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여행 첫째 날)



체코의 국훈“ 진실은 드러난다.” 얀후스 동상에 새겨진 후스의 이념인 “ 서로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지 말라.”에서 따왔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가.
거의 20여 년 전에 체코에 왔었는데 이번 여행은 두 번째다. 방학이 아닌 시기에 체코 프라하를 여행한다. 이번 여행은 친구와 함께 약 3주에 걸친 여행이다. 체코 프라하와 인근 도시, 그리고 잘츠부르크를 갈 예정이다. 여행일정을 친구와 의논하여 짰고 주요 여행지와 숙박, 그리고 이동경로와 티켓을 미리서 예매하였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현지 교통을 이용할 때 사용하는 버스와 기차앱 및 에어비엔비앱이 있어서 과거와 달리 여행사를 통한 그룹투어를 하지 않고서도 어렵지 않게 여행을 할 수 있다. 구굴맵으로 헤매지 않고 길을 찾아갈 수 있어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인천에서 프라하까지는 11시간이 족히 걸리는 긴 비행시간이다. 친구가 허리가 아파서 나도 덩달아 처음으로 프레스티지 좌석을 이용한다. 비행기에서 딸 준하가 다운로드한 무빙을 연달아 에피소트 5개를 보고 <리얼프라하> 여행안내책을 꼼꼼히 읽었다. 프라하에 오후 5시에 경에 도착해서 약간의 지체가 있었지만 미리 요청한 호텔 관련 택시운전사가 픽업을 하러 왔다. 그는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쏟아져 들어온 사람들 때문에 치안이 더 불안해지고 노동현장에 경쟁이 더 치열해져 힘들다는 둥 친정부적인 불만을 더듬거리는 영어로 우리에게 투털거렸다. 프라하의 11월 날씨는 걷기에 적당할 정도로 서늘하다. 프라하의 구시청광장에 숙소를 정했다. 호텔 로트 ( hotel Rott).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엄청난 인명피해와 시설파괴를 겪고 있는 사태에 대한 항의집회를 여는 시위대들의 행진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역시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온 프라하 시민들의 뜨거운 피와 연대의 정신을 느낄 수 있어서 함께 ”프리 가자“를 외치며 잠시 합류했다. 프라하는 11월 초겨울 날씨인데도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저녁시간에 잠시 한두 블록 앞에 있는 블타바강에 비친 프라하성과 프라하 다리를 보기 위해 밤마실을 나간다. 시차로 인해 몰려오는 피곤함을 이길 정도로 환상적인 야경이었다.
11월 2일 (여행 둘쨰날)

프라하는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만추에 접어들었다. 단풍이 프라하 성주변의 나무들을 물들이고 고즈넉하고 고요한 정취를 빚어낸다. 8시경에 호텔에서 나와 도보로 구시가지 (스타레메스토)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구역인 말라스트라나를 잇는 카를교를 건넌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체코작가 중 한 명인 카프카 박물관과 클레멘티움을 보기로 한다. 어젯밤에 프라하 골목마다 어김없이 팔고 있는 프라하 명물 중 하나인 굴뚝빵 ” 뜨르믈르“를 맛보았는데 생각처럼 맛있지는 않았지만 숯불 위에 돌돌꼬치구이처럼 구불거리는 반죽을 올려 구워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뜨르믈르 빵은 분명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플레인도 있지만 초콜릿을 발라 먹는 맛도 있다. 구시가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틴 성모마리아 성당은 14세기 중반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대표적 고딕양식 건물로 장식적 화려함이 압권이다. 루터보다 훨씬 앞서 종교개혁을 외친 후스파가 자신들의 상징인 황금성배를 녹여 만든 자리는 구교에 의해 후스 추종자들이 처형을 당하고 다시 구교 카톨릭이 이 성당을 차지하게 되면서 황금성배를 녹여 지금의 틴 성모마리아 성당으로 만들었다 한다. 신교성당이 구교성당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도 가톨릭 교도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종교개혁을 둘러싼 피의 역사를 수세기에 걸쳐 겪은 이후 현재 체코는 어느 나라 보다 종교의 자유와 공존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약간은 이교도적이고 컬트스러운 종교단체들이 우후죽순 프라하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한국에서 떠들썩했던 정명진 JNJ 교단이 이곳에 버젓이 있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면서 오래된 프라하 성을 오르기 전 블타바 강 위에 있는 다리 중 하나인 카를교는 여전히 관광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다리 앞켠에는 체코에서 숭상하는 상징적인 인물들과 종교적인 성인들, 성경 속 알레고리를 표상하는 조각상들이 도열해 있다. 그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성 네 포 츠키> 신부의 석상으로 네 포 츠키와 여왕조각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왕의 신의를 믿지 못한 왕이 여왕이 고해성사를 한 네 포 츠키 신부를 추궁하지만 결국 실패하자 그를 블타바강에 돌을 매달아 투척했지만 다시 떠올라 성인의 반열에 오른 네 포 츠키 신부. 그를 기념하는 조각과 기념품들이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카를교 다리 아래 유대인지구인 캄파지역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예쁜 카페, 마르니스 카페. 핸드메이드 팬케이크와 커피를 마시면서 유유히 흐르는 블타바 강과 강변 주변으로 아름답게 도열해 있는 중세건물들을 감상할 수 있다. 한가한 시간을 보낸 후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책 두 권을 구입한 후 근처 유대인 지구에 있는 <카프카 박물관>으로 향한다.

세상에서 가장 좁은 골목 네유슈시 프라슈스카 유리티카(골목, 샛길). 사람들이 작은 레스토랑으로 통하는 이 비좁은 골목을 건너가기 위해 줄을 길게 섰다. 심지어 신호등이 있어 오가며 혼선을 빚는 것을 예방하고 있다. 좁은 골목에 켜진 빨간 신호등… 골목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환하다.


카프카 박물관 앞에 설치된 다비드 체르니의 <오줌 누는 사람들> 조각이 재미나서 한참을 구경한다. 카프카 박물관 입장권은 300 코르나. 그의 초판 원고와 일기, 유서등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대인지구에서 자랐지만 중상층인 아버지의 권유로 출세가도를 위한 관문인 독일인 학교를 다녔던 카프카. 남부 보헤미아 지방에서 가난한 정육점의 아들로 태어난 카프카의 아버지는 일찍 생계를 위한 노동일에 뛰어들었고 운 좋게도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해서 나중에 15명의 직원을 둔 도매업을 경영하게 된 어찌 보면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나 사회적인 교양과 인문적인 소양이 없는 소시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식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법과 대학으로 카프카를 입학시키고 사업이나 경영면에 도통 관심이 없는 아들을 못마땅해하고 평생 아들과 불화한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Letters of father)에서 신체적 인우 위와 강인함으로 자신을 억압하고 정신적으로 심한 압박감을 느낀 아버지에 대한 고발장 같은 기나긴 편지들을 썼고, 이 편지는 사후에 그의 절친 막스 브로드에 의해 책으로 발간이 된다.
아버지에 대한 반목과 질시, 그리고 자기 항변은 읽는 이의 마음을 심하게 격동시킨다. 진즉 읽었지만 다시 한번 그 책을 구입해서 여행 이후에 읽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나 긴 편지를 써 내려갔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그늘에 갇혀 좋아하는 여인과도 파혼하고 다른 이들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의 성장배경과 아버지와의 오랜 갈등과 분투는 어쩜 부조리 실존문학의 대표주자인 카프카의 태생적인 모태가 되지 않았을까.
특히나 카프카는 아버지의 상점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고 막말을 하는 아버지에게 심한 반발과 경멸감을 느끼며 동시에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절망한다. 카프카는 평생 상해보험회사의 직원으로 일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썼고 그토록 불화했던 아버지에게 작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심한 가슴통증과 목마름으로 고통받다가 죽은 카프카. 그는 죽기 전 친구 막스블로그에게 자신이 쓴 모든 작품을 소각해 줄 것을 부탁한다. 21세기 전후 세대들의 문학적 대변인처럼 존경받는 카프카. 그를 읽는 일이 지성인의 반열에 오르는 일처럼 필수적인 인문학과정이 돼버린 카프카. 한 세기가 지나갔지만 카프카의 문학적인 주제의식과 그의 접근방식은 낡지 않고 지금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책

