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손턴 와일더
이 전설적인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쩌면 우연: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것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살고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1714년 7월 20일 정오. 페루에서 가장 멋진 다리가 무너지며 다섯 명의 여행자가 그 아래의 골짜기로 추락했다.
이 다리는 백년전 잉카인들이 리마와 쿠스코를 잇기 위해 고리버들을 엮어서 만든 것이다.
이 다리의 이름이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다. 모든 사람이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 주니퍼 수사만이 거기에 대해 무언가 행동을 취하려고 했다. 즉 그는 '신의 의도'가 아닌지 의심될 만큼 놀라운 우연의 연속으로 볼 것인지 증명하고자 했다.
즉 우리는 우연히 살고 우연히 죽는 일일까. 아니면 계획에 의해 죽는 것일까. 주니퍼 신부는 여기에서 죽은 다섯 명의 숨겨진 삶을 조사하고 그 죽음의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마음먹는다. "
"신형철의 해제<샘 속에 숨겨진 샘>에서 그는 옛날식 우화의 서술자를 닮은 소설의 '나'는 작품 안으로 진입해 놓고는 그런 적 없다는 듯 거리를 취하고 담백한 서술로 일관한다. 현대 독자의 미학적 기대에 도달한다 싶을 때쯤 우사리래 인간 내면은 조금도 변한 적이 없음을 순간적으로 믿게 만드는 보편적 고통의 표정을 정확히 재현하는 문장으로 읽는 이를 흔들고 서술자는 다시 숨는다. "
세상의 비극들은 허망한 우연의산물인가 아니면 초월자의 의도가 실현된 결과인가.
유사 이래 인간의 해석능력을 넘어서는 자연재해와 인재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적인 사고들을 접할 때마다 무력하게 물어온 질문들. 운명인가. 신의 숨겨진 계획의 실행인가. 아님 무엇인가. 왜 이토록 참혹한 사건들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가깝게는 제주도 항공사고로 아까운 이들의 죽음이 있었다. 모든 죽음이 개별적이고 특별하고 우리에게 자신의 일상적인 일처럼 너다. 무나 직접적이고 가까운 느닷없는 사고사는 단순히 비극적이다고 말해버릴 수 없는 아픈 실존적인 질문들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주니퍼 신부가 이 사건에 등장하는 다섯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죽음의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역부족이다. 이는 악한 사람에게 내린 파멸적인 결론도 아니고 선한 사람들을 일찍 부름으로 인한 축복도 아니다. 주니퍼신부마저 이단심판을 받고 화형을 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또한 신의 의도로 이 죽음들을 다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샘 속에 숨겨진 깊은 샘>을 그 또한 놓쳤을 것이기에..
주니퍼 신부에 의해 제시되는 다섯인물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다시 혹은 이제야, 달리 살아 보기로 결심하던 무렵에 죽었다는 것. 동의하기 어렵다. 파멸, 혹은 부름. 왜? 하필 이때?
신형철의 분석대로 신은 왜 살려고 결심한 직후에 죽였을까에서 인간은 왜 죽기 직전에야 살기 시작할 수 있었을까를 묻는 일이다.
첫번째이야기. 몬테마요르 후작부인
도냐 마리아 후작 부인이 딸을 많이 사랑했지만 잘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 자기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딸의 사랑을 갈구한 그녀. 이 역전된 요구를 감당할 딸이 있는가. " 자신의 사랑 안에 폭압적인 그림자도 없진 않았으며,결국 자신이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딸을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 비열한 굴레에서 벗어나길 갈망했지만 딸에 데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렬해서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의 힘든 시간을 지켜보는 수녀원 출신 말벗 페피타.그리고 그 당시 당당한 여성성을 상징하는 수녀원장. 그녀는 여자들 앞에 닥친 모든 불행이 순전히 부양해줄 남자를 찾지 못할 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는 관념과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남자의 손길이 닿아야 해결된다는 관념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사상으로 고생길에 들어간 수녀원장이 있다.
