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단 한사람 , 그리고 봄 을 읽다

숨그네 2023. 12. 12. 15:05

 
<단 한 사람-최진영 장편소설>
 
삶과 죽음을 매 순간 겪으며 사는 우리에게 어쩜 천년 그 이상을 살 수 있는 나무는 불가해한 신성함과 두려움 그리고 경이로움을 넘어 원시적인 힘과 초월적인 신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 최진영의 최근 소설 "단 한 사람"을 읽었다. 
프롤로그 "나무로부터'에서 작가는 작품서사의 첫 단추를 이렇게 꾀고 있다. 
 
" 다음 해 봄. 두 나무는 정지했다. 죽음을 흉내 내는 방법으로 죽음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듯, 짚푸르고 무성한 잎을, 생명을 뽐내는 꽃을 , 삶을 터트리는 열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나무처럼 , 태풍이 구겨버릴 삶은 거기 없는 것처럼, 그들은 죽은 듯이 살기로 했다. 더는 자라지 않고 그대로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빛은 달콤했다. 숲의 모든 존재가 삶을 내뿜었다. 죽은 존재조차 삶에 조력했다. --- 그들은 삶을 거부하는 서로를 지켜볼 수없었다. 하나의 나무가 폭발하듯 흰 꽃을 피우자 맞은편 나무도 그렇ㄱ 했다. 그들의 뿌리는 엉켜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몰두할 수없었다. "
 
생의 의지를 무찌르듯 외부에서 오는 힘으로 생명을 위협받고 삶의 터가 황폐해지고 더 나아가 생명이 끝나 황망한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들을 마주할 때 우린 속수무책으로 힘없이 주저앉거나 자기부정을 하듯 현실을 외면하고 쥐 죽은 듯 재난을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무기력하게 모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명은 흰꽃이 메마른 가지에서 폭발하며 발화하듯이 죽음이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일지라도 우리를 생명의 우듬지로 밀어 올리며 살아가게 한다. 즉 죽음에 몰두할 수 없게 한다. 이 무슨 허망한 패러독스인가. 그래서 삶이고 죽음인가. 
작중 장미수와 신복일은 결속하여 다섯 사람을 낳았고 그들 자식 중 목화와 목수는 쌍둥이다.  목화는 "나무"의 신묘한 부름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 있는 이들 중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는 초월적인 힘을 부여받는다. 그 와중에 금화라는 언니의 기이한 나무와 관련된 실종이 있다. 금화의 사라짐은 모든 이들에게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재회의 기약 없는 희망을 갖게 하고 그들의 삶에 무의식적으로 살아 숨 쉬는 존재로 남아있다. 마치 삶과 죽음이 맞대어 있는 것처럼 상실과 사라짐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내는 신묘한 재생의 힘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마치 자신을 내어주고 다른 이들의 삶을 살게 하는 이타적인 신처럼 목화를 통해 무의지적인 힘에 의해 무작위의 인간을 구해내는 주술적인 힘을 목화는 절체절명의 힘으로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목화의 "단 한 사람"을 구해내는 신묘한 힘은 목화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엄마 장미수 그리고 장미수의 엄마 임천자로 이어진다. 목화는 단 한 사람을 구해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과연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로 하고 분투하지만 장미수는 본인에게 부여된 불가항력의 살리는 힘을 견뎌내기 힘들어 때론 그 힘의 원천이라 믿은 엄마 임천자를 증오하고  엄마와 불화한다. 딸의 증오를 오롯이 받아내며 그 증오를 이해하고 연민하는 임천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살림의 힘을 마치 불가해한 신이 자신을 도구삼아 그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처럼 불가항력으로 받아들인다. 
목화는 꿈이 아닌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과 같은 "명령하는 목소리"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보이는 존재였으나 영영 보이지 않는 존재가 돼버린 금화언니가 아닐까 생각하며 부름에 응답한다. 
전부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단 한 사람이어야 하나.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 그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것이라며 자기를 소환한 목소리에 저항하고 원망하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사는 목화의 엄마 장미수.  신에게 질문하지 않고 그 존재를 알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저 두려움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임천자 할머니와 달리 3세대 목화는 알아내고 통과하고 증명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고 자신에게 주어진 살림의 힘을 받아들인다. 그가 살린 단 한 사람이 인간의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절대 살려서는 안 될 사람일지라도.
나는 이 대목에서 약간 주춤거린다. 모든 인간이 같은 목숨을 부여받았지만 그들이 선한 의지로 모두 살지는 않지 않은가.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게 무차별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정신적인 가해와 혐오로 다른 이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이들도 있고 그 반대로 자신의 사익추구를 접고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목숨값이 똑같단 말인가. 살리는 "단 한 사람"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작가의 평범한 한 명들일뿐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불의가 넘치는 이 세상에 평범한  한 명들?...
금화는 "만일 신이 나타나 우주의 기원을 알려준다면 신뢰하지 못할 것이지만 만약 신이 나타나 사라진 금화에 대해 말한다면 그 어떤 말이라도 믿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신이 자진한 것이 아니라 목화의 기도가 신을 호출했으므로 무든말이든 기꺼이 믿을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고..."
자신의 자유의지로 신을 호출하고 그 신의 응답을 받아낸다면 그 신을 믿을 수 있다고?......
완전한 사람은 어떤 이일까. 임천자는 "지금을 기다렸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긴 삶을 마감한다. 그는 거짓된 화해와 연민, 그리고 이해를 바라지 않고 딸 장미수가 계속 원망하고 미워하길 바랐다. 딸에게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장미수에 대한 엄마 임천자의 사랑이었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신이 있을 것이다. 영혼을 갉아먹는 미움이나 냉소 혹은 절대 체념이나 허무만이 아닌 힘들더라도 좋을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마음이 어쩜 신이 있다면 최소한의 인간과 신의 소통이 아닐까. 
 
