가는 중세 이후의 학문과 사상의 시대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중세이후 교회의 감독과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신앙의 자유와 지식의 자유를 동시에 만끽하였으나 그들이 존중해야 할 진정한 법칙과 새로운 권위나 정통성을 찾아내지 못하고 경박한 잡문을 쓰게 된 <잡문시대> 결과적으로 잡문시대는 물질적 결핍, 정치적 군사적 위기가 찾아오고 지식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서 지식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혹으로 몰락하게 된 것이라 말한다. 
잡문시대의 몰락을 예감하고 새로운 모색으로 학자들의 문화적 양심에 힘입어 음악사연구와 교수법에서 그 은신처를 발견하기도 하고 동방순례자 결사단체로 영혼수련의 길을 탐색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학문의 시대를 탐색한 <유리알 유희자들의 시대>가 있게 된다. 
유희는 애초에 학생들과 음악가들 사이에서 행해진 기억과 재능을 증진시키기 위한 재치 있는 놀이방법이었지만 이후 수학자들에게 물려주었고 유희가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속적인 향락과 노력을 포기하고  지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성찰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훈련에서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유리알 유희가 그 기법과 소재 면에서 무한한 발전을 이룩했고 이후 동방순례자들의 관습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명상>이라는 개념이 도입이 되었다. 
 
< 1장.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크레히트는 열세 살이던 때 도시 베를핑엔의 라틴어 학교 학생이었는데 그 학교 음악교사 추천해 그의 영재학교 입학 추천을 받는다. 그리고 음악명인이 직접 베롤핑엔으로 찾아와 그와 만남을 갖는다. 이는 음악명인이 그를 직접 만나 이 학생이 본성적으로 가장 드높은 의미에서의 음악가가 될 수 자질이 있는지 , 열광적으로 음악에 빠져 복종과 존경과 경배의 마음으로 음악에 종사할 능력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후 크네히트는 영재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이름은 에쉬홀츠. 영재학교는 <교육주>라고 알려진 카스탈리엔 수도원에 있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궁극적으로 교직에 종사한다. 그들은 극도의 청빈과 독신생활이다. 
에쉬홀츠 이후 그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이름은 숲속의 작은 방이라는 <발트첼>
명인의 설명대로
이곳에서는 이율배반, 모순에 대해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것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인간은 자신이 모순덩어리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비록 ㄹ자신의 모든 행로가 하나의 시도이며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래도 완성을 지향해야 하고 중심을 향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명인은 “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2장. 발트첼>
상급교육기관인 이곳에서 크네히트는 청강생인 데시뇨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둘 사이의 우정과 대립은 마치 두 주제의 음악 또는 두 정신 사이의 변증법적 유희와 같았다. 
데시뇨리의 말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크네히트는 그들의 음악명인에게 심경을 고백한다. 
 
“ 카스탈리엔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사육되는 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먹을 빵을 벌어들이지도 않으며 삶의 고난과 투쟁도 모르고 그들의 노동과 가난으로 우리의 사치스러운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
이후 둘 사이의 논쟁은 좋은 관계로 나아가지만 크네히트는 마음의 번뇌와 갈등은 줄어들지 않는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외부의 현실세계, 즉 사랑스러운 어머니와 자식들이 있는 세계였으며 굶주린 사람들이 있는 세계였다. 즉 인류 대다수가 카스탈리엔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두 세계가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듯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둘 사이의 전사 같은 우정은 이삼 년 동안 지속되었다. 크네히트는 정신 함양을 옹호하는 편에 그리고 데시뇨리는 자연스러운 삶을 옹호하는 편에 서 있는 것.
 
< 제3장  자유 연구 시절>
크네히트 나이가 스물네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유로운 연구를 할 수 있는 시기가 된다. 
훗날 그의 친구인 조수 프리크 테굴라리우스에게 보낸 그의 유희에 대한 중요한 체험에 관한 글지글을 보면
“유리알 유희가 단순히 형식적인 기교나 기지 넘치는 결합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회의에 빠진 적도 있었는데 처음으로 유리알 유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네. 그때부터 나는 이 유희가 진정으로 하나의 링구아 자크라 즉 신성하고 신적인 언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네.”
하지만 그는 미학과 윤리 간의 해묵은 싸움이 내부에서 커나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는 유리알 유희 명인 토마스 폰 데어 트라베를 만난다. 그는 그에게
“ 우리의 유희는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야. 그저 독특한 훈련이고 굳이 말하자면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 칸트는 신학적 태도로 철학하는 것을 “키메라의 환등기”라고 불렀네 유리알 유희가 그렇게 되면 안 된다네”
 