카프카 빅물관

클레멘티눔.
카를교를 건너오면 구시가지로 가는 길 초입에 자리한 아주 근사하고 멋지게 생긴 바로크 형식의 건물. 아침 10시경에 미리 예약을 해뒀다가 정시에 모임 장소에 간다. 입장료는 300 크루나. 25명 인원제한으로 하는 가이드 투어로만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다. 18세기에 완성된 바로크 도서관은 예수회 대학교의 부설기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유네스코에 선정되었다 한다 약 2만 권의 장서와 18세기 중반 천문지구본을 수집해서 도서관 중앙 곳곳에 전시했다. 1556년 틴성모마리아 성당을 본거지로 하는 후스파를 견제하기 위해 이곳에 예수회 본부를 만들고 클레멘티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바로크풍의 서가. 오래된 책 냄새와 지구본. 천장 프레스코화를 단지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클레멘티눔 안에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목조계단을 170개를 오르면 천문탑이 나오고 발코니에서 시가지를 전망할 수 있다. 이 천문탑에서 1775년부터 기상을 측정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수세기에 걸친 천문과학기구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관측탑 (Observatory)이 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1775년까지 기상관측 ( Meterorological measurement)를 사용한 기상관측을 이곳에서 했다 한다. 1842년과 1925년 사이에 이곳에서 실제 달을 관측했고 프라하 시민들은 이 달을 이용해서 시간을 맞추었다고 한다.

비가 소슬하게 내리기 시작해 구 가지 광장에 있는 식당에서 체코 전통음식인 꼴레뇨를 시켜 체코맥주 필스너 우르켈라와 함께 먹는다. 꼴레뇨는 무릎부위 돼지고기를 맥주에 10시간을 재웠다 오븐에 구운 촉촉 겉바인 체코식 돈가스라고나 할까. 골레뇨는 빵과 익힌 채소와 함께 나오는데 동유럽 음식이 그렇듯 맛있으나 좀 짜다.
하지만 체코 맥주는 부드럽고 쓰지 않아서 일일 일맥주를 해도 무방 할 정도로 괜찮다. 이곳 사람들은 맥주를 마치 물처럼 마시는 것 같다.


체코 구시가지의 명물 천문시계.
1410년 600년 전에 만들어진 시계인데 지금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다. 당시 천문학적인 과학기술과 기술공예가 결합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시계다. 천문시계 위의 닭,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권장할 것과 경계해야 할 것을 표상하는 8가지 조각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조각성은 거울이 허영, 돈자루는 탐욕,, 음악은 여흥, 해골은 죽음, 깃펜은 진리 천사는 정의, 망원경은 탐험, 책은 학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매시 정각에 해골이 짤깍거리면 예수의 12제자가 열린 작은 창문으로 행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닭이 홰를 치며 우는 40초짜리 공연이 이어진다. 상부시계의 테두리는 절기에 따라 움직이는 방향이 다르다고 한다. 해가지는 일몰의 순간을 24시라 생각하고 하부시계에 있는 작은 금색바늘이 움직인다. 하부시계에는 한 해 동안 해야 할 농사일을 시기에 맞춰 알려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안쪽에 있는 작은 그림은 황도 12궁, 즉 별자리이다. 관광객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서 보는 것이 구시청사에 있는 이 시계다. 규모도 대단하지만 수세기 동안 틀리지 않고 돌아가는 시계의 정밀함과 장식의 아름다움, 그리고 무엇보다 조각상들을 감상하고 매시간마다 인형이 공연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11월 3일 금요일 (여행 3일째)

바츨라프 광장
쎄익스피어 서점에서 구입한 <prague Travel Tips>를 읽었다. 미국여성이 체코를 수십 번 오가며 쓴 여행기인데 흥미로웠다. 체코는 역사적으로 보헤미아로 알려진 땅으로 프라하가 수도이며 블타바강 유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인구만 약 천 삼백만 명 정도 된다. 중세유럽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으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체코인들은 정치역사에 있어 저주이자 축복을 동시에 누렸다. 고딕과 르네상스 기간에 체코를 통치한 카를 4세 (14세기)와 루돌프황제 (16세기)에 이르러 체코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 시절 프라하는 체코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최대강대국이었다. 거의 모든 고딕양식의 건축물들은 카를 4 게 때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래서 카를 4세의 동상이 카를교 앞에 있다. 프라하의 부는 중세유럽의 메인 화폐로 사용되는 것이 은화였는데 인근에 있는 Kutra Hora 산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다 한다. 16세기 오스트리아 황제 루돌프 2세가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국의 수도를 빈에서 프라하로 천도하였고 그는 문학, 예술, 음악, 천문학을 지원하였고 그로 인해 프라하로 각국의 장인들 ( Artisans), 연금술사들 ( Alchemists), 천문학자 ( Astronomers)들이 몰려들었다 한다. 이때 프라하성이 있는 말라스트라자지 구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리모델링했다 한다.
수세기 동안 체코인들에겐 점령자였던 가톨릭 통치에 맞선 저항이 체코에서 있었으나 결국은 패배하였고 체코의 프로테스탄트 신교는 종교개혁에 실폐하면서 반종교개혁이 체코를 휩쓸었다. 얀후스는 체코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종교개혁자이자 민족의 영웅으로 그의 동상은 구시가지 광장의 중앙에 있다. 바로크형식의 지나치게 장식적인 건물이 성행한 것은 합스부르크왕국이 체코를 지배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때 이 텔리 언 지구였던 말라 스라라지구의 르네상스양식의 건물들을 대거 바로크 형식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그러다 19세기 아르누보 건축물인 시청사와 신르네상스양식의 국립극장 건물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헝가리제국의 해체와 1차 세계대전 후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최초의 독립국가로 탄생하고 제1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후 히틀러가 프라하를 침공하여 프라하를 식민화했다. 프라하의 건축물들이 전쟁 중에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나치의 히틀러 침공이 크게 저항받지 않고 바로 프라하가 항복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1960년 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체코의 사회구조를 이행하려고 했으나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져 있는 소비에트 침공으로 체코인들은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상처를 입게 된다.
바츨라프 광장이 소비에트 탱크가 밀고 들어와 같은 슬라브인들로 서로 친하다고 생각했던 소련인들에 의해 수많은 체코인들이 희생되었던 역사적 장소이다. 마치 광주 민주시민광장과 같은 곳이다. 이후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페데스트로이카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점차 소련연방이 해체되었고 그 당시 체코의 민족주의적 영웅이자 극작가였던 반정부인사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또한 하벨의 대국민 연설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되었으며 현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사회주의 국가이다.
얼마 전 대마초 판매가 합법화 되었다고 한다. 대마초 냄새는 확실히 역겹다. 멀미가 난다. 우려스러운 일들이 독버섯처럼 프라하에 퍼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하벨시장
아침 일찍 일어나 한적한 스테로 메트로 거리를 걷는다. 관광객 없는 텅 빈 거리를 쓰레기수거 차량과 청소부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쓰레기를 진공청소기로 뽑아들이고 있고 비둘기들이 한가로이 거리 한복판에 여유롭게 앉아있다. 여명의 카를교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잠들어가는 정적과 꺠어오는 소리사이에 너무나 의연하게 흐르는 블타바강을 끼고 조용히 하루를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자전거유로나라에 미리 프라이빗 투어를 신청해 둬서 투어가이드와 함께 하는 날이다. 책으로 하는 공부가 한계가 있고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구시가지 광장에서 투어가 시작된다. 그의 설명이 흥미롭다. 체코에는 신교와 구교의 오랜 갈등과 전쟁으로 현재는 종교에 대한 자유 및 관용이 다른 어느 곳보다 더 높다고 한다. 얀후스가 이끄는 후스파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이들이 결국 구교의 승리로 27명이 1624년 공개 처형된 장소가 구시가지 광장이고 그들을 기념하기 위해 빈공터로 남겨진 곳엔 지금은 포장마차가 즐비하고 체코의 전통빵인 끄레믈르와 숯불에 구운 돼지고기를 팔고 있다.
1232년에 생긴 하벨시장을 슬쩍 구경한다. 지금은 과일 가판대와 저렴한 기념품을 파는 곳으로 옛시장의 북적임은 사그라든듯하다. 여기서는 easy to pack gifts를 기념품으로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지만 품질 대비 가격이 너무 비싼 것 같다. 그렇게 싱싱한 과일도 보기 힘들다.