<그리고 봄-조선희 장편소설>
 
" 대통령선거 이후 1년 상실과 혐오로 해체 되었던 4인 4각 가정사 봉합기
한가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조선희의 소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민첩하게 직진한다. 기다리지 않고 가뿐하게 먼저 달려 나간다. 그 뜀박질에서 지키고 싶은 믿음을 본다" -이기호 (소설가)
 
내 일상에서 지상파 뉴스보기와 드라마 보기가 사라져 버렸다. 치유되지 않은 외상처럼  대통령 선거 후 갖게 된 깊게 베인 정신적인 자상은 일상적인 뉴스보기를 멀리하게 했고 마치 자신의 둥지를 그나마 지키고자 애쓰는 상처받은 동물처럼 티브이밖으로 도피했다. 아무 일 없는 듯 시치미 떼는 듯한 낭만적인 로맨스 드라마와  너무 엉망진창인 반지성적인 코미디, 그리고 과소비를 유도하는 홈쇼핑도 너무 짜증 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대신 심각하게 정치적이지 않아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스포츠여자배구중계에 올인하듯 챙겨보며 목매달아 했다.  여기에 갱년기 우울증과 명퇴 후 사회적 관계단절로 오는 외로움이 겹치면서 한동안 정신적인 허기와 공황이 온 것도 사실이다. 애써 무기력을 돌파하기 위해 집정리를 하고 먼지를 뒤집어쓴 장서들을 꺼내 버리고 잠시 외도하듯 여행도 좀 다니고 밀려둔 숙제처럼 쌓여있던 책을 꺼내 읽기도 하고 인생 2부작을 시작하기 위해 동네책방 자영업을 꿈꾸면서 없는 재능도 나누면서 사회적인 삶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 애쓰기도 했다. 지난 2년간. 
처음 대통령 선거 직후 얼마동안은 남편과 지인들의 모임에서 당골메뉴처럼 대화의 소재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심박수를 체크해야 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던 윤석열과 김건희, 국힘의 작태, 극우들의 반지성적인 행태에 대한 울분과 비분강토 그리고 엔딩으로 비참한 패배감과 무기력으로 기승전결 되는 되돌이표가, 언젠가부턴 마치 터부시되는 주제처럼 서로가 눈치껏 피해 가는 폭탄 돌리기 식 정치허무주의가 팽배해져가고 있다고나 할까. 이성적으로 각성해있어야 한다. 성경식으로 말하면 언제 신랑이 올지 모르니 등불을 끄지 말고 밝혀야 한다고 하면서도 넘치는 화로 인해 위병이 도지는 현상 앞에 다들 꺼려하는 화재가 돼버린 듯.
이런 와중에 시의적절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마치 도화지에 선명하게 물감을 풀어 색을 칠해 형상을 갖추어 보여주는 듯한 조선희 씨의 소설을 만났다. 독서모임 회원 모두가 하나같이 시원한 활명수를 마신 듯한 느낌이 든다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수다 떨듯이 들려준다고. 앞길이 막막하던 차에 뭔가 다시 힘을 모을 수 있는 대안을 얻은 것 같다고. 무엇보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동지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했으며 돌파구를 열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그래서 위안이 된다고 했다. 
4인 4각.. 4인 가족. 가족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사는 낯익은 타인들일 수 있다. 완벽한 타인은 상처받으면 등돌릴 수 있다. 타인은 지옥이라 했던가. 아니다. 타인은 지옥이라기보다 다른 세상에 속한 이방인들이다. 내 존재에 깊게 들어와 걷어낼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서로 불편할 수 있지만 불구적인 관계는 아니다. 다시 말해 너무 많이 알고 너무 깊숙이 알기 때문에 도려낼 수 없는 불가피한 동거인이 가족이다. 끝없이 회귀되는 슬픔과 아픔의 도가니. 하지만 우리는 그 구유에서 함께 엄마의 젖을 먹고살았지 않은가. 그게 가족비극의 원천이기도 하다. 
가족사는 가족의 경제사회적 위치와 사회계급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어떤 동시대적인 역사적인 맥락을 갖고 있을 경우 비슷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가족내적인 서사는 여느 가족과 다르지 않은 부분들로 구성된다. 
이 소설은 4계절로 각기 색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를 엮으면서 종래는 다시 봄으로 돌아와 뭔가 새롭게 시작될 것 같은 얕은 희망을 엿보게 한다. 
 
