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이라는 육십의 나이를 코 앞에 두고 읽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어떤 의미로 읽히는 것일까. 1919년 발간된 초판본 표지를 달고 헤세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여 출판사 더 스토리에서 새롭게 단장해 나온 데미안을 독서모임 회원들과 함께 읽었다.
20대 초에 읽었던 데미안의 스토리는 가물가물. 기억되는 것은 대표적인 데미안의 문구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데미안과 아프락사스는 젊은 시절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선 젊은이들의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무언가 신성하고 의미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사명감과 지적인 갈망을 갖게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누구이며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시절, 데미안은 이상적인 대자아를 보여주는 매개였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 그리고 저마다 삶은 자시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다. 시도하는 길이자. 좁고 긴 길이다. 지금도 누구도 완전하고 온전하게 자시 자신에 이른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누구나 그 길의 끝까지 가려고 애쓴다. "
신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신을 찾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결국 신을 찾아 가는 여정일 것이다. 일상이 벌여놓은 온갖 부조리와 모순, 불합리와 자가당착 그리고 무기력과 실존의 한계에 부딪히며 매번 절망하고 좌절하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시지프스의 길 위에 서있는 것이다.
우리는 데미안에서 보여준 두세계, 즉 맑고 명확하고 아름답게 정돈된 세계와 양심의 가책과 불안감이 느껴지는 으스스한 세계와 의 경계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세계에서 매일을 산다.
안정된 아버지의 권위를 깨고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악당 크로머와의 재휴는 어쩌면 자신이 깨고나가야 할 세계에 첫 번째 균열을 만들어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두렵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결국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한 하는 과정이 그에게 남긴 생채기, 두려움과 고통, 수치스러움이 그를 결국 데미안에게 이끌게 한 것이다.
선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배타적 적대감은 어쩌면 끊임없이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기동일시와 자기 합리화 그리고 상대편에 대한 악마화를 심화시키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크로머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데미안의 세계에서 갈등하고 두려워하며 분열을 느끼며 이제껏 그가 살았던 안온했던 가족과의 재회를 통한 평화를 꿈꾸기도 한다.
그리고 고백한다. " 지금 난 알고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는 것을"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 ,데미안. 신이 편애하고 축복을 내린 아벨의 세계에서 편안하게 살았던 싱클레어가 강한 자아로 신의 저주를 받은 카인의 표식을 가진 데미안의 세계에 들어가는 과정은 또 다른 자아를 찾아 나서는 험난한 과정인 것이다.
데미안이 십자가에 못박힌 두 도둑이야기를 다른 각도로 해석하자 싱클레어는 그저 구약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아무 의심도 없이 신의 말씀으로만 해석해 온 자신의 지적 나태함에 놀란다. 즉 천사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회개한 도둑보다 오히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벌을 받는 쪽을 택한 도둑이 더 나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책임지며 사는 것은 어쩌면 자아의 성장 정도와 상관없이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의무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신을 모든 생명이 근원이라고 찬양하면서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을 아예 묵살하거나 악마적으로 단죄하려는 것은 이율배반임을 듣게 된다. 신성하고 공인된 신의 세계와 금지된 악마의 세계, 밝은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두루 알아야 진정한 자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데미안의 해석은 싱클레어에게 충격적이고 위협적이지만 싱클레어는 깨닫는다.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가 인간의 문제고 모든 삶과 생각의 근원이 되는 문제라는 인식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멀어지는 것은 죄악이야. 사람은 거북이처럼 제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지 않으면 안 돼."
데미안과 헤어져 있는 동안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아프락사스라는 존재를 탐구하게 된다. 아브락사스는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두 세계의 접점에 있는 존재다. 아브락사스가 곧 싱클레어라는 것.
더 나아가 싱클레어는 음울한 은둔자이자 음악가인 피스토리우스를 만난다. 그의 내면의 성향들을 강화하고 확신시켜 주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는 아프락사스에 대해 좀 더 내밀하게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한발 더 다가간다.
" 우리의 영혼은 인류의 영혼 속에 존재했던 진화의 계보를 지녔어. 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신과 악마는 그리스인에게 있었던 중국인에게 있었던 아프리카 졸루족에 있었던, 모든 잠재적 가능성으로서 , 소망으로서, 대안으로써 우리 안에 남아 있어. 만일 인류가 적당히 재능은 있지만 교육은 전혀 받지 못한 아이 한 명만 남기고 멸망해 버린다 해도 이아이가 이전 인류의 진화 과정을 재별견할 거야 신들과 악마들 낙원들, 계율과 금기 등 모든 것을"
하지만 그의 만남을 통해 싱클레어는 또다른 깨달음에 이른다. 마치 모든 사람이 부모님과 그들의 세계, 유년시절의 빛나는 세계와 맹렬히 싸워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거의 눈치채지 못하게 떨어져 낯설어지는 것처럼 그와의 조우는 서서히 반감으로 번져간다. 그의 비밀의식과 종교형태와 의식들이 "너무 곰팡내가 난 것이다. 그는 퇴보적인 탐구자였고 결국은 낭만주의자였던 것이다. 결국 그의 역할은 싱클레어가 자기 내면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지 전대미문의 신을 제시하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각성된 인간에게 부여된 의무는 단 한 가지,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에서 견고해져서 그 길이 어디에 닿아 있든 간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길을 더듬어가는 일, 그 이외의 다른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제 운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은 사람에겐 이미 동류란 없지. 그는 아주 고독하고 주변에는 싸늘한 시선의 공간밖에는 없지."
