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대에 영국에서 4주간의 영어연수를 마치고 마지막 1주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해 인근 이탈리아 나폴리와 스위스 취리히를 여행하는 일정이 있었다. 그 시절 독일을 이틀정도 짧게 여행했다. 괴테하우스를 방문하고 라인강을 보았다. 둘째 임신중이었고 빠뜻한 정부지원 교사어학 연수를 소화해내느라 너무 지친지라 짜뚜리 여행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건성건성 별다른 감흥없이 했던 것 같다. 그 이후 환갑을 앞두고 친구와 함께 3주간의 독일여행을 준비했다. 비행기표와 숙소예약을 하고 무엇보다 방문할곳을 미리서 체크하면서 몇달을 들떠서 보냈다. 3주간의 여행이라 가족과 헤어져 있어야하는 부담감이 여행의 설레임을 옥죄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 이원복님의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과 독일여행안내책자, 그리고 이은정교수저 <베를린 베를린>을 읽으며 메모를 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관련 정보를 볼 수있으나 나는 나만의 스타일로 여행감성을 갖고 싶었다. 짧게 여행전 메모한 독일과 관련된 정보를 적어본다.
<독일의 역사>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1년 통일될 때 가지 여러 나라로 나뉘었다가 지방분권의 연방국가가 되었다. 민족구성은 소위 게르만 일파인 도이치민족으로 구성되었고 기원전 50년경 로마 카이사르가 갈리아지방을 정복하면서 도이칠란트의 게르마니아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이는 "버림받은 땅"이라는 의미였다. 서기 300년까지 로마제국은 게르만민족을 군인으로 채용했으며 훈족의 침입을 피해 로마제국으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고 476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 인인 장군 오도아게르에 이해 멸망하고 게르만 민족은 유럽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후 프랑크 왕국이 400년간 유럽을 지배하게 되고 845년 베르됭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동쪽의 땅이 오늘날의 도이칠란트의 바탕이 되었다. 이후 오토대제는 도이치민족으로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나라이름을 <신성로마제국>이라 칭하였고 1806년 나폴레옹에 멸망당하기까지 844년 동안 제1 제국은 지속이 된다. 1300년경 300개의 작은 나라로 찢어져있다.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한나라로 통일된다. 1571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가톨릭 교회 구교와 프로테스타트 신교로 분리되었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 와 오스트리아 황제를 겸하고 있었던 합스부르크가 의 지배를 받았고 1618년경 30년 전쟁의 결과로 신교파가 승리해 뮌스터에서 베스트팔렌조약이 체결되고 350개의 연방국가의 주권을 인정하게 된다. 이후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1세가 베를린을 수도로 정하고 프러시아 왕국을 선언한다. 그러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나폴레옹은 프러시아 영토에서 라인강 유역의 16개 주를 떼내어 <라인동맹>을 만들고 보호령으로 만든다. 60년 후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러시아는 1870년 프랑스전쟁에 승리해 나폴레옹을 대패시키고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가 역사상 처음으로 통일을 달성하면서 제2제국이라는 강력한 군국주의를 선포하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스마르크의 제2제국이 멸망하고 1929년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된 틈을 타서 국가사회주의를 내세운 히틀러가 등장 1934년 제3 제국을 선포하고 군국주의로 무장한 나치가 출현한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던 1945년 5월 베를린 지하벙커에서 자살하고 이후 동서독의 분할통치가 승전국인 연합국에 의해 이루어진다.
<독일인의 특성>