봄/ 정희의 이야기
정희는 결혼기념일에 가족모임을 가지면서 뭔가 지리멸렬한 이유로 해제됐던 4인 가족의 재결합을 자축하는 세리머니를 하고 싶어 한다. 가족 간의 유대를 재건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 끝에 선물이 아닌 서로에 대한 사과를 준비해 보기로 한다. "과거사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하면서 부모자식 관계의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자는 거지"
자신도 신문기자로 악전고투하면서 자아실현에 바빠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사과하고 싶어 한다. 남편은 무엇에 대한 사과일까. 남편은 평생 인문학자로 살면서 책과 동거동락한 터라 책을 읽지 않고 가짜뉴스에 넘어가고 밴드 하면서 이상한 아이들과 휩쓸리는 거 아닌가라는 의심에 아이에게 핸드폰을 던진 것을 사과해야 한다고 정희는 생각한다. 아빠와 엇박자 춤을 추는 아들 동민. 사실 그는 만화를 좋아하고 게임에 빠져 가끔 공부를 접기도 하고 군제대 후 복학해서 밴드를 시작할 무렵 극우사이트에서 뱉어내는 근거 없는 극혐발언과 진보세력에 대한 종북세력론을 팩트체크 없이 지성적이고 진보적 사회참여활동에 투신해 온 부모님들 앞에 진열하다 결국 핸드폰 투척사건의 피해자가 된다. 급기야 아들 동민은 독립선언을 하며 기타를 메고 집을 나간다. 방황하는 아들과 좀체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라 할 정도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는 남편사이에서 눈치를 봐온 정희는 둘을 화해시킬 요량으로 4인가족의 식탁을 마련하지만 쉽지는 않다. 그리고 딸은 결혼발표에 국제결혼에 커밍아웃을 선언한다. 딸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 박수까지는 보내지 못하지만 보수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가족주의에 함몰돼있지도 않은 정희부부는 그래도 딸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하지만 사실 딸이 세금고지서를 들이미는 국세청처럼 모든 걸 결정한 다음에 통고하는 것 같은 태도에 마음을 상하고 만다. 정희도 동성 간의 결혼에 호의적이진 않지만 딸의 선택이 오류이기를 잘못된 만남이기를 내색은 하지 않으면서 은근히 기대한다. 그것이 기만적인 소시민적인 양심일지라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에 그에 대한 사회적인 반감과 혐오 그리고 차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보통의 한국 엄마이기에 정희가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정희는 우리들처럼 실명으로 나오는 윤과 건희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서 정치이야기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결국 기승전정치이야기로 친구들 모임에서 울분을 터트린다. 
20대의 딸 정희는 보통의 20대 청년들처럼  비정치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유튜브에서 재미나는 영상으로 충분히 재미나고 신나게 여가생활을 보낼 수 있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으며 자신이 선택한 기호와 사랑법에 맞춰 행복하게 살 준비가 돼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근현대정치사의 굵직한 일들을 겪으며 청춘을 보낸 50대 정희 세대는 극히 정치적이고 정치적이지 않은 일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완벽자신하며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거의 죄악처럼 생각한다. 끊임없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하고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문학에 천착하거나 요즘 유행하는 핫한 유튜브 강좌를 듣는다. 그중 정희는 김형민 씨의 포스팅 중 "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한 검증, 그리고 다른 주장에 대한 배타성을 줄이는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에 공감하며 민주주의 훈련 없이 분열과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 식민지와 분단과 전쟁에 이르는 증오의 역사가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독서방장 한샘이 우리 인식 속에 있는 " 인지협착"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여름/하민의 이야기다
하민은 언어교환모임에서 터키 출신 엘리사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간다. 여느 이삼십 대처럼 웹툰에 빠져있고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한 일과 사랑에 헌신한다. 그리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로 편협한 판단과 사고에 빠져있지 않다. 
엄마 정희는  " 최저임금 깎고 노동시간 늘리고 , 노동시간은 출산율로 바로 가는데. 지금도 아이 안 낳으려고 하는데 노동시간 저렇게 늘리면 출산율은 더 떨어져. 한편으로는 출산장려금, 양육수당 줄 테니 애 낳으라고 하면서, 자가당착이지. 추운데 창문 닫을 생각은 안 하고 보일러만 열라  틀어대고 있어. 종합적으로 보면서 가질 않고 일단 지르고 보는 거야. 노동시간 늘리고 최저임금 깎는 거 기업들이 박수치니까. "라고 일갈하며 해도 해도 너무 무능하고 현실감각 정치감각이 전무한 윤석열과 국힘의 정책에 분개를 너머 절망을 느낀다.
하민은 성소수자 그룹에서 후보를 선택할 때 차별금지법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이유로 레지비언의 투표로 심상정에 표를 던진다. 지극히 개별적인 정치적 선택인 것이다. 보수정당에 표를 잃게 한 원인으로 정의당이 합류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변수라고 생각하는 부모세대와 선명하게 차이각을 세우는 대목이다. 
그녀는 당당하게 커밍아웃하고 자신의 파트너와 결혼계획을 발표하기도 하고 2년 휴직을 내고 자비 해외연수형식으로 베를린에서 새로운 삶에 도전을 해 보기로 한다. 그녀의 판단과 행동은 머뭇거림이 없이 가뿐하다. 그리고 부모의 지지와 축복을 절대변수로 두지도 않지만 안하무인격으로 무시하며 돌격하지도 않는다. 당당히 자신의 의사를 밝히고 부모의 이해를 위해 자신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자신이 선택한 부분에 대해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함으로써 부모의 동의와 이해를 받아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때론 진보리버럴하게 살았던 부모님도 자녀세대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녀는 " 엄마, 나를 너무 마이크로 매니징하려고 하지 마. 엄마가 나를 왜 다 안다고 생각해? 나는 내 파트너도 일도 자유롭게 선택해보고 싶어. 내가 사는 나라도, 사회도, 내 맘대로 골라 가져보고 싶어. 여기가 조 ㅁ갑갑해. 사람을 틀에 집어넣으려 하고 고정관념들이 숨 못 쉬게 할 때가 많아. 한국 사회가 좀 피곤해. 혐오스피치가 너무 많아. 내가 앞으로 그걸 견딜..."
부모의  세대에는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야만과 폭력의 시간들이 있었고 자녀세대에는 또 그들만이 더 겪어야만 하는 답답함과 불합리한 시간들이 있다. 하지만 함께 같은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과거가 현재를 살아가는 자녀세대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걸음걸이를 무겁게 하지 않기를 부모는 바라지 않을까. 자녀들은 금세 "곧 부서질 듯한 고치의 느낌"이 들게 만드는 어느새 거인이 아닌 노약자가 돼버린 부모에게 연민의 손을 내민다. 
 