바츨라프 광장으로 이동하다 잠깐 모차르트의 돈조바니 공연이 있는 극장 앞에 멈춘다. 이곳은 돈조바니가 초현 된 에스타테 극장이다. 가기 전에 오페라나 연주회에 꼭 가보고 싶다. 바츨라프광장은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현장이다. 광주시청 앞 광장처럼 민중의 정의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곳이면서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피의 현장이다. 1918년 이후 민주공화국이 설립되고 이상주의적 사회주의를 건립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망이 러시아의 군홧발과 화기로 참혹하게 좌절된 곳. 이후 1989년 벨벳혁명으로 비사회주의적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이때 대통령이 극작가출신의 바츨라프 하벨이다.

무하박물관
무하는 내가 처음 알게 된 화가다. 기념품 가게마다 무하가 그린 장식적이고 화려한 여인의 그림이 새겨진 포스터, 도자기며 패브릭, 컴, 생활도구등을 판매하고 있었지만 그를 알게 된 것은 새로운 예술가의 발견이었다. 놀랍게도 그에 대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하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에 그와 그의 작품에 매료돼버렸다. 책을 구입해서 읽어본다. 무하는 1840년 모라비안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남달라 무하는 어렸을 때부터 손에서 데생용 연필을 놓지 않고 있었다 한다. 유럽의 예술지망생들이 모여드는 무니치에 있는 예술아카데미에 지원하고 그곳에서 많은 예술가들과 만나기도 하지만 무하는 건조하고 딱딱한 아카메미의 경향과는 맞지 않아 결국은 그곳에서 나온다. 그가 27세의 나이에 간 곳은 파리다 그곳의 작은 스튜디오에 등록해 그림을 그린다. 그 당시에 인상주의 화풍이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드가와 르노와르와 같은 작가들이 근방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전시를 하곤 했다. 무하와 그들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에게 결정적인 화가로서의 기회가 열린 것은 파리극장의 간판화 보조화가로 일하면서 사라 베른하르트라는 파리 물랑루주의 유명한 여배우의 초상화를 우연찮게 그리게 되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사라 베른하르트는 50의 나이였고 연극계에서 특출 난 디바이며 사교계의 여왕으로 시인, 음악가, 의상디자이너, 헤어드레서들에게 엄청난 인기와 관심을 독차지한 여배우였다. 그녀가 출현한 연극 기스몬다의 포스터를 전무후무한 실물크기로 그녀를 미의 화신으로 이상화해서 패널화로 그린 무하와 베른하르트는 전격적으로 7년 전속계약을 한다. 그가 그린 포스터는 4000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이후 사라 베른하르트는 무하의 이상화된 미의 화신으로 군림하며 Medee를 비롯한 수없이 많은 연극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후 무하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아르누보의 대표적 화가로 자리매김 한다. 그의 그림에서 주요 모티브로 사용된 것은 기하학적 무늬 꽃, 여자 그리고 굴곡을 이루는 해일로우이다. 무하 스타일로 일컬어지는 화풍은 포스터와 캘린더 포장지 포스트카드, 메뉴, 초대장등 거의 모든 것에 나타나게 되었다. 무하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사랑받은 Fore Seasons를 비롯한 많은 패널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하는 핫케이크처럼 팔려나가는 자신의 작품활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나는 내 작품이 폐쇄적인 살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유하든 가난하든 모든 이들이 감상하고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 ” 무하의 작품이 팬케이크처럼 팔려나가자 그의 스튜디오에는 수많은 예술지망생들과 애호가들이 찾아와 숙식을 하고 그의 호의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에게 물질적인 신세를 졌다. 이후 무하는 물질적인 성공을 했음에도 소속사로부터 패널용 그림제작을 독촉받았고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말년에 홀로 조국을 위해 그의 재능을 발휘하여 애국을 하고자 체코로 귀국한다. 제1 공화국 대통령 하벨의 요청으로 성비투스성당의 스테인리스그림을 그리기도 했으며 체코의 지폐에 그의 딸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독일의 식민지배에 있었던 때에 조국의 해방과 민중의 복지를 위한 그림 “ Lottery of the Union of south western Moravia.” 포스터를 제작하여 비참한 생활고에 허덕이는 민중들이 교육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날 것을 촉구했으며 복권으로 독립자금을 모금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그는 프하하에 모라비아 인들의 전통과 민족적인 정체성을 일캐워 주기 위한 대형 역사 페널을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를 전시할 전용공간을 마련하고자 애썼다 그가 그린 ”Woman in the wilderland”는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역경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체코 여인을 노리고 있는 야생의 늑대와 멀리 여인을 비추고 있는 별을 대비시켜 비록 야생의 험난한 억압과 광포한 두려움에 놓여있지만 결국 하늘에 떠 있는 밝은 별이 조국을 지켜주고 해방의 길로 안내할 것이라는 알레고리적 작품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의 역사화 제작과 이 작품으로 인해 나치에게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고 이로 인해 무하는 사망에 이른다. 무하의 초기 만화와 같이 미화된 여성과 꽃을 소재로 한 대형 패널화만으로는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말년에 식민조국에 돌아가 자신의 영예와 경제적 부를 버리고 조국의 민중들을 위해 재능을 다 바쳐 역사화를 그리면서 민족적인 정체성을 일캐우기 위해 애국적인 활동에 헌신한 모습은 진정한 민적적 예술가로의 모습이 느껴져 너무 존경스러웠다. 체코인들이 무하를 좋아하고 박물관을 만들어 그를 기념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하박물관에 가게 된 것은 이번 체코 여행에서 큰 수확이었다.

무하

무하 책

사라 베른하르트

무하의 말년작품

복권

프라하 성에 있는 성비투스 성당은 아름다운 수많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지만 나는 무하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맘에 들었다.