독일은 북방민족이었던 게르만민족의 특성상 권위에 대한 복종,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아버지중심의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상대적으로 다른 민족에 비해 강하다. 북쪽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노르만민족의 일족인 게르만은 계급제도와 봉토제도, 장원이 오랫동안 유지해 왔고 이는 여러 지방으로 나뉘어 지방분권의 역사가 긴 독일의 특성이기도 하다.
독일의 직업은 독일인의 "성"에 바탕이 되었다. 베커는 빵 굽는 사람. 슈나이더는 양복쟁이 슈미트는 대장장이, 뮐러는 방앗간주인, 베켄바우어는 항아리 굽는 사람, 바우어는 농사꾼이라는 뜻이란다.
게르만민족이 사용하는 "폰"은 프랑스의 "드"처럼 명망이 높은 사람 앞에 붙이는 존칭이다. 독일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직선적으로 전달하는 경향이 강하고 5분에 끝나는 시청결혼식처럼 간편하고 실속 있는 생활을 선호하고 북부는 신교 남부는 구교의 종교적인 경향이 있다.
독일 하면 떠올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이다.
원래 유대민족은 지금의 이스라엘 팔레스티나 땅에 살던 반유목민족으로 아라비아인과 같은 셈족이다. 이집트 페르시아 침략에 이리저리 쫓겨 다녔던 중동지방의 민족으로 이스라엘에 살다 이집트에 정복되어 노예생활을 하다 모세의 인도하에 출애굽을 하게 다고 고향 팔레스티나에 정착하면서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다. 이후 바빌론, 앗세이아, 로마의 군대에 의해 정복되어 고향을 잃고 유럽으로 떠돌아다니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다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공무원법, 인종차별법, 특별세금징수, 재산강제강탈, 게토지역에 갇혀 살기등 이방인에 대한 제노포비아와 관료주의가 강한 독일인의 민족특성을 이용한 나치의 선동으로 이후 20세기에 가장 잔혹한 인종말살정책을 낳는다. 전후 독일은 나치부역자의 공직 진출을 막고 끝까지 추적하여 처벌하여 평화의지를 선 보이며 1970년 서독수상 <브란트>의 폴란드방문-전쟁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음-과 분단국인 동서독의 상호 주권을 인정하는 평화협정의 체결 그리고 라인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서독정부의 막강한 경제력에 힘을 얻고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으로 인한 소련연방해체등 국제정세의 변화와 <우리가 바로 국민이다>라는 라이프치히에 약 30만 명의 시위인파가 도시를 뒤엎는 시민봉기와 11월 4일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동베를린에 운집한 베를린 봉기로 인해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8년간의 분단국이 1990년 12월 2일 <투 플러스 포 회담>으로 통일이 된다. 이후 ABC( Atomic bomb, Biologic weapon, Chemical weapon) 무기를 포기하고 외국인주둔금지와 외국군대 철수가 완료되면서 진정한 통일국가의 면모가 완성된 것이다.
현재의 독일은 동서독 격차를 파고든 극우들이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독일을 위한 대안이라는 이름의 극우정당을 세우면서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던 나치구호를 외치면서 주의회 선거(튀링겐)에서 1위를 차지하는 이변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옛 동독경제의 격차와 반이민정서, 시리아 난민수용문제등을 선거에 활용하면서 좌우 양극화가 극심한 서구의 선거추세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사회민주당 녹색당과 자유 민주당으로 구성된 독일연방정부, 신호등연정은 크게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사회민주당 소속 총리 울라프 숄츠는 얼마 전 지방선거 패배 후 연정을 해체했다.
<베를린 베를린>
친구와 내가 가장 방문하고 싶은 곳은 베를린. 왜일까. 베를린은 동서독이 승전국에 의해 강제로 분단될 때, 섬처럼 나뉘어 분할되었다가 다시 하나가 된 분단과 통일의 상징이다. 아직도 분단국가에 살면서 온갖 분단이데올로기의 폐해에 시달리며 통일이 요원하기만 한 우리나라의 암울한 환경 때문이리라.