< 4장. 두 수도회>
카스탈리엔 수도회와 교육주는 이 세상에서 지배와 경쟁을 억제시키고 그 대신 세계 전약에 절제와 법도의 정신적인 토대를 영속시키는 목적에서 생겼다. 전쟁이 빈번히 일어나던 시절이 끝나갈 무렵 학자들과 사상가들의 영웅적이고 금욕적인 노력을 통해 탄생했다는 것. 그리고 지친 사람들, 피 흘린 사람들, 배반당한 사람들의 질서와 규범과 이성과 법칙, 절제를 향한 열망에서 탄생했다는 것. 하지만 그들은 이것들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자기반성이 뒤따라야 함을 간혹 잊고 있었다. 
이 시절에 크네히트는 평생 그에게 헌신한 친구 테글라리우스를 만난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일방적이고 배타적인 애정에는 아름다운 면도 있지만 위험한 요소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헌신적 우정 앞에서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에게 힘을 행사하려는 욕구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된 것. 그는 그와의 우정을 통해 자제와 자기 수양을 평생의 과제로 삼을 수 있게 된다. 
크레히트에게는 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지배적인 욕망이 없었으며 명상적인 생활을 활동적인 생활보다 더 원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연구자로 남고 싶어 하는 신화오 언어오 사상의 뜰과 숲을 거니는 순례자로 남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다. 
두 번째 수도회인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야코부스 신부를 만난다. 그는 카스탈리엔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 당신네 숭배자들과 유리알 유희자들은 세계사를 당신들의 입맛에 맞게 증류시켜 버렸어요. 거기에는 정신사와 예술사만 있을 뿐 피도 없고 실재도 없어요. “ 우리 수도회에서 사랑하는 것은 정신영혼으로 사람을 끌어모으고 교육하고 개조하련ㄴ 노력이 이루어지는 그런 생명이 긴 조직이오. 우생학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혈통이 아니라 정신을 통해서 사람을 다스릴 줄 알고 무언가를 섬길 줄도 아는 그럼 사람을 키우려는 시도가 행해지는 곳 말이요. “
 
<5장. 임무>
크네히트의 수도원 1차 체류 기간은 2년간이었고 그는 서른일곱 살이 되었다. 야코부스의 신부가 카스탈리엔 정신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 않게 되면서 크네히트의 다음 임무는 바티칸에 수도회 상설 대표를 두게 될 계획에 그를 합류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야코부스 신부와 친해져야 한다는 임무. 그 임무는 그의 소망과도 부합한 것이었다. 이 신부에게서 그는 당시느이 카스탈리엔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역사 인식과 역사 연구에 대한 방법론 및 수단을 개관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 응용 훈련을 하게 된다. 즉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그의 정치적인 의미를 알게 된다. 
<6장. 유희 명인과 7장 명인의 직무>
크네히트는 유희 명인이라는 소명을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상태로 받는다. 명인직 수행으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아 보였다. 사생활을 희생해야 했으며 모든 습관과 취미 생활을 버려야 했고 그의 마음은 차갑게 식었으며 늘 과도한 업무 뒤의 현기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 기간이 지나자 그에게는 회복과 성찰의 적응기간이 뒤따랐다. 
그는 신입교사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우리는 학문의 보편성을 추구해야 한다. 연구에서의 객관성과 진리를 향한 사랑이 , 그리고 명상적인 지혜와 조화의 함양이 중요한 두 가지의 원칙이다. 명상과 요가를 통해 우리 안에 깃든 야수성을 몰아내고 모든 학문 내부에 들어있는 악마성을 몰아내기 위함이다. “
 