트램 22번을 타고 프라하 성을 오른다. 예전에 있었던 보안검색대는 이제 철거되어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대통령 집무실을 지나 천년에 걸쳐 건축된 비투스 성당에 들어갈 수 있다. 프라하 성은 성비투스 성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이 성을 비롯한 이 일대의 모든 건축물들 그리고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까지 포함한다. 925년 체코의 혈통인 바츨라프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성물인 성 비투스틔 딸을 모시기 위해 처음 예배당을 세웠고 1344년 카를 4세가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재건축하여 1929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성직자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고 특히 성요한 네포무크의 유해함 은 2.5톤으로 만들어졌다한다. 동생에 의해 처참하게 권력투쟁으로 살해당한 바츨라프의 일생을 모사한 바츨라프 예배당은 권력은 형제와도 나눌 수 없음을 보여준다.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스테인드클래스는 납으로 유리를 붙이기 때문에 수많은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납중독으로 고통받았다고 전해진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성아지르(조지) 성당 단아해서 오히려 기품이 느껴지는 곳으로 성녀 류드밀라의 무덤과 얀 네포무크를 모신 제단이 있다. 색감이 화려하지 않지만 마치 단청을 입힌 우리나라 절집을 연상시킨다.

프라하 성 황금소로

프리히성 황금소로

황금소로 18번 카프카의 집

황금소로. 연금술사의 길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옛날엔 빈민들이 거주했던 곳이라 하수도시설이 없어 골목에 흘러 내린 냄새나는 소변으로 황금소로라 불렸다는 설도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성을 나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지붕 낮은 작은 집들이 다정하고 예쁜 색깔로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고 각별하다. 프란츠 카프카는 22번이라고 적힌 작은 방에 세 들어 살았다. 그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이곳은 평생 불화했던 아버지를 피해 혼자 빈둥거리기도 하고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작품을 쓰기 위해 동생이 임대료를 내고 카프카를 위해 얻어 준 방이다. 비좁고 겨울에는 추웠지만 카프카는 이곳에서 변신을 비롯한 시골의사 등 다수의 작품을 구상하고 썼다. 카프카는 상해보험회사 직원으로 일을 마치고 이곳에 와서 정신적인 안식처로 삼아 자신의 또 다른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가 그립다. 오늘도 많은 이들의 발걸음이 그의 집 22번에 머문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한 권 더 산다. 이곳은 카프카 책을 판매하는 작은 서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카를교에는 거리의 악사들을 비롯한 화가, 팬터마임을 하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관광객들을 맞는다. 체코의 전통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다양한 퍼퍼먼스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 이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카프카 박물관을 찾아 길을 오르면서 발견한 쎄익스피어 서점. 책 두어 권을 구입한다. 이렇듯 오래된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는 재미가 솔솔 하다.
11월 4일 토요일 여행 4일째

비세흐라드를 가다
체코 전통 빵 콜라체를 오늘 아침에 맛본다. 빵 가운데 설탕에 조린 과일을 얹어 만든 빵인데 맛있다. 아침에 구굴지도를 검색해 비쎄흐라드로 가는 길을 찾는다. 메트로와 트램 표시를 착각해 이리저리 헤매면서 역시 공간개념이 빈약한 내가 한심하다. 체코는 지하철 노선이 딱 3개, A, B, C 이렇게 있다. C 라인을 타야 하는데 3번 트램을 타고 Vytor에서 내려 11월 늦가을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는 단풍 든 가로수기릉ㄹ 걷다 카바르나 카페에 잠깐 들러 카푸치노를 마신다. 비세흐라드는 높은 성이라는 뜻. 10세기경 요새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 한다.

레오폴드게이트를 통과해 천년 넘게 언덕 위에 자리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고 귀여운 예배당 로툰다에 간다. 이 성은 한때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화약을 보관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작은 미사를 올리는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된다.

로툰다 예배당

블타바강 오른편에는 성베드로와 바울 성당이 있다. 이곳에 무하의 아르누보 작품이 있다고 했는데 보지 못하고 슬쩍 성당을 장식한 아름다운 프레스코 성화만 잠깐 엿본다. 이 성당 왼편으로 가면 공동묘지가 있다. 600위가 넘는 성인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그중 드보르작, 무하, 스메타니의 묘지가 있다. 묘지마다 아름다운 조각상과 장식이 있어 영원한 영면에 든 죽은 자들을 위로하고 산자들을 불러들여 종국의 죽음을 사색하게 한다.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과 멀리 보이는 프라하성 그리고 무성한 나뭇잎들이 낙엽으로 뒹구는 늦가을의 공원, 그곳에 가만히 쉬어 갈 수 있는 벤치, 간혹 낮술에 취해 잠이 든 취객 몇, 가족들의 산책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갖는다.



날이 쌀쌀해 비쎄흐라드 공원 입구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은 밖에 모다불을 피워두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모닥불 주위에 모여 수다를 떨고 따뜻한 수프와 빵으로 추위와 허기를 달랜다. 우리도 따뜻한 야채수프와 빵을 시켜 잠깐 쉬어간다.

얼마만의 충만한 가을 속 산책인가. 뒹구는 낙엽들을 사뿐히 밟으면서 무심하게 한없이 걷는다. 행복하다.
11월 5일. 프라하 여행 5일째 독일 드레스덴

오늘은 프라이빗 투어 가이드와 함께 하는 프라하 외곽지역 여행일정이다. 의 개인 승용차를 이용해 국경을 넘어 독일 드레스덴으로 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국경경비대의 보완체크가 없었는데 지금은 랜덤으로 보안체크를 한다. 프라하 관광지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관광업도 체코의 주요 산업이지만 옥수수와 해바라기를 대량재배하여 유럽에 보급한다고 한다. 또한 드론을 비롯한 무기제조산업이 오랫동안 체코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체코에서 생산라인을 갖고 있는 자동차제조회사가 있다고 한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길에 작센주 바이세타인 요새가 있는 사암산에 산책 겸 잠깐 들른다. 생각보다 멋진 풍광이 펼쳐져 깜짝 놀란다. 가을 단풍으로 색색들이 물든 숲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절묘한 모양의 사암으로 된 기암들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암은 원래 속살이 분홍이란다. 사암의 요소인 철성분이 비바람에 섞여 차가운 암회색이 된다고 한다. 사암산 아래로 그림처럼 휘돌아가는 엘베 (블타바강) 강이 멀리 보인다. 드레스덴은 마이센, 라이프치히와 더불어 동독의 3대 도시다. 슬라브어로 드레스덴은 숲 속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의 항복을 얻기 위해 영국군의 융단폭격( blockbuster)으로 도시의 90 퍼샌트가 잿더미가 되었다 한다. 전후 30년에 걸친 복구작업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게 90퍼센트 이상이 원상회복되어 사람들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파괴되기 전의 모습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19년 극우세력들의 인종주의 난동처럼 네오나치 극우세력들이 다시 득세하면서 인종차별이 어느 도시보다 심하다고 하니 씁쓸하다. 드레스덴 폭격 추모일마다 나치들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집회와 시위를 한다고 한다. 독일의 피렌체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바로크풍 양식의 건물들이 엘배강유역에 도열해 있다.