그곳에서 한국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한 이은정교수가 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 그의 책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2차 세계대전 후 4개국 승전연합국에 의해 분할통치된 독일은 독일제국의 수도 베를린이 (원래 소련군에 속했었다) 4대 연합국의 공동 관할 통치지역으로 되는데 남서부는 미국, 동부는 소련, 서부는 영국, 북서부는 프랑스 관할 통치구역으로 나뉜다. 이후 식량난으로 모든 경작가능한 땅을 감자농사를 위해 개간한 서베를린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미소 간의 세력경쟁이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까지 동원되는 일촉즉발의 상황과 서독과 서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한 베를린 봉쇄에서 해제까지 수없이 많은 역사적 경험을 하게 되는 베를린..
냉전시대의 특수지역인 베를린은 동서 진영 대립 속 서독지역은 중부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을 완충시대이자 전략적 요충지 있다. 동베를린은 1949년 10월 7일 건국선언을 하며 동독의 수도가 되고 서베를린은 서독에 완전히 통합된 것도 아니고 자체적 주권국가도 아닌 특별지역이었다.
이후 소련의 흐루초프는 두 개의 독일국가를 수용하고 2차 대전의 잔재를 제거할 것을 서독에 요구하며 서방연합국에 6개월 이내 서베를린주재 병력을 철수하라는 베를린 최후통첩을 보낸다.
이것이 성사되지 않자 동독정부는 동독정부가 발행하는 통행증을 서 베를린 방문 시 제시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동베를린 인들의 서베를린탈출을 막고자 하는 방책이었으며 1961년 8월 13일 서베를린 경계에 철조망을 설치하였고 이는 콘크리트로 대체된다. 그리고 체크포인트 찰리 검문소가 생긴다.
동서베를린이 분할되었을 때 동서 경계로 직장을 다니던 이들이 20만 명이었고 서동독의 마르크가 1:6 비율로 교환되었다고 한다. 임금조정금고가 있어 조정을 하였지만 동독이탈민을 막지는 못하였고 동독거주 서베를린 출퇴근자에 대한 정치적 압박은 갈수로 심해졌다.
1865년에 구축된 지하우편수송관은 총길이 400킬로미터로 90개의 우체국으로 연결되어 총 800만 개의 우편물을 처리하는였는데 2차 세계대전 후 파괴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었고 동서독 간 우편 교류가 지속되었다고 한다. 500년 이상의 오랜 전통을 지닌 문화적 유산인 우편교류는 베를린 장벽의 커다란 구멍 역할을 했다.
그리고 17세기에 시작한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독일 최대 책 박람회로 3월에 개최되곤 했는데 이 또한 장벽의 구멍이었다.
19세기말에 건설된 지하하수통로는 방사형 하수체계로 12개 구역으로 독립된 하수관을 배치 양수장에서 끌어올린 하수를 베를린 외곽 거대 하수 이용 경작지로 방류하는 체계로 하수를 거름으로 이용한다. 아치형 천장의 고딕양식의 예술품인 하수 터널의 길이는 9725킬로미터로 베를린에서 서울까지 가는 비행기보다 더 긴 거리라낟. 원활한 하수관리는 교유 협력, 서독마르크를 벌어들이는 수단이었고 이후 동독은 서베를린과 하수처리협상을 하는 등 쓰레기처리로 마르크를 벌어들였고 하수 터널은 동독 이탈민의 탈출통로가 되기도 했다.
하수터널만이 아니라 지상의 연결망인 대중교통을 살펴보면, 독일은 100년 넘은 도시철도의 역사가 있다. 이것은 S-bahn이다. 1891년 연간 승객수가 3100만 명에 달했고 에른스트 폰 지맨스가 전기운용 전차를 처음 선보이면서 이것이 트램 즉 전차를 발명하게 되었다. 1924년 설립된 독일제국철도에 의해 운영된 도시철도는 나중에 동국 국영기업으로 전환되었다고 독일 철도 주식회사로 흡수된다.
1961년 8월 13일 도시철도가 중단되었고 프리드리히 슈트라세역이 동서를 잇는 플랫폼이었는데 이후 장벽이 생기면서 국경이 되어 이곳에서 출국수속을 받아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이곳을 제외한 많은 역이 베를린 장벽 건설과 함께 유령역이 되었다고 한다.
전후 300명이 넘는 전문인력이 동독에서 방출되었고 동베를린 방문 시 체류허가증을 요구하는 등 제약이 심해지다 1963년 12월 통행증협정이 체결된 후 동베를린으로 시민들이 다시 왕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독의 브란트시장의 <신동방정책>이 동서독을 통합시키는데 빛을 발한다. 그는 평화로운 경쟁을 허용하는 공존정책을 강조하며 공존은 대안이 아닌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기회라고 했다. 즉 장벽을 제거할 수 없다면 장벽을 쉽게 넘나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한 예로 의견 대립이 완전히 해결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협정체결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리적인 기술인 구제조항으로 통행증협정이 다름을 인정하는 협정인 것이다.