가을/동민의 이야기
동민은 입사 원고 1백 번 쓰고 지쳤을 때 밴드 하자고 꼬시는 94에게 넘어가 통기타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왔다.  마더펀드를 끊고 편의점 알바를 하며 고시원에서 살다 친구와 함께 드디어 다세대 원룸을 얻어 지하를 탈출한다. 동민과 94 미호의 3인조 인디밴드 "카운트다운'은 데뷔무대를 갖기도 전에 어정정하게 슬럼프에 빠진다. 그러나 연애도 깨지고 밴드도 깨지고 무직의 스물여덟 살 청년이 된다. 아무것도 준비된 것도 없고 이루고자 하는 것도 없고 받아주는 곳도 없는 취준생으로 살아가는 동민은 불안하고 마치 자신이 잉여인간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집에서는 과정치적인 부모와 데면데면하고 "아빠는 대통령보다 아들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부모와 거리 두기를 한다. 하지만 동민이 집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 부모는 시끌벅적했던 식탁의 정치토론의 난장판이 거의 정치적 비무장지대로 변해 버렸나 싶을 정도로 평화로워졌다. 이건 정서적 유대를 회복한 다음에 정치적 결속을 다지겠다는 건가. 동민은 의아해한다. 
진보적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동민과 하민. 집안은 정치적으로 평화로웠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할 즈음 하민도 동민도 부모와 다른 레퍼런스를 갖게 됐다. 그리고 소위 일베라는 극우 유투버 동영상을 친구로부터 투척받고 아빠와 논쟁 중에 결국은 아빠의 핸드폰도 함께 투척받게 된다. 동민은 10월 29일 미호가 이태원에 간 것을 미호동생의 인스타에서 알게 된다. 이태원 참사 현장에 미호가 있었다. 
 