츠빙거궁전

츠빙거궁전


츠빙거 궁전

츠빙거궁전
1711년에 세워진 츠빙거 궁전. 좌우대칭의 균형미를 완벽하게 갖춘 바로크양식의 웅장한 17세기 궁전. 하지만 드레스텐 공습 이후 미술관을 제외한 모든 곳이 파괴되었다. 1953년부터 시작된 복구작업으로 거의 80퍼센트가 원상회복되었다고 한다. 요정의 샘으로 유명한 음악당은 해마다 음악제가 열리는 곳이라 한다. 도자기로 만든 카리용이 내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듣지 못했지만 파괴된 건물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원상회복해 내는 독일인들의 내공이 놀랍고도 존경스럽다. 현재는 궁전 내 코트야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드레스텐 공습으로 도시의 주요 역사적 건축물들이 엄청난 규모로 피해를 입었을 때 시민들이 무너져 내린 건축물의 파편들을 주워서 간직하고 있다가 통독후 복구작업이 시작되자 하나둘 잔해들을 들고 나와 퍼즐을 맞추듯이 건물들을 복구했다고 한다. 감동스러운 이야기다. 역사가 무엇인지 그들이 살아가는 현재의 시간이 어떻게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깊게 생각하게 한다.

루터성당

슈탈레프 벽화

드레스텐 공습에서 기적적으로 전화를 모면한 "슈탈레프벽화"는 길이 10미터 높이 8미터로 마이센 자기 타일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모자이크식 벽화다. 이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25,000여 개의 타일이 사용되었다 한다. 역대 이 지역을 통치했던 군주들의 행렬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제작한 벽화를 보면서 마치 붓으로 섬세하게 그린 그림처럼 정밀하고 정교한 느낌을 주는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동원된 예술가들과 공예가들의 실력과 기술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엘배강 위에 놓인 교각은 2018년 홍수로 완전히 잠겼다고 한다. 이 주변에 있는 성곽을 따라 괴테는 베아트리체와의 이별을 슬퍼하며 한없이 걸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곳이다.

구시가광장은 왠지 너무 넓어서 정감이 가지 않는다. 프라하의 오밀조밀한 골목길과 코블스톤이 깔린 작은 길들이 내게는 훨씬 정겹고 다정한 곳이었다.

하루 여행을 마치기 전 시장기를 달래며 이색적인 음식을 먹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엘배강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서 독일식 스테이크를 맛본다.
11월 6일 프라하 여행 6일째

오늘은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간다.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10시경에 하고 카를교를 지나 말라스트라나를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길옆에 상점마다 걸어둔 예쁜 간판들이 눈길을 뛴다. 스프라호프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과수원과 귀족들이 살았던 거주지는 그림 속의 장면들처럼 예쁘다. 꽤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원이라 멀리 성비투스성당과 페트린 타워가 조망된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은 1140년 경 세워진 곳으로 성모승천 성당과 도서관 그리고 양조장 및 귀족들의 거주지들이 있다.

색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마치 예술품을 전시해 둔 것처럼 벽을 타고 있다. 아름답다.

잠시 휴식 겸 이곳 양조장에서 제공하는 맥주를 마셔보기 위해 Pivovar 식당에 간다. 샐러드와 과일 맛의 아로마와 말터 호흡의 밸런스가 좋다는 IPA와 Bock Amber 맥주를 주문해서 마셨는데 글쎄 맥주맛은 잘 모르겠다.

총 26만 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고도서관은 철학의 방과 신학의 방 그리고 근대도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얀 천장의 아름다운 프레스코화 그리고 생각과 번민에 생긴듯한 조각상이 있는 신학의 방을 밖에서 관람한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스트라호프 수도원을 나와 조금만 걸어오면 매시 정각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로레타 (Roreta Plague) 성당이 있다. 기적을 행하는 산타까사의 이야기에 매료된 로브코비치 남작부인이 흑사병 극복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1625년에 지은 성당이라 한다. 나사렛의 산타까사를 본떠 만든 예배당이 중앙에 있다. 관광객이 북적이지 않은 아주 한적하고 적요로운 성당이다. 산타까사는 수태고지의 성지이며 성모마리아와 요셉이 거처로 이슬람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이곳에 만들어져 성지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진귀한 성물과 "프라하의 태양"이라 불리는 다이아몬드로 수놓아진 보물이 있다.

레논벽
프라하성에서 말라스트라나를 잇는 고풍스러운 언덕길 네루도바를 걸어 내려오다 딸에게 줄 예쁜 고양이 컵을 하나 선물로 산다. 47번 저택에 살았던 체코인들이 사랑한 작가 얀 네루다의 이름을 따서 거리명으로 삼았다. 그 당시에는 주소가 따로 없어 집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는 다양한 표식들이 거리 곳곳에 있었다.
오늘 길에 <레논 벽>에 간다. 온갖 색깔의 그라피티가 현대미술 벽화처럼 벽을 장식하고 있다. 약 30여 개의 언어로 각자의 염원과 존레넌을 추억하고 기념하는 글귀들을 새겨둔 레논의 벽. 프라하의 봄을 겪은 슬픈 프라하 인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노래한 존레넌은 아마 그들의 정신적인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 Imagine의 가사와 전체주의정권을 비난하는 글, 그리고 개인의 소원을 비는 글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이들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나도 작은 글씨로 내 흔적을 남긴다.

말라스트라다 거리 기념품가게 구입한 매그네트
11월 8일 프라하여행 7일째 체스키 크룸로프

내가 묵은 펜션
메트로 B 노선을 타고 안델역에서 하차한 후 Na Knizeci 버스터미널 플랫폼 1번에서 레지오 젯 버스를 타고 체스키 크룸로프를 간다. 이번여행에 유용했던 웹은 체코 국내여행을 위한 버스를 예약할 때 사용하는 Regio jet 웹과 근접한 다른 나라를 여행하기 위한 기차나 버스를 예약할 땐 OBB 웹이 있다. 웹을 이용해서 미리서 티켓을 구입하면 편리하다. 숙소는 AirB&B 에서 검색해 맘에 맞는 숙소를 예약하면 된다 이번에 묵을 숙소는 크룸로프의 메인 광장인 스보르노스티에서 가까운 Exclusive Chamber near Castle Pension in Layran 69에 2박 3일을 예약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체코의 남보헤미아주에 위치한 인구 13000명 정도 되는 유서 깊은 소도시이다.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현지인들이 문화유산 관리 및 유지 보수에 참여하면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3세기 보헤미아지역의 무역거점으로 자리했으며 로줌베르크 가문의 소유가 되면서 축성을 했다. 1622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2세의 소유로 넘어갔다가 이후 에겐 베르크 가문과 1719년 오스트리아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되었으나 나치의 점령으로 독일인들이 유입되어 살다가 독립 후 다시 체코에 귀속된다.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성을 다시 복구하여 1992년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하회마을처럼 아름다운 강이 마을을 휘돌아 가며 절경을 이루고 있고 성곽을 중심으로 유서 깊은 장소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있다. 한눈에 마을을 관망할 수 있는 세미나르니 정원과 고풍스럽고 알록달록한 건물의 중세 건물인 스보르노스키 광장 그리고 에곤쉴레 미술관과 이발사의 다리, 르네상스양식의 아기자기한 마을에 동화 같은 느낌을 주는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체스키 크룸로프 성탑, 13세기 지역 영주가 블타바 강가에 솟은 바위 언덕에 성을 짓고 이후 로젠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가문의 소유로 바뀌어간 체스키 크롬로프성. 성내부 투어는 11월 에서 3월까지 없어서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한다. 성내 관람은 가이드투어로만 가능하다. 이 성은 르네상스미 ㅊ바로크 양식의 건물과 시대별 건축양식을 두루 갖춘 궁전으로 예술전시품과 극장등이 있다. 그리고 가장 멋있는 망토의 다리는 아치모양의 구멍을 뚫은 것처럼 생긴 독특한 모양의 다리인데 이 다리를 지나 성곽전망대와 성정원이 이어진다.