베를린 문제의 핵심은 서베를린을 서독의 일부로 인정하고 그들 간의 교통연결, 서베를린 주민의 동베를린 왕래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통과협정으로 서독이 매년 동독에 지급하는 통과일괄금(도로이용로, 세액조정금, 비자발급수수료등)은 동독의 주요 주입원이었다. 1966년 서베를린 주민의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하는 여행방문협정은 신분증만으로 입국을 허가하여 국경검문소에서 비자를 발급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장벽을 넘어서 부는 바람으로 1968년 자유대학교 학생운동은 신좌파지식인을 상징하는 인물인 루디 두치케를 중심으로 권위주의 문화거부, 대안문화정착, 비상사태법거부, 베트남 전쟁, 파시즘을 반대하는 운동으로 일상의 궤도를 가로지르는 대장정을 이끌었으며 특히 1987년 6월 7일 데이비드보위의 서베를린 블란덴부르크 공연은 대장정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공연이었다. 그의 히어로즈 곡에서 "<나는 기억할 수 있어요, 우리가 장벽에 서 있었을 때 우리의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갔지요. 우리는 아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키스했지요. 두려움을 저편에 두었어요 영원히, 우리가 영웅이었으니까요...>
동구공산권의 바르샤바조약기구와 경제공동체 코메론에 통합된 동독은 1970년대 까지 체재 내 지식인들의 지지와 서구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일당독재에 맞선 체재개혁운동이 확산되었고 1989년 라이프치히를 시작으로 동독의 많은 도시에서 진행되었던 거리 촛불행진은 이런 운동의 정점이었고 <우리가 주인이다 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점차 많은 이들이 대사관을 점령하고 동독이탈주민의 행렬은 거세졌다. 이는 1989년 11월 9일 드디어 장벽이 무너지는 대역사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1990년 10월 3일 베를린 제국주의 광장에서 독일 통일 기념식이 열리고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연방의회와 정부부처가 2000년대에 수도 베를린으로 이전되었으며 구동독과 서독지역의 급여가 동일해지기까지 20여 년이 걸렸다.
베를린은 중앙역을 비롯, 유대박물관, 연방의회등 세계적 건물들이 들어선 기억을 품은 도시가 된 것이다.
베를린은 지금도 인구가 증가하고 있고 출생률이 사망률보다 높은 젊은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풍요롭고 섹시하다. 이민자와 난민을 품어주고 주민 세명 중 한 명이 이민자란다. 2015년 시리아 난민 5만 5천 명이 베를린에 도착에 했고 베를린 시민 자원봉사단은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식재료를 모으고 음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2016년 12월 19일 카이저빌헬름 교회 광장 크리스마켓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로 12명이 사망했지만 복수보다는 베를린 시민들은 이웃과 그날을 기억하려고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는 스타트업의 메카로 3천 개의 스타트업과 혁신기술기업이 베를린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고 있는 젊은 도시다.
<10월 3일 서울에서 뮌헨으로>
이른 아침 4시경에 기상해서 남편의 배웅을 받으면서 수 넌역에 도착 5시 20분 열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공항 열차를 이용해 터미널에 도착했다. LH 719편이 연착되어 비행시간이 무려 4시간가량 지연되었다 날씨는 선선하다. 독일은 여기보다 더 추울 것으로 예상되어 트렌치코트와 여벌의 두꺼운 외투와 스웨터를 넣어서 2개의 수케이스와 하나의 배낭을 챙겼다. 나이 때문일까. 설렘보다 두려움과 불안감이 신경을 타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으로 중동지역의 전쟁위기감이 돌고 있는데 이스라엘 이란 영공분쟁으로 비행기가 연착 됐다는 기장의 설명이 있었다. 러시아를 통과하는 영공노선이 변경되었다는 말도 약간 두렵다. 