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송생활을 읽다-김훈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희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이다."
늙의막의 적막은 때론 새벽잠에서 홀연히 새어 나오는 낮은 울음으로 의식을 흔들어 깨운다. 무심한 세월에 무기력하게 나이 들어가는 자신에 대한 고요한 다독임일 수도 있고 대책 없는 두려움일 수도 있겠다.
김훈의 글을 읽으면 왠지 늙어가는 육신과 그 육신을 못 따라가는 정신의 불균형에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다소 완화되고 위로받는 느낌이랄까. 육신을 빌어 살고 있는 영혼의 다급함에 쉼표를 찍으며 이제껏 살아오면서 애쓴 마음과 고단한 육신을 달래주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느낀다 할까. 그의 문장은 물기를 걷어낸 건조하면서도 강건한 힘이 잔잔하다. 그러면서도 사물에 깊숙이 닿아 있는, 늙고 힘없는 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나직하면서도 정직한 거친 욕망이 걷힌 서늘한 시선이 있다. 젊었을 때의 그의 글도 쨍쨍한 한낮의 햇볕처럼 좋았지만 나이 들어 쓴 소설과 산문집도 해 질 녘의 나른하고 포슬한 그렇지만 사물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적확한 기운의 따뜻함으로 가차 없이 파고든다.
세상에 맞닿아 사람과 사물에게서 얻은 말을 따라가기에 애쓴다는 그의 야무지고 단단한 언어가, 개념에서 인공부화된 또 다른 개념들의 이어달리기에서 벗어나서 통속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그의 언어가 언어도단의 시대에 적절한 언어를 만나지 못해 답답하고 황폐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여든에 가까워진 그의 문장을 기록하면서 나의 언어가 아닌 그의 언어를 되새김질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늙기의 즐거움
핸드폰에 부고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 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액정화면 속의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계좌도 찍혀있다.
애착하던 것들과 삶을 구성하고 있던 졸렬한 조건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풍경은 쓸쓸해도 견딜 만하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혼곤해진다. 와인에는 현실과 부딪히는 술맛의 저항감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계통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전방위에서 스멀거리면서 피어나는 스미듯이 다가와 내 마음을 차지한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비논리적이고 두리뭉실하다.
젊은이들은 주로 와인을 마시는데 와인에 취하면 헛사랑을 고백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 막걸리는 생활적이고 와인은 몽환적이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 하고 생로병사하는 아수라의 술이다. 소주는 생활의 배수구였고 종말처리장이다. 소수의 쓰라린 세속성을 소화해 내기는 어렵다.
사케는 겨울의 술이고 나이 든 사람들의 술이다.
내가 즐겨 마시는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치기는 논리적이고 명석하다. 개인의 술이고 단독자를 정서의 정점으로 이끌고 간다.
단순한 언어로 표현하려면 맑고 힘센 마음의 자리에 도달해 있어야 할 것이다.
말년
나이를 먹으니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시간에 백내장이 낀 것처럼 사는 것도 뿌옇고 죽는 것도 뿌옇다.
개념화된 고통은 전달되거나 공유될 수도 없는 것이고 고통은 오직 연민의 힘에 의해서 개별적 인간의 경계를 넘어갈 뿐이었는데, 연금은 눈금으로 측정되지 않았다.
기쁨, 슬픔, 외로움, 그리움 가 같은 마음의 침전물이 아예 없어진 거슨 아니로뢰, 이 물컹거리고 들척지근한 단어들을 차마 연필로 포획할 수 없어서 글로 옮겨 남들에게 들이밀지 못한다. 단어들도 멀어진다. 믿고 쓰던 단어에서 실체가 빠져나가서 단어들은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불려 간다. 부릴 수 있는 단어는 점점 적어져서 이제는 한 줌뿐인데, 나는 이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시간과 공간에서 녹고 삭는다.
허송세월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햇볕을 쪼이면서 생각해 보니 내 앞의 담장은 개념, 기호, 상징, 이미지, 자의식 같은 것들이다. 나는 이 언어적 장치와 그 파생물에 의해 시야가 가려지면서도 이 차단막에 의지해 세상을 이해하려 했는데, 이 가려짐은 삶의 전 범위를 포위하고 있어서 부자유가 오히려 아늑하고 친숙했다.
재의 가벼움
뼛가루의 침묵은 완강했고, 범접할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금방 있던 사람이 금방 없어졌는데, 뼛가루는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나 애도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었고 , 이 언어도단은 인간 생명의 종말에서 합당하고 편안해 보였다.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의 유언은 “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 드려라”라고 했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한 장례 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구강의 기능이 퇴화해서 음식을 삼킬 때 식도로 들어가지 않고 기도로 들어가서 사레들리기를 자주 하고 혀의 기능이 둔화되어서 어눌하게 된다고 한다.