이번 여행에서도 실감한 사실은 짧은 여행을 할 때는 백팩이 최고다. 끄는 캐리어를 이용하다 보면 크롬노프와 같은 유럽의 중소도시는 코블스톤이라는 작은 자갈돌들이 바닥에 깔려있어 울퉁불퉁 캐리어의 바퀴가 성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면 어깨힘을 써서 어설프게 들고 다닐 수밖에 없는데 이게 여간 힘들다. 렌털카를 이용하지 않고 버스나 기차로 여행할 땐 정해진 숙소로 이동하는 거리가 만만찮을 수가 있다. 크롬노프 성에서 아주 가깝게 있는 숙소인지라 관광하기엔 최적의 장소였지만 버스터미널에서 캐리어를 끌며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코블스톤 거리를 가는 것이 여간 힘들었다. 우리가 머문 장소는 일종의 펜션으로 낡은 옛날 건물을 여행객용 펜션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는데 찾기가 쉽지 않아서 집 랜드로드와 여럿차례 통화를 해서 겨우 찾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숙소를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해 주는 아줌마는 현지 고용인인 것 같고 소유주는 따로 있어 현지어가 아닌 영어로 말할 때는 전화로 통화해야 한다. 집은 낡았지만 넓은 창과 편안한 침대, 그리고 상당히 넓은 방과 여유공간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조용하다. 블타바강이 시작된 상류라 물살이 세고 빠르다.

물가에 있는 보헤미안 전통 음식점 The two Marys에서 보헤미안 숲과 정식을 먹는다. 다리건너로 망토다리와 이발사의 다리 그리고 멀리 보이는 성탑을 오랫동안 감상하며 인생의 몇 번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축복 같은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빠져든다.

크룸로프 성을 밖에서 바라보아도 이렇듯 아름답다.

망토다리


11월 9일 여행 8일째 (체스키 크룸로프)
체코여인이 8시 반경에 아침을 숙소까지 가져다준다. 커피와 차, 햄과 치즈, 스크랜블, 빵으로 된 넉넉한 아침을 먹고 새참으로 먹으려고 샌드위치를 만들어 시내로 향한다. 먼저 크롬로ㅡ 성탑으로 향한다. 13세기 성을 건축한 로젠베르크 가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화려한 식기와 생활도구 그리고 귀족가문이 향유했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 실내극장까지 그 시절 영주의 화려한 생활을 별 감흥 없이 관람한다.

체스키크롬노프 성 입구

성탑에 있는 나선형 나무계단을 올라 꼳대기에 이르면 성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탁 트인 시야에 크룸로프 전체를 빙 둘러 볼 수 있다. 아름답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읽어보니 이곳에는 Proradost( For fun)라는 비전문가들로 구성된 공연예술단들이 매년 축제에 참여하여 수세기에 걸쳐 공연을 한다고 한다. 특히 조각가와 공예가들이 로젠베르크 가문의 마지막 클랜이 사망한 1630을 기념하기 위해 성탑의 프레스코화 네 점을 완성하였고 그동안 손실된 종을 복원하여 성탑에 매달았다고 한다. 13세기 지역 영주가 블타바 강가에 솟은 바위언덕에 성을 짓고 이후 로젠베르크, 에겐 베르크 , 슈바르첸베르크 가문으로 연이어 성이 양도되면서 다섯 꽃잎 장미 축제가 매년 6월에 열린다고 한다. 바로크 양식의 극장과 16세기 로마네스크와 17,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건물양식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성을 향해 걷는다. 성내 관람이 11월에는 제한되어 있어 망토다리를 지나 직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정돈한 17세기 성정원을 잠깐 들른다.


성정원 ( castle gargen)

점심은 Restaurant Jerenka에서 적당한 가격에 오늘의 숲과 보헤미안식 미트( 고기, 감자, 양배추, 칠리, 훈제 쇠고기)를 먹는다. 기념품가게에서 예쁜 그림이 그려진 타일을 하나 구입한다.

세미나르에 정원은 옛 기억을 되살려준다. 작지만 언덕에 서면 그림 같은 성내 전경을 볼 수 있는 코트야드가 있다 바로 옆 리즌얼 박물관에 간다. 그리고 15세기 프레스코 성화가 있는 아담하고 소박한 성비타 성당에서 다리 쉼을 한다. 잠시 평화롭고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께 기도한다. 성당을 나와 스보르노스티 광장을 지난다. 이곳은 ‘화합’이라는 의미의 넓은 광장으로 흑사병 퇴치를 기념하는 석조기둥과 고풍스럽고 장식적인 중세시대의 건물들이 빙 둘러 있다. <Money can’t buy happiness but can buy burgers)라는 글귀가 새겨진 재미나는 버거집을 지나면서 웃어본다. 오늘 일정을 마감하기 전 블타바강의 거센 물줄기와 물소리를 듣고 싶어 강가의 카페 카페 믈레이네크에 간다. 핫초코와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나를 시켰는데 에스페르소잔에 커피와 따뜻한 물, 크림이 따로따로 나온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체코어로 “체코의 오솔길”이라는 뜻. 1992년 마을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인구 1만 5천 명에 불과한 이곳으로 연간 15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모여든다. 16세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성이 개축되면서 둥근 지붕의 탑과 회랑들이 추가되었다. 성안에는 영주가 살던 궁전과 에배당, 조 페소 바로크 양식의 극장과 정원이 재현되어 있고 중세 귀족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특히 성 벽에 있는 벽화는 스트라비토라는 벽돌과 건물 장식을 입체적으로 그린 독특한 양식이다. 이곳에는 20세기 이후 건물이 한 채도 없다. 16세기와 18세기에 세워진 건축물만이 마을에 가득하다. 크롬노프성은 마을 주민의 삶과 동일체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성안 도서관과 미술관, 공연장에서 문화체험을 하면서 지식을 축적하고 교육을 받아 자신의 적성에 맞게 요리사, 정원사, 연주가, 무용가, 석공, 목공, 의상디자이너등 성유지와 관리에 필요한 일을 직업으로 삼아 고향을 지킨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의 성에 대한 애착은 대단해 성보수공사를 비롯해 성관련 축제에 주민 70퍼센트 이상이 참여한다고 한다. 18세기 바로크식 극장에서 오페라 연주회 음악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마을 주민과 16세기 보헤미안식 전통요리를 연구하고 재현하는 음식축제를 하며 특히 주민들을 대상으로 요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숙련된 고급요리사들을 양성한다고 한다. 마을 주민모두가 관광관련업에 종사하는데 관광해설사, 문화저도사, 레포츠업체, 호텔기념품가게 등에서 일한다고 한다. 성안 도서관은 지금도 자연과학, 지역역사를 공부하는 곳으로 주민들이 평상시 활용하고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너무 부럽다. 박제화되지 않은 역사와 전통을 어떻게 주민들과 함께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좋은 본보기가 되어주는 것 같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쉬운 것은 에곤쉴레 미술관을 찾아갔는데 그의 진품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빈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서운해서 복제품을 하나 구입한다.