무사히 뮌헨으로 갈 수 있을까. 오늘 이스라엘은 이란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독일과 시차가 7시간. 한국보다 하루가 더 늦게 시작된다고 할까. 비행기에서 지루하지 않게 다운로드된 넥플릭스 영화 두어 편을 보고 쪽잠을 자다 보니 뮌헨에 도착했다. 오후 8시 30분. 짐을 찾아서 지하철을 타고 뮌헨중앙역까지 간다. 10월 옥토버 페스티벌개최로 사람들이 북적인다. 다소 들뜬 도시의 모습이랄까. 두 개의 짐가방을 끌고 가기엔 유럽의 코블스톤길은 너무 덜컹거린다. 다음엔 캐리어하나, 배낭 하나로 여행을 해야 할 것. 반시간을 걸어 숙소( Karlstrase역에서 도보 30분) Buddy에 도착한다. 구굴지도는 역시 괜찮은 여행가이더이다. 이곳에서 4박을 할 예정이다. 바로 앞에 지하철역 (Karlstrase)이 있어 이동성이 좋고 뮌헨여행의 출발지인 카알광장이 바로 코앞. 하지만 옥토버 페스티벌 때문에 방값은 평소보다 2배 이상.. 하루 약 40만 원. 아침식사를 제공되지 않고 대신 리셉션이 있는 홀에 프레첼과 스낵이 무료로 제공된다고 한다.
<10월 4일 뮌헨 메리엔광장과 옥토버축제>
뮌헨은 수도사의 공간이라는 뜻. 뮤니크라고도 불린다. 바이레른의 주도로서 세계 3대 맥주 축제가 열리는 곳. 이자르 강변의 아테내로 알려져 있다.
아침에 간단한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걸어가면서 뮌헨의 전통시장 빅투알리엔에 왔다. 무작정 걸어서 발길 닿는 곳에 잠시 머물며 쉬었다 가는 것 또한 자유여행의 묘미 중 하나인 것 같다. 색다른 과일과 익숙한 과일, 그리고 각종 향신료와 지역특산물인 다양한 치즈, 소시지 그리고 식재료를 푸짐하게 팔고 있다. 우리 전통재래시장처럼 바로 옆에 소박한 식당과 커피숍들이 즐비하다. 샌드위치가게에서 파니니를 사서 먹는다. 사람들의 부산함과 현장감이 마음을 들뜨게 한다. 가는 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늦은 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아침. 어느새 우리는 마리엔광장에 와 있다. 관광객들의 방문 1번지라는 곳. 우선 우람하게 시선을 잡아채는 신시청사 ( Neus Rathaus)와 현재 시의회인 구시청사 (Altes Rathaus)-깔끔하게 차려입은 도시청년 같은 이미지-를 본다. 구 시 청사의 첨탑에서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길래 티켓을 구매해 4층까지 오른다. 구시가지가 한눈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들어온다. 구시청사 바로 옆 해일리그게이스트 교회에 잠시 들러 여행의 첫 촛불을 밝힌다. 오기 전 인영이 보낸 예기치 않은 문자 (엄밀히 이건 문자라기 보단 내용증명서와 같은 법적문서와 같았다)를 보내 놀랜 가슴이 아직도 숨죽여서 팔닥거리고 있다. 구시가지를 걸어서 옥터버페스트가 열리는 테레지엔 공원에 간다. 벌써 축제가 시작됐던 1810년 바이레론 공국 루드비히 1세 때의 바이에른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 (남자는 반바지와 두꺼운 모에 예쁜 수를 놓아 장식을 한 상의, 여자는 여성용 프릴이 달린 치마)이 떠들썩하게 웅성이며 모여든다. 6개의 대표적인 양조장 천막이 축제장에 설치되어 있고 놀이공원을 방불케 하는 온갖 놀이기구가 보인다. 테러방지를 위한 보안조처로 백팩은 디포짓 하고 1리터 맥주잔 (마쓰)에 맥주를 부어 축제분위기를 즐겨보기로 한다. 이른 시간이고 비가 내려서 야외의자가 젖어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맥주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하기에는 아직 아닌 듯. 역시 전통 축제에 온전히 즐기면서 그들과 함께 섞이기는 역부적인 듯. 하지만 옥토버페스트발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알듯하다. 축제가 없는 인류는 지금껏 없어 왔다. 축제야말로 인간들의 화합과 개별자로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질감과 고독감을 없애고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함께 도모할 수 있다는 것, 일과 노동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그저 흥을 내면서 가볍게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아무것에도 구속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 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축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원이다.