혀를 빨리 놀리지 않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혀가 굼뜨게 되면 말이 멀어지고 단어 한 개를 끌어오려 해도 단어는 선뜻 따라오지 않아서 단어 하나가 모시기 어려운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새
알을 품은 새는 고요히 집중했고, 스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둠과 비와 추위를 혼자서 감당했다. 수컷은 먹이들을 부지런히 날라쏘, 가끔씩 암컷과 교대했다. 나는 품다는 한국어의 경건함을 생각했다.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태풍전망대
가을에는 시야가 넓어져서 사라져 가는 산천의 뒷모습이 보인다. 가을에는 시간의 미립자들이 멀리 밀리 나가서 몸이 느끼는 존재의 무게가 줄어든다. 가을에, 시간은 가볍고 공간은 헐겁다. 가을에 이 고지에서는 숨쉬기가 편안하다.
봄은 사람에게 다가오지만 가을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서 시계 너머로 간다. 하늘과 땅 사이가 헐거워진다.
적대하는 언어들
언어는 소토이 아니라 적대의 장벽을 쌓는 사업에 동원되었다. 여러 정파들이 날마다 욕지거리, 악다구니, 거짓말, 증오, 가짜뉴스를 확성기로 쏟아내고 언론 매체가 이 악다구니를 전국에 증폭시킨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들을 모두 정의의 탈을 쓰고 있어서 이 철벽에는 작은 구멍도 뚫을 수가 없다. 이 소통 불가능한 언어는 식민지와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 시대의 저변층에 뿌리 박혀 있다
세월호는 지금도 기울고 있다
엄마가 포대기를 X자로 묶는 방식을 화객선 선원의 용어로는 ‘고박’이라고 한다. 고박은 네 가닥의 밧줄로 화물을 X자로 묶어서 갑판 바닥에 고정하는 작업이다. 영어로는 레싱으로 랜싱에 사용되는 밧줄을 래신벨트라고 한다. 내 엄마의 포대기 끈과 같은 것이다. 세월호가 복원력을 상실하고 기운 거슨 고박 불량이었다. 세월호 참사 후 10년이 흘렀다. 그 참사와 그 희생자들을 타자화하고 소수 화해서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언설 행위를 계속해 왔고 이 노력은 상당 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일상으로 돌아가자” 가 그 깃발이었고 극복이 표제어였는데 극복을 외치는 이 깃발은 사태의 심층구조를 우회했고, 일상 속에서 밥 먹듯이 거듭되는 죽음과 통곡을 외면하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사는 가야 할 길이 멀고 발걸음이 다급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초개로 여기는 사회 풍조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지배 체제가 다수 인간의 생명을 일회용으로 소모해 버리는 사태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겨이의선, 철도건설현장, 수많은 조선노동자가 작업 중 사고로 죽었고, 병들어 죽었고 얼어 죽었고 일본 감독관들에 의해 타살, 사살, 처형되었다. 침략전쟁이 후방기지에 동원되어 야만적 수탈 노동에 희생된 죽음은 순으로 미화되었고 침략전쟁은 난을 위장되었다. 이후 100년이 지나서 한국은 우주선을 올리고 케이 드라마니 뭐니 하지만 작업 현장의 노동자는 여전히 깔려 죽고, 맞아 죽고, 끼여 죽고 떨어져 죽고 말려들어가 죽고 감겨 주는다. 식민지 시대나 조국 근대화 시대나 케이 머시기 시대나 사고의 유형과 원인은 단순하고 원시적이고 반복적이다.
여름편지
나는 책을 자꾸 읽어서 어쩌자는 것인가. 책 보다 사물과 살마과 주변을 더 깊숙이 들여야 보아야 한다고 늘 다짐하면서도 별수 없이 책을 읽게 된다.
장자는 순결한 삶, 자유로운 정신, 억압 없는 세상을 모습을 역동적 드라마로 제시한다. 인간은 짧은 줄에 목이 매여서 이념, 제도, 욕망, 언어, 가치, 인습 같은 강고한 말뚝에 묶여 있다. 짧은 줄에 바싹 묶여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편안해하고 줄이 끊어질까 봐서 노심초사하고 있다. 장자가 마음의 도끼질로 이 목줄을 끊어 주는데 줄이 끊어지면서 드러나는 세계의 질감은 가볍고 서늘하다.
걷기 예찬
삶과 몸의 직접성. 나는 걷기의 육체성과 걷기의 정신성, 걷기의 개별성과 걷기의 개방성, 그리고 그 두 쌍의 대립적 국면들이 서로 만나서 접합되는 대복의 건강함을 생각했다.
