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노고단

둥근이질풀. 찌는 폭염의 한낮으로 시들해질 법도 한데 해발 1500 노고단을 올라가는 능선길 옆에 다소곳하게 꽃을 피워 눈길을 사로잡는 여름 꽃 이질풀꽃을 보는 즐거움은 사뭇 감동스럽다. 수년전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 “꽃피는 나무들의 괴로움” 이 생각이 난다. 생태적인 원리는 잘 모르지만 꽃피는 것들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보는 이들에게는 주관적인 감정이입으로 느껴지겠지만 꽃피고 죽음으로 서서히 생을 마감하는 절정의 순간의 고달픔을 시인은 이야기했을 것이다. 무픞이 아파오는 고도가 높은 곳의 산행을 달래주듯 살포시 피어있는 둥근이질풀꽃. 가만히 들여다 본다.

산가지꽃. 꽃대가 밑으로 쭉 쳐지면서 이쁜 꽃술을 달고 있는 산가지꽃. 인위적으로 꽃을 상상해서 그린다해도 이렇게 고운 연보라빛 꽃의 생김새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저 바람과 햇빛과 흙으로 빚어진 꽃은 인간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쉬 시들어버리는데 그들만의 생애를 맘껏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마고 할망께 소원을 비는 어느 등산객의 작은 의식은 산행에 경건함을 부여해 부었다. 노고단 산정에서 과거 20년전 훈련등반을 하며 저 너머 지리산에서 두번째로 높다는 반야봉을 올랐다는 기억만으로 는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반야봉을 그려보고 있을 그의 눈빛이 해맑고 선하다.

그 옛날 수많은 등산객의 산행으로 거의 황폐해져 버린 노고단길을 다듬고 생태를 복원해서 너무나 아름다운 길을 다시 열어 준 관계기관과 작업을 해 주신 분들께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생긴다. 배낭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땀을 식히면 금새 바람이 지나가면서 안개가 걷히고 저 아래 마치 꿈결처럼 펼쳐진 사람사는 동네들이 슬그머니 자태를 드러낸다. 세상 살이의 모든 것들이 시난고난 힘겨운 고행을 하고 쉼을 하면 이렇듯 선물처럼 아름다운 풍경들과 만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저 멀리 가뭇거리듯 조용히 앉아있는 곳이 아마 문척면일까, 아니면 피아골의 직전마을 일까. 그저 상상하면서 동네들을 소환해서 그려보는 것 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하다.
이렇듯 장엄하게 끝없이 펼쳐진 자연앞에 서면 비로소 아 내가 그저 자연의 작은 일부구나 . 띠끌처럼 가볍게 살다 죽는 그저 작은 생명체에 불과하구나. 돌아가신 이문구 샘은 자연앞에서 우뚝 몇백년을 살고 있는 나무가 부러워서 너는 오래 살아서 좋겠다 라며 인생의 유한성을 빚대 부러움과 시샘을 드러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덥잖은 일상의 작은 일에 나는 얼마나 끄달리며 이리저리 엎어지고 무너지고 하는지. 그게 인생이겠지.



언젠가 동료가 그런말을 했었다. “나는 기계와 상대하고 싶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말없는 기계와 상대하면 이런 감정노동은 안해도 되지않아?”
고개를 주억거리며 십분 이해해요. 저도 그래요. 이렇게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위로했던 기억이 난다. 출처는 분명치 않지만 플라톤의 문장으로 알려진” 친절하라. 당신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으니. Be kind. For everyone you meet is fighting a hard battle.” 친절과 환대가 수없이 다른 자아들로 구성된 사람들을 만나는 최선의 인간대응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순간 부딪치는 서로 다른 언어와 행동이 낳는 몰이해와 불일치, 그로인한 상처입음은 늘 우리를 쫄개하고 도망가게 한것이 사실이다. 말이 없는 자연의 품이 그래서 어쩜 우리에게 큰 위안과 휴식이 되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