11월 9일 여행 9일째 잘츠부르크

벌써 여행이 중반부를 넘어서고 있다. 아름다운 크룸로프를 떠난다. 덜컹거리는 슛케이스를 끌며 Flix 버스정거장으로 향한다. Flix 버스는 레지오젯 보다 더 소음이 있고 청결상태가 좋지 않다. 버스에 간이화장실이 있는데 비릿한 지린내가 계속 올라와서 힘들다. 오후 1시경에 잘츠부르크 Hell brunner landesstrebe 역에 도착. 마켓플라자로 가는 트램을 탄다. 트램 안에서 자동기계를 이용해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호텔 <레오나르도 부티크>가 이번 숙소이다. 친절한 근욱 씨가 선물로 이곳을 부킹 해줬다. 언제나 고맙다. 미라벨 공원이 가깝게 있고 바로 유네스코 지정 잘츠부르크 가를 걸어서 관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호텔에서 안내해 준 식당 Superstanza라는 이 텔리 언 식당에서 라쟈냐와 파스타를 먹고 길을 나선다. 다리를 건너니 잘츠부르크 대성당이 코앞이다. 잘츠부르크는 <소금의 성>이라는 뜻으로 중세 이전부터 이곳에서 채굴된 소금이 강을 따라 여러 지방으로 팔려나갔고 그 돈으로 성을 만들고 유지 보수하였다 한다. 평균 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실내공간이 있는 대성당. 이곳에서 모차르트의 초기곡이 연주되었다. 중부유럽의 포교활동을 위해 주교들을 여러 나라에 파견한 가톨릭의 본당으로 로마시대 때 지어진 오래된 건물. 규모가 압도적이다. 모차르트 광장에 세워진 현대적 디자인의 <공과 모차르트> 조각과 돈조바니 조각성을 감상한다. 가을 날씨답게 쌀쌀하지만 공기가 신선하다. 주석간판이 다채롭고 아름다운 <게토라이데 거리>에 있는 모차르트 박물관에 간다.

모차르트 박물관은 게또라이데 거리에 있다. 원래 이 건물은 세인트 피터 수도원 소속 건물이었다. 12세기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레오폴드모짜르트 즉 모차르트 부친이 그의 아내 앤과 결혼해서 이 건물의 3층으로 이사한다. 이곳에서 26년간 살았다 한다. 3층에는 부엌, 거실 침실 서재 등이 있다. 이 건물에서 7명의 자녀들이 태어났고 그중 2명만이 생존하여 어른이 되었다 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가 1756년 그의 여자형제 마리아 앤 볼프강이 1751년에 태어났다. 1856년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전시회가 여기에서 열렸고 국제적인 모차르트 파운데이션이 1880년에 이곳에 박물관을 만들었다. 모짜르크 트는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에 소속된 음악가였지만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음악의 메카였던 빈을 동경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옮겨 대부분의 작품을 빈에서 제작한다. 학생시절에 본 아마데우스 영화에서 나는 방정맞게 웃어대는 천재적인 작곡가 모차르트 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넘치나 천재적인 모차르트의 재능을 갖지 못해 번뇌에 사로잡히고 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에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모차르트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그때 당시 유행했던 연쇄상구균 감염 후 사구체신염이었을 가능성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그 증거로는 죽기 전 심한 발열과 부종으로 모차르트가 힘들어했다는 것. 어쨌든 35세의 이른 죽음과 3급 장례로 다른 이들과 함께 구덩이에 던져지는 그의 주검은 전 인류의 음악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인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비참한 최후이고 비극이다. 그의 주검은 아직도 수습되지 못하고 있다. 호텔에서 구입한 <잘츠부르크 카드>를 27유로를 주고 구입했다. 24시간 내에 사용해야 하는데 주요 박물관은 다 입장 가능하다.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바이올린

모차르트는 생애 삼분의 일이 넘는 날을 순회연주공연을 하며 지냈다. 어린 시절 덜컹거리는 코블스톤과 비포장도로를 거의 온종일 마차를 타고 다니며 연주공연을 했을 그를 생각하니 참 안쓰럽다. 응급약과 약재들이 전시된 것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아리다.

광장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구입한 후 역사가 300년은 족히 넘었다는 <카페 토마셀리>에서 비엔나커피(아인쉬페인)를 마신다. 할아버지가 서빙하는 것도 멋지고 한국인인 줄 알았는지 김치찌개를 좋아한다고 웃음 지며 말한다. 여긴 아메리카노 커피라고 불리는 커피는 없다.. 커피는 에스프레소를 기본으로 한다.
카페라는 블랙커피가 좀 비슷하다. 아이리쉬 커피, 카푸치노, 라테, 그리고 설탕과 우유크림이 들어있는 아인쉬페인. 비엔나커피는 없다.
11월 10일 (금요일) 여행 10일째 잘츠부르크

호텔조식은 프라하 로트 호텔에 비하면 형편없다. 감기기운이 돈다.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먹고 식사 후 미라벨 궁전으로 향한다. 그 당시 대주교령이었던 잘츠부르크의 이곳에 개주고는 자신이 나흘 12명의 아이와 애인을 위해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뜻이 미라벨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성직자가 아이를 그렇게나 많이 낳고 늘 그렇지만 호화롭게 살았다는 게 아이러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 촬용장소여서인지 아침부터 관광객으로 붐빈다. 실제 그 영화에 나온 장군은 해군장군이었는데 나중에 가족과 함께 영화와는 다르게 성을 탈출하는 게 아니라 미국 버먼트주로 이주해서 가족 합창단으로 공연을 하고 펜션을 운영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두 번째 집 <분홍색 집>에 간다. 이곳이 재능이 모차르트만큼 탁월했지만 동생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모차르트의 누나 마리아 애나가 살았던 곳이다. 그녀는 말년에 눈이 멀었지만 이곳을 방문한 이들에게 모차르트의 생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숫자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21,120 (모차르트가 빚으로 남긴 유산), 6 ( 모차르트의 기상 시간), 3(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한 나이), 150( 그의 키, 꽤 단신), 18( 그의 바지수 ), 1( 돈조바니를 하루 만에 작곡), 2065( 돈조바니가 꼬신 여자의 수), 0 ( 아마데유스의 직계후손), 1000( 그의 와이프 콘스탄에게 보내는 사랑의 키스), 14( 괴테가 모차르트를 연주회에서 들었던 나이), 8( 그가 소유한 실크스토킹의 수, 아마데우스 영화가 오스카 상 8개 부문 수상) 3720( 연주여행일 ), 6.5( 코치를 타고 모차르트 가족이 연주여행을 할 때 평균 시간당 움직인 킬러미터)

게트라이트 거리를 걷는다. 그 건물이 무엇을 파는 가게 인지를 글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알 수 있게 한 주석그림간판들이 시선을 끈다. 게트라이데 거리 모퉁이에서 아주 맛있는 빵맛집 Joseph brot를 발견. 맛있는 머핀과 커피를 마신다. 근처에 있는 레지던츠 박물관과 미술관을 간다. 17-7년 대주교에 의해 High barogue 양식으로 이곳을 모던아이즈했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아파트먼트다. 화려하게 장식된 Knights Hall, Conference Hall, Audience Hall, 그리고 대주교의 사적공간, 침실, 갤러리 ( 램브란트의 기도하는 올드 레이디)등을 볼 수 있다. 모차르트가 신동으로 어렸을 때 초연한 뮤직룸도 있다. 그 당시 음악가들은 Middle class servants 정도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모차르트는 적어도 난 요리사 들보다 위에 앉아있는 영예가 있어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In Spirit bieter Huber”라는 디지털과 설치 미술을 보았다. 작가는 실존의 다양한 양상들, 즉 인간이 고통에 대한 뿌리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표지에는 부정적인 느낌을 유발할 수 있으니 이 전시회에 주의를 요청한다고 돼있다.