뮌헨 빅투알리엔 시장



뮌헨옥토버 페스티벌이 열리는 테레지엔 공원

뮌헨옥토버 페스티벌이 열리는 테레지엔 공원

뮌헨옥토버 페슽티발이 열리는 테레지엔 공원

뮌헨옥토버 페슽티발이 열리는 테레지엔 공원

뮌헨 카를 광장
<10월 5일 다하우집단수용소, 레지던츠궁전>
권력과 진보라는 책을 읽고 있다. 그 책 내용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중세시대 경제의 잉여물 대부분은 도시와 농촌으로 흡수된 것이 아니라 종교교단으로 흡수되어 대성당, 수도원 예배당을 짓는데 들어갔다. 1200년대 프랑스에서는 총산출의 20퍼센트가 종교건축물을 짓는데 쓰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집에 살던 시절에 대성당은 석조건물로 지어졌고 대개 슈터 스타급 건축가가 설계했으며, 어떤 것은 완공까지 몇백 년이 걸렸다. 자발적인 헌금은 일부였고 대부분 농촌인구에게 부가된 세금과 기타 부과금으로 채워졌다.
우리가 방문하는 대부분의 건축물이 왕궁이거나 성당 그리고 교회당이다. 수많은 민초들의 피와 눈물로 건축되었을 아름다운 건축물들. 실제로 지금도 그렇지만 노동을 바친 그들은 그 건축물의 주인이 아니다. 누군가의 잔혹한 노동의 결과물을 향유하는 자들은 언제나 배부른 권력자들이었고 대대손손 그 건축물들을 이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그래서일까, 여행을 하면서 들르는 왕궁과 교회당, 성당의 화려함과 장대함에 눈이 번쩍 뜨이고 감탄을 연발하면서도 왠지 한편으론 씁쓸하다.
다하우까지 가려면 카를 광장에서 도시지하철 S2를 타고 다하우 (Dahau) 역에서 하차해 726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기차로 거꾸로 타는 실수를 두 번이나... 뭐 친절한 청년을 만나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었으니 문제없다. 숙소에서 약 4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는 소도시. 기차에서 내려 교각을 지나는 길은 너무 지저분하고 오물냄새가 풍겨서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이렇게 수많은 방문객이 지나가는 길인데 너무 관리가 안되고 있다는 느낌. 역사적 교육현장이어서 일까. 그룹투어에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 어린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 나이 든 연장자와 여행객들 모두가 숙연한 표정으로 나치의 국사 사회주의자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현장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다.
관람료는 무료. 투어가이드는 시간대가 정해져 있고 머리서 신청해서 유료로 진행된다고 한다.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될 예정. 먼저 <Arbeit macht Frei/ work sets your free: 노동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나치의 그 당시 유대인 집단 수용자들에게 한 문구가 새겨진 중앙통로에 이른다. 먼저 입구의 Memorial Site라는 표지글에 새겨진 것은 이렇다.
"다하우라는 이름의 중요성은 독일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치가 그들의 지배 영역에 설립한 모든 집단수용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하우 유대인 집단 수용소의 입구 양편에는 전시팬스와 7개의 감시타워가 설치되어 있다. 이 펜스를 넘으려다 총살된 수감자가 많았다고.. 사우워실이라 적힌 가스실 그리고 그곳을 가기 전에 있는 대기실, 그리고 화장을 하던 화덕과 교수형집행실, 화장재를 묻어둔 곳과 사형집행실, 수많은 시체를 화장터로 실어 나르던 손수레들, 나중엔 화장에 사용하는 연료가 부족해 집단매장을 했던 곳, 무엇보다 참혹했던 것은 독일의료진이 자행한 생체실험의 사례들을 모아 둔 박물관. 유대인들이 살았던 막사의 위생상태는 티프러스 전염병이 걸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긴장하며 마음에 불을 안고 걷다 보니 실제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미열이 난다. 그나마 독일이 일본과는 달리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행위를 감추거나 왜곡하지 않고 범죄현장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교육의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조치를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그들이 도륙한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단죄의식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상처와 흉터를 남긴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침공과 최근의 레바논 참고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전쟁광들이 여전히 정치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와 오후일정을 시작한다.
뮌헨 레지던치 (Munichiner Residenz);옛 바이에른 왕국의 통치자였던 베텔 스바흐가의 본궁이었고 별궁은 님펜부르크 궁전. 1385년에 처음 북동쪽에 성이 지어졌고 수세기동안 궁전이 확장되었다 한다. 바이에른 왕국의 중심으로서 위용을 높이고 위상을 높이기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과 설계사들을 고용해서 궁을 지었고 온갖 진귀한 보석과 화려한 귀금속,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수집되어 전시되고 있다. 방이 무려 100여 개 다리가 아파서 다 보지도 못할 지경.
처음 본 방은 <안티콰리움> 천장까지 금빛으로 장식된 긴 회랑. 왕과 왕비의 실제 생활공간으로 진열된 침대는 왜 그리도 높았는지 낙상하면 허리골절이 생길 수 있을 듯. 기록에 따르면 알프레히드 5세 공작 ( 1550) 이 고대 유물 컬랙션을 위해 안티콰리움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빌헤름 5세 공작 (1519) 치아에서 공작의 예술고문인 프리드리히 수스트리스는 이 전시상에 화려함을 더하는 장식을 입혔다고.. 비텔스바흐 가문은 1918년까지 바이에른 지역을 통치했고 마지막 바이에른 통치자가 루드비히 3세다. 1918년 11월 초 바이에른 자유국가가 선포되었을 때 거주지에서 추방된다.
긴 하루 일정을 마친 후 아시아 식당인 <다미>에서 생각보다 비싸게 비프누들과 만두를 먹었다. 돌아가서 쉴 곳이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하우 수용소 입구

다하우 수용소 조각작품

다하우 수용소 박물관 조각품


다하우 수용소 유태인 학살터 (소각장)

다하우 수용소 입구




레진던츠 궁전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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