걸어가는 몸 앞에서 언제나 새롭고 낯선 시간과 공간이 펼쳐진다. 그래서 살아서 걸어가는 몸은 그 앞에 펼쳐진 세상을 낯설어한다. 걸어가는 몸속에서 이 낯섦은 친숙함 으로 바뀌는데 몸은 그 친숙함에 매달리지 않는다. 걸어가는 몸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연료로 사용되고, 다리로 땅을 밀어서 살아 있는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정신성은 몸과 함께 간다.
조사’에’를 읽는다.
조사는 순수 한국어로 토씨다. 조사는 느슨하고 어슴푸레하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애’는 달과 인간 사이를 놀이의 신명으로 가득 ㅐ운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에’는 청산과 인간을 서로 사무치게 한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의 “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을 누님의 생애 속에 육화 시켜서 언어를 삶으로 전환하는 연금술울 수행하면서도 논리적 구조를 구문안에 돌출시키지 않고 조용하다.
한국어 조사 ‘에’는 문장의 논리적 기둥을 이루면서도 문장 안에 자유의 공간을 유지한다. 그 성음은 낮고 작아서 잘 들리지 않지만, 논리의 경직성을 풀어주고 글의 세상을 “넓혀준다.
봄볕에 노인의 몸이 마른다. 소나기에 들이 깨어났다. ‘조사 ‘에’는 논리와 정한을 통합하는 새로운 언어의 세계를 연다. ‘에’는 느슨하고 자유로워서 한국어의 축복이다.
형용사, 부사를 생각함
사물은 형용사를 필요하지 않는다. 수식어는 그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주관적 정서나 감각과 선입관을 표현한다. 나의 글은 너무 수다스럽다. 나는 내 선인들의 좋은 글을 보이면서 나의 오류를 증명하려 한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백석’국수’
허수무레와 수수하다는 말은 내면 자체의 시각적 느낌이다. 슴슴하다는 혀의 미각이고 부드럽다는 입안의 촉각이다. 히스무레하다는 색감이고 수수하다는 형태다.
4개의 형용사 안에서 인간과 사물은 서로 교차하면서 합쳐진다.
졸레졸레 도야지 새끼들이 간다.
귀밑이 재릿재릿하니 볕이 담북 따사로운 거리다.
아 모도들 따사로이 가난하니 -백석’ 삼천포’중에서
가난함을 빈곤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가난을 모른다.
자신의 말이 삶에 닿아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삶을 향해서 시대와 사물을 향해서 멀리 빙빙 돌아가지 말고 바로 달려들자.
난세의 책 읽기
세상살이는 어렵고 책과 세상과의 관계를 세워 나가기는 더욱 어려운데, 책과 세상이 이어지지 않을 때 독서는 괴롭다.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먹기의 괴로움
명품 핸드백이나 고가의 자동차를 사고파는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은 자유와 조화에 도달할 수 있겠지만 4천 원짜리 밥을 먹는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몽둥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자본주의시장에서 한 사람의 소비자로 살아야 하는 인간은 자력으로 쇠사슬을 끊을 수 없고 시장에서 달아나서는 살 자리가 없다.
인간의 영성은 그리고 밥에 있다.
주먹도끼
나는 이 번쩍거리는 정보통신 시대의 낙오자다. 나를 호출하는 신호를 보내는 이동통신수단을 혐오한다. 나는 이 벨소리에 폭력을 느낀다. 이제 사람들은 정보의 힘에 이끌려서 살아간다. 이 정보는 선대로부터 전수된 것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체득한 것이 아니고 원리로부터 유추한 것이 아니다. 이 정보는 외부에서 가공되고 주입된 것이다.
삶은 전환이 아니라 단절의 방식으로 변한다. 연장이 다시 문명의 핵심부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이 연장의 원리로부터 벗어날 수없다는 것도 분양하다
연장의 추억은 인간의 손가락 마디에, 팔다리와 허리에 각인되어 있고, 인간의 몸 전체는 연장의 기능으로 작동하고 있다.
연장을 쥔 인간은 이 세계 안에서 몸의 구체성을 실현하고 제 몸의 사실성을 확보한다.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지금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사히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학교와 교사를 괴롭혀서 교육의 근본을 파괴하고 사회 계층 간의 적대의식을 고조시킨다.
위장전입과 부동산 거래의 이익을 노린 것이거나 내 새끼를 명문 중고등학교에 보내고 명문 대학에 보내서 기득권을 세습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의 자식을 짓밟고 ‘내 새끼’를 밀어붙이는 고위층 갑집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저출산 정책에 수십 조를 퍼부어도 그 결과는 모두 헛것이다. 이제 ‘아기가 타고 있어요’도 점차 사라지고 ‘힘센 꼰대가 간다’만 남을 판이다.
아날로그는 영원하다.