그녀는 인생에서든 사랑에서든 용기를 낸 적이 없었다. 딸과의 관계, 노골적인 대화와 근거 없는 경멸, 때가 좋지 않는 확신 무시하고 배척하는 비난의 잔해가 가득한 오랜 모녀 관계를 떠올렸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다 환경 탓이야. 내일부터는 새 인생을 시작할 거야. 내 딸아." 하지만 그녀는 사는 것 가이 살 거야. 다시 시작할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는 도중에 다리 아래로 추락한다.
두번째 이야기. 에스테반
<이제 그는 사랑에 관한 돌이킬 수 없는 비밀을 발견했다. 가장 완벽한 사랑에서조차 한쪽이 다른 한쪽을 덜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
수녀원 앞에 버려진 쌍둥이 형제 마누엘과 에스테반. 수녀원장은 그들을 필경사로 키운다.
쌍둥이의 비밀언어. 그들의 일체감은 마누엘의 한 여인- 극장 교훈극 배우 겸 가수 카밀라 페리촐레에 대한 사랑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누엘은 사랑으로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극적인 생각 외에는 안중에 없는 상태에 이른다.
에스테반의 설득으로 마누엘은 자신의 사랑을 접는다. 그리고 우연한 무릎부상으로 생을 마감한다. 절망과 자괴감으로 에스태반은 거의 죽은 것 처럼 자포자기하듯 살아간다. 그 와중에 먼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의 설득으로 자신도 타인의 상실을 위로하겠다고 마음먹지만 그러나 너무 늦었다. 라마로 출발했고 다리를 건넜고, 다리와 함께 추락했다.
세번째 이야기. 피오아저씨
<우리는 놀라운 수준의 훌륭한 것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와서, 우리가 다시 경험하지 못할 아름다움을 희미하게 기억한 채 살다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 >
피오아저씨가 카밀라 페리촐레를 많이 사랑했지만 잘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는 것.
피오의 사랑은 애욕을 부정하면서 비틀리는데 그 경우엔 대개 가학적인 속성을 갖게 된다. 상대가 느끼는 고통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실감하고, 그 고통을 인내하는 모습을 보며 충성을 측정하는 식이다. 예술을 위해 그런 사랑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명분도 그를 오래 미혹해왔다.
그러나 미망에서 깨어난 개심한 피그말리온이 되어 두번쨰 삶을 꿈꾸지만 너무 늦었다.
마지막 장. 어쩌면 신의 의도.
<그녀는 자신이 삶의 목표로 삼았던 특성들이 어디에나 있고, 세상은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 그것을 말해 주는 새로운 증거에, 마치 소녀처럼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
인간의 사랑은 왜 이런가. 핵심은 용기다. “때로는 용기를 내어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 타인에게 정확해질 용기.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이거나, 반대로 사랑한다는 말로 도망치지 않을 용기. 내일은 곡 진실해지자고 다짐하는 평범한 어떤 오늘, 우린 죽는다.
마지막챕터. 주피터 수사의 최종결론보다 살아남은자들의 결론을 더 크게 다룬다. 남은 자들 역시 용기가 없었던 건 마찬가지다. 나도 솔직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너를 더 정확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이제야말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젠 용기가 없는 게 아니라 용기를 낼 대상이 없어졌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의 마지막 단락.
“ 우리는 곧 죽을 것이고 , 그 다섯 명에 대한 모든 기억도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모든 사랑의 충동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랑으로 돌아간다. 사랑을 위해서는 기억조차 필요하지 않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고, 그 둘을 잇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오직 사랑만이 의미를 지닌다. “
어찌보면 한치 아도 모르고 바둥대며 살다가 준비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잠시 기억되다가 영영 잊히는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한동안 누군가를 사랑하고 ,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히 살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옮긴이
우리가 알았던 그리고 사랑했던 이들이 죽음으로 인해 언어로 옮겨지지 못하는 숱한 슬픔의 감정들이 가지런히 유한한 삶의 허무함과 함께 가지런히 정리되는 기분이랄까.
잠시 머물다 가면서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았다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용기를 내어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 내가 과거에 덜 사랑한 사람들, 이미 먼저 별이 된 버려 더 이상 사랑의 말을 건넬 수 없다면 이미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더 용기 내어 많이 사랑하는 것.
책을 덮으면서 벅차 오르는 슬픔을 이젠 희망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좀 더 죽음에 더 겁내지 않고 다가갈 수 있기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처럼 삶과 죽음이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