겨울/영한이 이야기 
영한은 50대 사회학을 강의하다 점점 인문사회과전체가 시들해지며 사회학과가 경영학과로 통폐합되고 학생들이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강하지 않게 되자 시대변화의 구차함과  수업도중 졸거나 휴대폰을 받는 학생들의 무례함에 지쳐 "돌아온 보따리장수' 신세와 섹스리스 부부생활과 함께 동시다발로 닥쳐온 갱년기 슬럼프를 다스르기 위해 학교에서 조기은퇴하고 친구들과 등산을 하거나 마음훈련을 위해 요가를 하고 남은 시간을 쪼개서 도서관에서 현재를 넘어선 내일을 위한 사회학적 전망을 주제로 책서술에 힘을 쏟는다. 
그가 친구들과 나누는 정치대화중 " 군사정권은 불법인 걸 자기들도 알고 있었지만 검찰정권은 지들이 정의로운 척하잖아. 법을 내걸고 군사정권이 하던 짓을 하니까 문제지. "라는 대목에 공감한다. 
영한이 우선순위를 정해 서재정리를 하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면서 버리려던 책을 다시 책장에 꽂기도 하고 다시 버리기도 하면서 옛날을 반추하는 장면은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서재정리와 많이 닮아 있어 쓸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그이 말대로 " 마르크스, 당신은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이름이자 저주의 이름이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20세기 인류를 반으로 갈라서 싸우게 만들었고, 절대권력과 독재정치가 당신의 이름을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신은 식민침략과 제국주의로 질주하던 자본주의의 악마성에 제동을 걸었다. 당신의 이론과 레닌의 혁명은 역설적이게도 당신들이 추종한 공산주의 세계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대신 반대편의 자본주의 세계를 더 인간답게 만들었다. 이 편히 잠드시라. 당신이 남긴 것을 구원의 도구로 쓰거나 파멸의 장치로 쓰거나는 후대 사람들이 선택할 것이다. 
영한은 아끼던  책중 <베를린 베를린>을 독일 행하는 딸에게 건넨다. 독일인들이 20세기 전반에는 나치의 집단 광증을 앓았고 20세기 후반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세련된 정치제도를 만들어낸 것은 그들이 야만의 바닥까지 처박았다가 가장 높은 수준의 시스템으로 끌어올린 변증법. 그것은 지성의 힘이 내장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우리가 책을 읽는 마지막 세대가 될 거 같아. 요즘 애들은 서재대신 옷방을 만든다고 그러던데.." 
씁쓸하지만 웹소설이나 웹툰을 보니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보는 정도면 지성인이래"
이 대목에서 "에밀시오랑을 읽는 오후"라는 아름다운 에세이를 쓴 장석주 님의 말이 생각나다. 
 
