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힘을 믿는다

요즘 수영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일단 아침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좋고 나이 들어 무릎관절과 허리와 등이 아파오는데 물속에서 부드럽게 풀 수 있어서 좋고 새로 배운 영법을 하나하나 익히는 재미가 솔솔 하다. 수영장에서 비록 나이 들어 허리는 구부정하고 몸놀림은 느리지만 여전히 수영을 하시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늙어가야지 하는 안도감을 덤으로 느끼는 것도 나한텐 즐겁다. 직업인으로 항상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제시간에 해 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수영을 배우는 것에도 반영이 됐는지 나도 모르게 열심히 연습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같은 레인에 있는 수영동료가 ‘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천천히 하세요. 운동삼아.’ 이렇게 지적해 주는데 ‘ 그냥 잘 배워두면 몸이 덜 힘들 수 있어서 그래요’라고 답변을 하면서도 아 그렇지 나는 이것마저도 과제를 하듯 하고 있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느릿느릿 느긋하게 하는 게 필요한데 아직은 잘 안 되네 라는 마음과 함께 또 한편으론 그냥 다 자신의 방식이 있는데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좀 봐주고 말을 아껴주면 안 되나 라는 마음도 들었다. 날마다 조금씩 배우고 성찰한다. 수년 전 우리 집에 왔던 조선난 <?>이 드디어 꽃을 요 며칠사이 피웠다. 너무 대견스럽고 그간 잎이 타들어가서 이제 밖에 내보내야 하나 고민했던 나의 조바심이 좀 미안하게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저 아이는 천천히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의 속도로 느릿느릿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가을은 여름의 무더위를 견디는 시간을 보내고서야 마침내 오는 것. 봉화산 둘레 길에 벌써 밤송이들이 땅에 떨어져 있다. 알밤을 찾아서 이리저리 밤송이를 헤집고 다니는 산책가들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나오면서 가을을 알리는 첨병 같아서 너무 반가운 것이다. 아 너는 이렇게 무더위 속에서 알밤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언제 오나 처서를 보낸 다음 날부터 더위가 조금씩 물러나고 찬바람이 느껴지는 가을이 어느새 곁에 와 있었구나.

넷플리스 드라마 빨강머리 앤 에서 앤은 마릴라와 메쉬와 언쟁이 있어 짜증이 나거나 학교에서 친구들의 고약한 냉대와 모멸적인 장난을 견디다 못해 뛰쳐나오거나, 자신의 성마른 성격을 견딜 수 없어 숨 고르기를 할 때 널빤지를 덧대 만든 작은 오두막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다른 자신의 상상적 자아를 불러들여 얘기를 나누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곤 한다. 그녀만의 퀘렌시아, 자기만의 방이면서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어 괴롭힘을 당하고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힘들어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에게 다가가 친구가 돼주고 그를 그녀의 오두막에 초대해 자신이 좋아하는 조각을 마음껏 하도록 공간을 내어준다. 진정한 위로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공간. 현대인들에겐 특히 아파트라는 평평한 갇힌 공간에서 사는 이들에게 앤의 오두막 같은 공간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때로는 카페가 그리고 영화관이 동네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의 둘레길을 오르는 것도 그런 욕구 때문일 것이다. 나의 퀘렌시아. 봉화산 둘레길 약수터 오르는 길섶에 놓인 벤치. 울울창창하지는 않지만 멀리서 피톤치드 향이 은은히 공기 속에 맴돌고 때죽나무 꽃이 필 때는 꽃 향이 그윽해서 황홀하게 한다. 그래서 행복하다.

순천에 순천만 갈대밭과 갈대숲 그리고 국가정원이 있다는 것이 순천에 사는 나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고 자랑인 것 같다. 도시는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앞으로도 개발이익과 부수적인 부동산 관련 이익을 노린 개발만능주의와 이에 편승한 부동산 투기 세력에 의해 늘 공사 중이고 자연은 본 태없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있는 지라 그나마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개발제한구역인 순천만과 국가정원 그리고 호수공원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가끔은 휴식처럼 찾아가는 국가정원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샛강처럼 유유히 흐르는 개울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되었겠지만 자연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한 흔적이 느껴지는 이 공간이 너무 좋아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보니 잉어인지 송어인지 웅덩이거리며 지느러미를 양껏 치켜들며 헤엄을 치는 물고기도 보이는 것이다. 너무 사랑스럽고 황홀해서 아 이곳은 내 장소야. 나의 또 다른 퀘렌시아야 이러면서 눈도장을 찍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