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 개미마을 그리고 인왕산

숨그네 2022. 12. 23. 16:08

진작부터 오고 싶었던 개미마을을 걷는다. 세검정로 4길. 홍제천이 흐르는 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금세 개미마을버스가 다니는 인왕산 들머리에 있는 개미마을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겹다. 그리고 아파트로 재개발되어 성형수술한 미인들처럼 표정을 잃어버린 도시인들의 거주지에 허름하지만 살림살이 냄새가 가득한 옛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산그늘아래 엎드려있는 풍경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어린 왕자가 벽화처럼 그려져 있다. 어린 왕자가 머무르면서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은 아마 이런 마을일 것이다. 사람들의 이쁜 마음들이 모여 가난한 동네의 살풍경한 벽에 따뜻함을 새겨 넣었다.


봉지커피 500원. 그리고 라면을 파는 동네슈퍼. 겨울이라 한참 김장을 하는 동네 아줌마들이 시끌벅적하니 웃음을 주고받으며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땀방울로 김장을 하는 슈퍼를 삐죽이 내다본다. 나도 거들면서 김치 한 사발을 얻어 가고 싶었다. 초로의 주인장에게 천 원을 주고 봉지커피를 주문했는데 기어이 오백 원을 남겨준다.

내가 살던 완도에서도 언덕배기 마을에 함석지붕이나 천을 잇대어 지붕을 만든 집들이 있었다. 비탈길에 있는 집들이라 학교를 오가며 올려다보곤 했다. 때론 가난해서 부엌살림이 밖에까지 나와 있고 악다구니가 골목을 험상궂게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곳의 풍경들이 어린 내 유년시절의 내면풍경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터라 빌딩숲으로 얼굴이 사라진 아파트 생활자로서 언제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곳과 같은 풍경이 늘 그립고 정겹다.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 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 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명이 쓸쓸한 재로 남는 것이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에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서대문 7번 버스 승강장. 얼마 전 티브이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온 7번 버스 아저씨는 개미마을에 사시는 모든 분들과 그들이 사는 집안 살림살이를 모두 외우고 있는 듯 해 나를 비롯한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훈훈함이 나를 이곳에 오게 했을 것이다. 옆집에 사는 사람들을 모르는 것을 넘어 의심하면서 사는 살벌한 아파트문화권에서는 알 수도 없고 경험되지도 않는 잃어버린 공동체 문화가 이곳에 있다니… 그립고 그리운 것들이다. 이곳은 자원봉사자들이 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왕산 둘레길을 아무 불편 없이 쉬엄쉬엄 걷다 보니 인왕산으로 오르는 안내판이 있다. 무악제 구름다리 쪽으로 가다 보면 바로 인왕산으로 곧장 오르는 길이 나온다.

개미마을에서 인왕산 정상에 오르는대는 두어 시간이면 충분하다. 가파르지도 않고 군데군데 힘든 코스에는 고맙게도 데크가 놓여있어서 힘들지 않게 갈 수 있다. 인왕산 정상에 오르면 청와대와 경복궁을 감싸고 있는 북악산 줄기를 볼 수 있고 북악산과 북한산을 잇는 한양도성길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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