"독서를 꾸준히 유지하면 사람의 뇌는 미묘하게 바뀐다고 한다. 이는 뇌의 가소성이란 특징 때문이다. 독서행위는 뇌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포괄한다. 인지신경학자인 매이런 울프는 지속적인 독서 행위의 결과로 뉴런의 연결망이 슴속수준으로 빠르게 반응하고, 다시 같은 속도로 뇌 구조 전역에 걸쳐 연결이 일어"나는데 특히 전두엽 앞부분의 브로카 연역과 측두엽 부근의 베르니케 영역 같은 언어중추 부분이 집중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독서는 단순히 문자를 해독해서 얻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비판, 성찰, 상상, 공감, 연역, 귀납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더 나아가 나와 세계의 합일과 통섭 능력의 확장을 위한 기획이다. 책을 읽을수록 문해력과 어휘의 가용능력, 창의적 능력이 커지고 아울려 몸에 밴 읽기 습관은 뇌에 생물학적 인지적, 정서적 자국을 주면서 그 지형을 바꾼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들 동민과의 대화에서는 요즘 아이들이 대체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봄.  정희
그렇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개별적인 삶을 살게 되고 서로에게 의지하고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가족주의적 협착관계를 접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어쩜 가족이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관계인 것은 서로 안다고 생각하며 마이크로메니징하려고 하지만 이미 서로는 너무 멀리 있어서 은밀하면서도 직접적인 통제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우린 개별적 존재다. 
정희가 딸의 속내를 읽으면서 한편으론 썰렁하고 착잡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번민과 조바심 한 뭉치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딸과 엄마가 동시에 자유로워지는 순간이었다. 고 고백하는 것처럼.
늙어가는 부부의 관계는 어떠한가. 
누군가는 "노인 됨은 대학살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늙음이 갖는 온유함과 관대함 그리고 삶의 지혜를 육체의 누추함과 질병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 명의 노인이 죽으면 하나의 역사가 지워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기억이 난다. 
잘 기억하고 대대로 이어지는 삶의 역사가 필요한 이유다. 
가까운 사이인 부부끼리 겪는 늙음의 증상을 잘 표현한 대목이 있다. 
" 사람사이의 욕정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동네를 지나가는 마을버스처럼 밭았는데 점점 공항버스처럼 띄엄띄엄해지더니 나중에는 두 사람의 운행시간이 맞아 떨어 지기가 견우와 직녀의 행사처럼 돼버렸다."
오랜만에  서로 마주하는 육체적인 만남도 나이 들어보니 이제 서로의 상태를 연민하며 살피고 배려하는 어쩌면 식었지만 더 온정이 있는 관계로 질적변화를 겪는 것이리라.
남편이 고문의 후유증으로 앓아온 가위눌림을 극복해 보려고 재봉가위를 이불속에 감추면서 지내온 세월을 정희는 묵묵히 기다리며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다. 
" 정치든 스포츠든 게임의 룰이 있는데 저렇게 거칠게 함부로 하면 그 수준이 되돌아오려면 오래 걸릴 텐데 그게 걱정이야.
사람한테 잔인하게 하고 그게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가 되면 곤란한데. 가방끈은 길어지는데 사람들은 상스러워지고...."
작가는 우리 시대의 집단 우울증을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이 소설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로 했다. 
그렇다. 우리의 일상이 정치의 그늘에 있어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같은 불안함과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마음을 나누고 제각기 제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지치지 않고 조금씩 해나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봄은 다시 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