<8장. 양극>
그는 위대하고 모범적인 관리자 유리알 유희 명인이었지만 도이에 카스탈리엔의 영광이 서서히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에 종속되어 시간의 그 가차 없는 힘에 이해 마모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역사적 존재로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생성된 모든 것은 무상하념 인간의 정신에 의해 창조된 것은 불확실한 성격을 띠고 있다는 형이상학적 감각을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양극성 덕분에 그 열린 정신 때문에 카스탈리엔의 그 어떤 동료들보다 ㅏ국의 그 어떤 고위층보다 세상 물정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면모는 친구 테글라리우스와의 우정을 통해 알 수도 있다.
테글라리우스는 까다롭고 제멋대로 인면을 가진 신경절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크네히트는 친구의 뛰어난 재능뿐 아니라 그 의결점들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에 자신을 맞추기를 거부하는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자유로운 정신의 활동력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질서와 조화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대신 번뇌하는 자. 믿을 수 없는 인간 천재적인 바보, 허무주의자의 길을 가길 원한 사람이었다. 그는 생동하는 불안, 비난, 훈계 경고의 끊임없는 원천이 되었으며 새롭고 대답하며 용감한 아이디어의 발안자였다. 
세상과 유리된 채 내적으로는 노쇠화와 도덕적 해애가 진행되어 변질된 카스탈리엔, 정신의 드높은 비상과 숭고한 가치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직 가능하지만 이 고도로 발달된 드높고 자유로운 정신의 기능을 오로지 이기적으로 향유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한 카스탈리엔에서 테글라리우슨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삶에서 양극을 이루는 두 성향 한쪽은 성직에 충실하며 무조건적으로 봉사하는 방향이었고 다른 한쪽은 각성하고 전지나는 방향, 현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방향이었다. 
 
<제9장. 대화>
명인의 마지막 시기, 그가 주목할 만한 변화를 보였던 시기를 살펴보자. 
그가 관직 및 교육주와 작별을 고하고 다른 생활권으로 넘어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의 기간이다. 
크네히트가 바깥세상의 새로운 공기를 느끼고 싶어 할 시기에 그의 오랜 친구 플리니오 데시뇨리를 만나게 된다. 그는 이제 의기소침한 사람이 되었고 청춘의 매력도 사라졌고  그에 못지않게 천박함과 거친 세속성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난 고뇌는 고귀했으며 비극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크네히트는 친구의 슬픔에 잠긴 고독한 얼굴을 통해 괴로움가 고뇌를 보내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고 상징적이라 여긴다. 
그와의 재회에서 서로는 극명하게 다를 것이라 생각하던 서로의 삶에서 그렇지 않음을 발견한다. “우리가 선의를 지니고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어. 정확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것 너머에서 우리는 각각에 대해 많을 것을 짐작하고 느낄 수 있어. 노력해 보세.”
플리니오 데시뇨리,” 계급의식과 영재의식에 빠진 채 자기기만적이고 퇴폐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나는 자네들을 비난했지 그런데 세속의 인간들도 그 못지않게 자신들의 나쁜 매너와 빈약한 교양, 거치고 시끄럽기만 나 유머 오로지 이기적인 목적만 추구하는 데 쓰이는 속이 빤한 지혜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더군. 천한 것이 보다 더 고결한 것을 향해 늘 드러내는 그런 증오심으로 내 속에 있는 카스탈리엔 적인 것을 비웃었어. 나는 우리나라가 카스탈리엔의 정신과 멀어진 것을 보고 그 매개자 통역자가 되기로 했지만 실패했네. 내가 그 정신을 지키고자 명상수련을 하면 그들은 나를 기분 나쁘고 낯선 사람취급했네. 내가 그들처럼 되고 그들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게 되었을 때 이 세상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네. 세상은 나보다 더 나를 압도했고 나를 삼켰네.
하지만 나는 압도당했지만 굴복하지는 않았지. 
크네히트;
“ 이보게 우리는 이제 그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전혀 다른 의도와 가능성을 지니고 만나고 있네. 우리에게 이제 감상벽도 없으며 질투와 미움의 감정을 억지로 누를 필요도 없고 자부심 같은 것도 없네 윌 둘 다 이제 어른이 된 거지. 한 가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자네의 슬픔이나 불행은 카스탈리엔으로 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말일세. 그건 자네가 자신의 영혼을 카스탈리엔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둘로 분열시켜 놓은 다음 자네에게 아무 책임도 없는 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 정작 자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을 등한시 하는 것 처럼 들리네.
“ 명랑과 맑음에 대해 한마디만 더 하지. 자네는 자네가 슬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맑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모든 밝음과 쾌활함. 특히 
공식과 형식뿐인 추상에 집착하고 도피하고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맑음, 하늘과  정신의 맑음이 그 가치와 빛을 잃는 것은 아니라네.”
모든 언어와 신화와 종교를 통해 이 우주의 가장 심오한 이치를 발혀보려 할 때도 그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이 맑음, 명랑성이네. 부처님의 명랑한 미소처럼. 
<제10장. 준비>
크네히트가 얼음을 깨는 데 성공한 후 그와 데시뇨리 사이에는 화기 있는 교류가 이어졌다. 
그의 후일담에 의하면 
“ 내가 그와 동등한 힘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내가 그를 필요로 하듯이 그도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맨 처음 긴 대화를 나눌 때부터 그는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리고 머지않아 명인직을 사임하고 교육주를 떠날 계획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완전히 몰입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남을 가르치고 감호시키로 치료하고 돕고 발전시키겠다는 충동이 거의 본능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명상하게 만들었으며 맑음과 용기를 통해 나르 다시 가르쳤고 나를 다시 변모시켰다. “
데시노리의 가정생활은 평안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죄를 지은 듯한 태도로 충동을 억누르며 힘겨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고 행동이나 말씨도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플리니오 데시뇨리와의 대화를 통해 크네히트는 “각성” 삶을 향한 새로운 태도를 밖으로 열어놓기 시작했는데 즉 누군가를 자신의 비밀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의 실현을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인지도 모른다. 
즉 그의  응석받이 이자 골칫거리 인 아들에게 교사가 되어주는 싶다는 열망을 내비친다. 
 