음울한 음악가 와의 결별후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다시 조우한다. 그를 통해 유럽의 정신과 시대의 징표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유와 사랑이 보이지 않는 연대는 그저 공포심과 불안감 그리고 당혹감에서 탄생한 것이지 진정한 연대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몰랐을 때 생기는 두려움으로 갖게 되는 연대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 데미안은 한 사람을 죽이는 데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하는지는 정확히 알지만 신에게 기도하는 법은 단 한 시간 만이라도 행복해질 방법은 전혀 모르는 법은 그저 불안에 차서 모여든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다고 설파한다.
데미안이 말하는 연대의 진정성은 자유와 사랑에 기반한 자신을 깨달은 자들의 연대일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난 잠깐 멈찟한다. 자유와 사랑은 또 얼마나 관념적인가. 결국 자유와 사랑은 연대하는 목적의 순수성과 당위성에 기반하는 것은 아닐까. 목적의 순수성을 담보하는 것은 결국 불의와 부정의에 맞서는 정치적인 올바름을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어찌 보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자유에는 피냄새가 묻어있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대의에 함께하는 연대는 개인의 자유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데미안의 깨달음은 이렇다. " 과거의 자유와 행복을 찾으면서 현재 책임져야 할 일이나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불안감을 회피하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는 부패했다. 세상에는 이 대학생들이 멍청함보다 훨씬 더 멍청하고 나쁜 수백 가지의 다른 멍청함이 있다고. "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와 피스토리우스를 넘어서 성숙하고 따뜻하며 굳건한 시간과 나이를 초월해 영혼의 힘이 넘치는 아름답고 품위있는 여성, 데미안의 엄마이자 이상적인 여인인 에바부인을 결국 만난다.
에바부인을 통한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간 것이다. 그이 말대로 그곳은 사랑과 영혼,그리고 꿈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그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아니라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으며 단지 다수의 사람들과 경계선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선의 차이'에 따라 분리되었으며 그들의 사명은 이 세계에 한 개의 섬,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인류란 유지되고 보호받아야 할 완성된 존재였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머나먼 목표, 아무도 그 모습을 모르고 어디에도 그 법칙이 적혀있지 않은 그런 아득한 미래.
과연 그들이 말한 완전히 자신 자신이 되고 , 자기의 내부에서 작요하는 자연의 의지에 뒤따르며, 불확실한 미래가 초래할지도 모르는 온갖 일에 스스로 준비를 갖추도록 순수하게 살아가는 것만을 유일한 의무로, 운명으로 느끼는 그런 공동체의 실현이 가능한가. 그들은 현대의 붕괴를 예감하고 있다. 그리고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개체들이 종족 보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소 관념적인 이야기지만 자신의 내면의 세계뿐만아니라 자아의 확장으로서 외부세계와의 연결점, 확장을 통해 선한 의지의 승리를 이끌어 인류의 존속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전쟁참전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전쟁을 통한 선한 의지의 관철이 가능한가. 현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가.
전쟁의 잔혹함을 해석하고 그 전쟁이 왜 발생했는지 그리고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불가역적인 것인지 현실적인 고민들을 더 많이 담을 수 없었을까.
40의 나이에 이른 헤세의 문학적 이상을 집대성한 작품이 데미안이라고 했다.이후 그는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헤세의 자서전적인 이야기로 구성된 데미안은 영적인 삶과 현실적인 삶을 끊임없는 자아의 탐구를 통해 결합하고자 했던 그의 작가의식이 녹아있는 성장소설이다. 헤세는 인간이 가진 실존의 한계를 영적인 자아성장과 탐구를 통해 극복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육십을 바라보고 있지만 젊었을 때 느꼈던 정신적인 혼란과 현실과의 불화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은 아직도 여전하다. 한 가지 이상적인 돛대를 높이 치켜세운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수렴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인생은 오리무중이고 만족할 만한 답이 주어지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언제나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다.
헤세의 시를 적어본다.
기도
하느님 저를 절망하게 하소서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소서
방황하며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시고
온갖 고뇌의 불꽃을 핦게 하소서
모든 모욕을 겪게 하시고
꿋꿋이 서 있길 돕지 마시고
뻗어나가는 거도 돕지 마소서
그러나 내가 송두리체 부서지는 날
그 때만 보여주소서
당신께서 그리 하셨다는 것을
당신께서 슬픔의 불꽃과 고뇌를 주셨다는 것을
기끼어 죽어
미련없이 흙 속에 썩어가려 하나
저는 오직 당신의 품속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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