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미국에서 제2물결 페미니즘을 주도했던 레디컬 페미니스트였던 비비안 고딕.그녀의 두 번째 책이 내게 왔다. 어머니와의 애증의 관계를 적나라하고 날카롭게 풀어낸 << 사나운 애칙>>이후 두 번째로 읽게 된 고딕의 책.
기대했던 것처럼 비비안 고딕은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같이 느끼고 있는 관계에서 오는 소외감. 고립, 그리고 외로움을 아주 적절하고 육체적인 촉감을 가진 언어로 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고딕의 목소리는 하나의 이상을 향한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라기보다는 조금 더 내밀하게 두근거리는 목소리에 가깝다. 그 목소리는 흔들리고 또 흔들리면서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진동하고 궁금해하고 기대하며 손을 내밀고 실망하고 실패하고 받아들이고 또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는 외로움에 절절 매지만 주저앉지 않고 계속해서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으로 바쁘게 거리로 걸어 나간다. 외로움, 단절, 소통 불능 상태 같은 영혼을 죽이는 사소한 일들의 관행을 묵묵히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건드리며 “왜”를 외친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많이 위로받고 공감했던 부분을 옮겨본다.
1.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오늘 하루 나를 스쳐 간 사람들이 이제 나와 함께 방 안에 있다. 그들은 친구가, 거대한 친구들의 집단이 되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아는 달른 누군가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 준다. 그들은 내게 서사적인 충동을 되돌려준다. 내겐 그들이 필요하다. 33번가의 원시 부족민이, 버스에서 만난 거트루드 스타인이 은행에서 본 인조인간이 내게는 필요하다. 깨끗한 공기와 안전거리, 낮은 세금 보다 그들이 훨씬 필요하다.
당장 나와 이해관계가 없지만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자신만의 삶을 연출하고 사는 이들의 공연이 있기에 이 세상은 살만한 것이다.
2.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은 일이 아니었다. 매일의 ‘고생스러운 노력’이었다. 날마다 노력하는 일은 내게 일종의 연결이 되었다. 연결되는 감각이란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강해진 나는 내가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자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생각을 할 때 나는 덜 외로워졌다.
페미니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로맨스가 아니라 힘겨운 진실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힘겨운 진실을 추구한다.
불안과 권태와 우울이 나를 압도하면 , 그것들은 나를 지워버리고 나는 잊는다. ‘영혼의 노예상태란 일종의 기억상실이어서 우리가 아는 것을 붙잡지 못하게 만드낟. 아는 것을 붙잡지 못하면 우리는 경험을 받아들일 수없다. 그리고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변화가 없으면 우리 자신 안에 있던 연결은 끊어져버린다.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이기에 삶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끝없이 기억하는 연속이다.
3. 나는 경험이 너무도 부족한 수영선수였다.
로더, 그녀의 수척하기 짝이 없는 우아람이 사람을 꿰뚫어 보는 푸른 눈이 그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배어있는 기이한 굶주림이.
나는 이제 온전한 경청을 얻었다.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서둘러 말할 필요가 없었다. 충분히 생각한 다음에 말해도 괜찮았다.
절망, 권태, 외로움. 그것들은 로더에게 이렇게 번역되었다. “ 인류의 운은 다했고, 인간들은 스스로 파멸하겠지만, 그래도 계속 헤엄을 쳐야 해.”
내가 하고 있던 이야기는 언제나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결코 로더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고 그의 전체를 바라본 적도 없었다. 나는 필요할 때마다 그를 이용해 왔다. 로더는 내 우울이었다. 내 내면의 분열, 나를 아래쪽으로 끌어당기는 힘. 내가 가장 조금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
4. 영혼을 죽이는 사소한 일들
때론 말들은 우리에게 서로를 열어주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닫아걸게 만들었고, 멍하고 의기소침한 감정을 남겨둔다.
나를 유독 괴롭히는 것은 침묵이다. 그것은 피부 밑으로 가라앉고, 뼈를 짓누르고 귓속에 압력을 생겨나게 하며, 윙윙거리는 소리로 돌아온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는 일상적 용도로 쓰이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기 이해서가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한다.
아무도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다. 다들 자신의 비참한 자아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 사람은 왜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지?
반응의 부재는 내 삶에서 하나의 존재로 변했다. 이 존재에서는 고립의 감각이 흘러나왔고 그 감각은 점점 더 꾸준하게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그 스며듦에서 하나의 진공상태가 만들어졌다. 그 진공 상태 속에서 나는 외로움뿐만 아니라 내가 단절되었음을 , 피해야 할 인간 본연의 상태가 됐음을 느꼈다.
내가 하는 말들에 반응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욱 할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더욱 할 말이 많아졌기에 나 자신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쉽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을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그럴 때 우리는 결핍과 함께하게 되는데, 그건 어째선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결핍은 가장 나쯘 방식으로 우리가 정말로 혼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무기력은 일종의 침묵이다. 침묵은 공허함이 된다. 사람은 공허함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그 압박감은 끔찍하고, 사실 참기 힘들며, 견뎌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압박감을 견디다 보면 사람은 폭발하거나 무뎌지고 만다. 무뎌진다는 것은 슬픔 속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5.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이다.
카페문화가 번창할 때 말하기는 유연한 지성을 공유하는 행위가 되며, 그 지성은 대화하고픈 욕구를 ㄹ더욱 커지게 한다. 그럴 때 적절한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좋은 문장을 만들게 되고 좋은 문장을 만드는 사람은 탁월한 문장을 만들게 된다. 온 쌍 사람들이 편지를 쓰는 시대에는 내면의 고요함에 다가가고, 한 시간 동안의 일을 말하고, 이야기하는 내면의 삶을 계속 살아 있도록 유지한 일이 어렵지 않다. 편지 쓰기가 고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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