< 제11장 회람>
유리알 명인직 사임을 청원하는 글을 그의 친구인 테글라리우스를 통해 상위기관에 보낸다. 그의 청원글을 따라가 보자. 
“모든 귀족계급이나 특권층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건 없던 , 계급적 오만에 빠지기 쉽고 , 그 오만이라는 타성에 젖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권력자들을 ㄴ항사아 그들을 보호해 주고 특권을 주면서 그들을 격려합니다. 제가 말하는 귀족이란 정치적 귀족뿐만 아니라 혈통, 선축 혹은 교육에 의해 형성된 귀족들 모두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양지에서 무럭무럭 자란 귀족은 일정한 단계가 지나면 그 자체 하나의 유혹이 디어 부패하게 됩니다. ….. 또한 우리가 귀족층의 특징적 질병이라 할 수 있는 오만함, 거드름, 계급적 자부심, 자기 정당화, 착취적 기질에 이미 어느 정도 오염되어 있는 것이 나 아닌지 면밀히 검토해 보면 많은 의혹에 사로 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우리가 가르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하여 국가가 치르는 희생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우리의 특별한 지위의 의미가 무엇인지 신경을 쓰고 있나요? 우리 수도외와 수도회의 삶의 목표에 대해 실질적인 개념을 갖고 있나요?
학문의 보편성이 아니랑 오만함과 자화자찬을 키우고 , 지식 자체에 몰입해 있는 전문가를 육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역사의 한 부분이며 역사 속에서 생성된 존재라는 사실, 우리 스스로 생성과 변화의 능력을 상실하면 죽음을 선고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역사이며 우리는 세계사에 대하여 공동책임을 져야 합니다. 
반지성적이고 야만적이었지만 그 시대에도 지적인 능력이나 방법론에 있어 엄청난 업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전쟁시대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면. 저는 파괴된 도시나 정복된 민족보다는 당시의 지식인들의 태도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대부분은 압력에 굴복해서 자신의 재능과 지식과 기술을 통치자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당시 마사카텐 공화국의 한 대학교수가 남긴 “2 더하기 2의 답이 무엇인지 정확히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대학이 아니라 사령관각하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상기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을 침묵하는 법, 구걸하는 법, 경찰을 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통치자에게 부역하면서 그들의 구호를 작성해 준 문인은 일자리와 빵을 구할 수 있었지만 동료들로부터 경멸을 받아야 했으며 그들 대부분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렸습니다. 부역을 거절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유배지에서 죽었습니다. 역사는 그때그때 주도권을 잡은 국가 위주로 해석된 어제멋대로 왜곡되었고 단순화되었습니다. 역사 철학과 잡문이 모든 분야를 지배했습니다. 정말 야만적이고 난폭한 시대였고 혼돈에 휩싸여 바빌론적인 시대였습니다. 충분히 피를 흘리고 타락을 겪고 나서야 겨우 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합리성을 향한 공통 언어의 재발견을 향한 질서와 도덕과 보편타당하 ㄴ율리적 기준을 향한, 권력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알파벳이나 구구단 같은 것을 향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향한, 이성을 향한, 혼돈 극복을 위한 엄청난 욕구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카스탈리엔이 생겼고 그들은 전력을 다해 프로타 간다를 쓸어내고 바닥으로부터 출발해서 지적인 삶, 교육, 연구, 문화를 재건했어요.
그렇게 해서 수도회 교육청, 영재학교, 기록보관소, 전문학교와 세미나 유리알 유희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늘 자신이 키워놓은 것을 뒤엎고 삼켜버렸듯이 조만간 이 건축물을 뒤엎고 삼켜버릴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퇴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 졌으며 세계 또한 새로운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진리애 ,지적인 법칙과 방법들에 대한 충성을 다른 이익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은 설사 그것이 조국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배신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거짓을 말하고 쓰는 학자, 알면서도 거짓과 사기를 지지하는 그릇된 선생들은 단순히 유기적 생명체로써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그 어떤 허울을 둘러쓰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국민들에게 심각한 이해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기와 토양을 오염시킨 것이며 음식과 음료를 썩게 만든 것이고 나라의 생각과 법을 독살한 것이며 국가를 파멸로 이끌 적대적이고 사악한 힘에게 일조한 것입니다. 
……. 유희명인은 원래 학교선생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진리를 지키고 가르치는 훌륭하고 용감한 학교 선생님이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 일 수록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야코부스 신부님의 말을 인용합니다. 
: “공포와 실로 깊은 고난의 시대가 닥쳐오리라. 그러나 그런 고난 가운데도 행복이 손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정신적인 행복뿐이다. 그것은 저 옛 시대의 문화유산을 뒤돌아보면서, 또한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정신에 관계되는 일이 끈기 있게 옹호되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느끼는 행복이다, 만일 정신적인 것이 보호되지 못한다면 장차 모든 것이 완전히 물질적인 것에 굴복해 버리는 시대가 오리라. “