대룡시장에는 이 골목에서 한평생 시계 수리점과 도장가게를 경영한 고 황세환 씨의 기념관이 있다. 강화군청이 황 씨가 별세하자 이 점포를 인수해서 기념관을 꾸몄고 대룡시장 상인회가 명장의 팻말을 붙였다. 황 씨는 교동도의 토배기다. 20대에 몸을 다쳐서 라디오 수리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나와서 진공관 기술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게 되자 3년 동안 급료를 받지 않고 시계 기술을 배웠지만 황 씨의 아날로그시계가게는 점차 디지털 방식이 시계의 대세를 이루자 생계가 막막했다. 그러자 근 도장기술을 배운다 그것마저 전자결재의 대체로 더 이상 생계수단이 되지 못한다.
기다림과 그리움은 모두 아날로그의 사업이 디지털의 공간 속으로 제비는 돌아오지 않는다.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어떤 어조로 말해야 하는가 몰본새를 어찌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일은 인문주의의 토대이다. 말 앞에서의 경건함, 말을 검소히 사용하는 망설임, 혓바닥을 너무 빠르게 놀리지 않는 진중함, 사람 사는 동네를 걸어 다닐 때 어깨를 거들먹거리지 않는 걸음걸이가 인문주의의 중요한 외양일 것이다.
무기화된 연어의 의미내용이 파괴되고, 개념이 지칭하는 바는 모호해지고, 모든 메시지는 수취인이 불명해져서 이 세상은 파도소리 나 티브이의 노이즈 현상처럼 해독 불가한 무의미로 뒤덮여 버린다. 말을 할수록 인간 사이가 단절괴도 소외가 심화되는 사태이고 정치는 공허해지고 있다.
하느님: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카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낙원에서 추방된 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대화는 인간의 근친살해 범죄에 관한 것이고 그 언어의 내용은 허위와 회피 오리발내밀기, 돌려차기와 뒤통수 때리기, 딴소리하기와 뭉개기로 이루어졌다. 구약성서의 이 대목은 인간과 언어가 서로를 파괴하는 참상의 기원을 서너 줄의 문장으로 벼락 치듯 묘사하고 있지만 이 비극적 소통불가능은 그 후의 인류사 속에서 증폭되어 왔고, 지금 대한민국 국회와 여러 당파집단, 이익집단과 에스엔에스에서 넘쳐나고 있다.
당파집단의 언설들은 국민이라는 거대한 군집명사의 모호성과 익명성을 끌어와서 정치적 욕망의 민낯을 가리는 철판으로 삼고 있다.
크고 모호한 단어 뒤에 사실을 감추는 어법은 이 시대 정치적 언설의 특징이다.
삶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사안별로 논의되고 구현되지 않는 정이는 신기루, 말의 쓰레기로 전락하기 십상일 것이다.
아마도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언어의식 밑에 깔린 잠재 욕망일 것이다. 이것이 말하기의 어려움이다.
사실에 따른 이해를 무력화하고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가두어서 지배하는 프레임.
이제 인간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직접 체험하거나 인식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인간과 세계사이에 수많은 매체가 개입하고 있다. 언어의 순수성은 위협받고 있다.
인간과 세계 사이의 직접성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언어는 훨씬 더 작고 단단하게 영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별적 고통을 생각하며
사망자의 많고 적음을 기준으로 사고의 중대성을 등급 매기는 사회적 관행은 생명을 물량으로 취급해서 사물과 동일시하는 몰인격적 인식일 것이다. 간접고용된 노동의 지위는 막다른 자리로 매 몰려서 디댈 곳 없는 벼랑이다. 기업은 인간의 노동을 사용할 뿐 고용하지는 않고, 노동자는 각자 개별적 계약의 관계로 흩어져서 무력하게 되었고 기업은 고용에 따른 의무를 벗어던진다. 거듭 확대되는 강자의 자유는 약자들의 기본적인 삶의 환경과 조건들을 심각하게 침해한다.
지금 노동의 불안정한 지위는 모두 자유로운 계약에 의해 합의된 것이다.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는 사람에게 계약의 자유를, 직업 선택의 자유를, 경쟁의 자유는 공허한 이념의 깃발 일뿐이다. 기업의 이윤은 기업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한 소중한 자산이지만 죽음과 억압의 토대 위에 기업의 상부구조와 지속적인 이윤을 건설할 수가 없다.
이것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대립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문제 인간과 물질의 문제 인간이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경제적 관계를 설정하는 원리에 관한 문제이다.
똥냄새와 햇볕 냄새는 내 마음의 기층구조를 이룬다.
새와 철모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희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이다.
민속박물관에 전시된 군용 철모에 긴 손잡이를 연결한 똥바가지.. 똥바가지는 전쟁의 야만성을 생활 속으로 용해시키면서 웃음 띤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산악 지대 참호 소에서 전사한 병사의 넋이 생활용 구로 변해서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생활은 크구나”라고 글자 여섯 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