< 12장 전설>
명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 그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 그의 결정과 행동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 그의 삶이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야기가 많으나 그의 바깥세상을 향한 신비스러운 출발을 감행한 지 후 더 신비스러운 피안으로 넘어 가버린 명인에 대한 추억을 가슴으로 간직하고 싶을 뿐이다. 
그의 각성에서는 실제 세상에서의 경험과 자신의 존재 증명이 문제였다. 당신은 지금 처한 상황에서의 당신 자신의 자아의 태도를 파악하고 파악한 것을 수행하거나 감내해 낼 뿐이다. 당신이라는 개인 자신의 중심을 향한 길에 놓이게 된다. 
그의 새로운 인식방법 “각성”즉 진리의 핵심을 향한 발걸음이 이별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가 나아간 길은 곧은 직선이 아니라 일종의 원, 혹은 타원이나 나선형이었다. 직선이라는 것은 자연과 삶에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제자 티토를 만나고 크레히트는 수영을 간다. 긴 여행으로 헤엄을 친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소년이 말없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경고소리 보다 강했고 의지가 본능보다 강했다. 그리고 그는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헤치며 심장이 뛰는 동안은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웠다. 티토는 스승이 물속에서 사라지고 충격과 슬픔을 느꼈으며 자신이 그 사람을 이미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명인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 죄의식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리라는 것, 자신이 스스로에게 요구했던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을 자신에게 요구하리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렇게 크네히트는 갑작스럽게 세상과 작별한다. 황망한 크네히트의 죽음은 그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기대를 무참히 저버리고 먼 길을 떠나 버린다.

크네히트의 유고시집에  있는 시 중 한편;

단편들
모든 꽃은 시들고 청춘도 따나가듯이
우리 인생의 여러 단계도,
모든 덕목도 진리에 대한 꺠우침도,
제철에 꽃을 이울 뿐 영원하지 않다
매 단계마다 삶은 우리를 소환하나니
그 때 마다 새로이 힘을 내서 이별을 준ㄹ비하고,
낡은 것이 줄 수 없는 새로운 빛을 찾아
후회 없이 용감하게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하리라.
모든 시작에는 마법의 샘이 있으니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공간에서 공간으로 밝고 맑게 움직이면서
그 어디에도 고향인 양 마음을 두지 말자
우주의 영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ㅓ니라
보다 더 넓은 공간을 향해 한단계, 한단계씩 나아가게 한다
생의 어 한 단계를 고향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태가 우리를 찾아오리니,
습관의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떠날 준비를 해야만 하리라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는
신선하고 새로운 세걔로 넘어가는 것인지 모른다
삶은 우리를 새로운 것을 향하여 계속 부를 것이니,
그렇다면 좋다, 마음이여! 끊임없이 작별하라.  

헤세라는 작가자신이 물질 만능주의와 광기의 권력탐욕과 반지성적인 야만의 시대를  살아내면서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인지 실존적 고민을 가열차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사회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영성의 추구에 온 힘을 다해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그 자신이 유리알 유희 명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품 3편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가 작게 나마 자신을 위해 혹은 이웃을 위해 명인의 경지는 꿈도 못 꿔보지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작은 방법들에 대한 고민을 놓치치 않아야겠다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