레지던츠 건물 내 미술관에 있는 램브란트 그림 <기도하는 올드 레이디>

레지던츠 건물 미술관

돔 관람 후 뒤편에 있는 세미터리( 묘지)에 들러 경건한 시간을 잠시 갖는다. 저녁식사는 Korea Hibituous (무궁화식당)에서 오랜만에 한국음식을 맛보는데 이게 Soul Food라는 것인가 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 외국인들이 많이 와서 식사하는 곳이다.
11월 11일 여행 11일째 잘츠부르크에서 프라하로

호엔 잘츠부르크성

OBB로 예약한 기차를 타고 프라하로 돌아간다.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Linz에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는 여정. 오전에만 마지막 잘츠 부르크를 보러 간다. 1077년 게브하르트 폰 할텐쉬타인 주교의 명으로 세워진 페스톨스부르크라는 높은 언덕에 세워진 중세성이자 요새인 호엔 찰스부크르에 간다. 188년대에 만들어져서 그때부터 전동으로 운영되고 있는 전동레일차 푸니쿨라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성은 요새이자 그 당시 성과 관련된 일을 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인지라 교회당, 곡물창고, 식당, 교육시절등 다양한 건물들이 모여있다. 마리오네트 공연장에서는 성에서 발생한 화재를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주는데
이롭다. 그 당시 귀족들과 성직자들은 세금이 면제되었지만 성밖 서민들은 무거운 세금을 궁핍한 생활을 하였고 마치 이는 인두세까지 물려 세금을 징수했던 중세 여느 나라와 다름없다. 과도한 세금징수는 농민들의 조세반항을 불러왔고 이는 1525년 농민봉기로 터져 나온다. 성안 영주와 농민들은 격렬한 전투 끝에 합의에 이르렀고 이는 봉기가담자들에 대한 면책이 주어졌지만 세금인상을 막지는 못했다. 씁쓸한 최후이다. 스튜어드 방(Steward's Chamber)에 간다. 1540년에는 난방시설이 없었다고 한다. 주요 봉직자 중 cup boarder, marshal chamber lain , steward 이렇게 영주가 수발을 들었다 한다. 스튜어트는 가장 고위급 오피셜이어고 궁정을 관리하고 살림을 총괄했다고 한다. 나중에 점차 일이 줄어들면서 감독을 하거나 테이블서빙을 했다 한다. 이후 많은 이들이 성으로 스튜어드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짐을 챙겨 OBB 잘츠부르크 중앙역으로 간다 플랫폼 B 기차는 깨끗하고 편안했다.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 비싼 이유가 있다. 오픈티켓이라 지정좌석이 없어 좀 걱정했는데 그럴만한 게 승객이 많지 않다. 가격이 비싸고 바로 프라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역인 Linz에서 프라하행으로 환승해야 한다. 실수로 1등석 좌석표인데 난방이 안 되는 3등석 좌석에 앉아있다 두 번째 검표원의 안내로 서둘러 좌석을 옮긴다. 1시간이나 허비하다니... 난방도 등급에 따라 다르다니 자본주의적이다. 7시 40분경에 돌아와 지하철 C와 A를 타고 숙소인 호텔 로트로 돌아온다.
11월 12일 여행 12일째 다시 프라하

아쉬워 프라하에서 하루 일정을 더 갖는다. 자유여행의 큰 장점 중 하나는 일정을 무리하지 않고 자유롭게 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머리서 이동수단을 선택하고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페널티 없는 여행을 하려면 사전에 신중하게 준비를 해야 하지만 불가피한 일이 발생하거나 여행 중 마음이 바뀌면 여행일정을 조절할 수 있어서 좋다. 나는 2인 이상의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엔 인원이 적을수록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서로 잘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파트너라면 더 좋을 것이다. 이번 여행 파트너는 절친 중 한 명. 너무 꼼꼼해서 여행일정이며 경비계산은 친구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 다행히 영어를 전공한 내가 다소나마 여행하는데 도움이 되어서 기쁘다.

다시 바츨라프 광장을 찾는다. 광주의 광주시민광장과 비슷한 민주주의 역사의 현장. 지금은 관광객이 북적되고 수없이 많은 상가가 들어섰지만 이곳은 수세기에 걸쳐 시민들이 민주주의와 독립을 외치며 저항했던 피의 현장이었다.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서있는 바츨라프 동상의 이름을 따라 바츨라프 광장으로 부른다. 길이 약 700 미터 폭 60 미터의 쭉 뻗은 대로. 과거에는 말이 거래되던 마시장이던 곳. 14세기 카를 4세 때 오늘의 광장모습을 갖추게 된다. 1620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와 체코 신교귀족들 간의 <빌라호라전투>에서 신교가 대패한 후 약 300년 동안 제국의 식민통치를 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 후 1918에 체코슬로바키아로 통일하여 독립하고 제1대 대통령 토마스가릭맛릭이 이곳에서 독립선언을 한다. 1939년 체코를 제외한 독일과 연합국이 맺은 <뮌헨 협정>으로 비극적 이게도 체코는 10년간의 평화로운 독립민족국가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다시 독일의 지배하에 놓이며 주요 공업시설을 군수산업화하는 데 사용되고 만다.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했을 때와 왜 이리 비슷한가. 전쟁 이후 냉전체제에서 체코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고 1948년 2월 체코 구시가 광장에서 공산당위원장 "고트발트"에 의해 공산화과정을 겪는다. 이후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감시가 자행되는 공토정치가 시작 <알렉산드로 드보체크>를 주축으로 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된다. 하지만 75만의 군대를 이끌고 소련이 침공하여 이 바츨라프 광장으로 진입하였는데 처음엔 프라하 시민들은 같은 슬라브민족이라 발포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의 발포로 수없이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학살되었다. 이후 무력으로 좌절된 프라하의 봄을 겪은 시민들의 패배감과 침묵의 무력감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이런 와중에 1769년 카를 대학교 철학부 학생이던 <얀팔라츠>가 < 체코여 다시 깨어나라>고 외치며 분신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어 같은 장소에서 <얀자이츠>도 분신을 하는 비극적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추모하는 청동십자가상이 바츨라프 광장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국립박물관 앞 도로변에 누워있다. 1985년 반체재인사이자 극작가 출신의 <하벨>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정책으로 소련이 해체되면서 무혈혁명인 벨벳혁명으로 하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 당시 70만 명의 체코인들이 이곳에서 모여 축제의 함성을 지르며 승리를 자축했다고 한다. 이후 국민투포를 통해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1993년 분리독립한다. 현재는 옛날과는 많이 다른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사회주의적 수정 자본주의체재를 운영하고 있다. 체코인들에게 정서적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거의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캄파지역으로 간다. 캄파지역은 카를교 다리 아래 있는 지구로 홍수가 나면 침수가 되곤 하는 저지대이다. 다리건설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주고 이곳에 거주지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캄파지역은 녹음이 짙고 강을 끼고 있어 전망도 훌륭하며 무엇보다 공원이 있어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거나 차를 마시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카페 Ebel>은 스펠셔티 커피를 파는 아주 작은 골목 커피숍인데 커피와 케이크 맛이 일품이고 점원이 친절하고 무척 다정하다.
프라하 여행의 마지막 저녁식사는 용기를 내서 비용걱겅하지 않고 고급레스토랑 <Mlynec>에서 한다. 저녁이라 카를교가 보이지 않지만 카를교 바로 아래에 있는 식당이다. 미리 예약을 하고 가는 곳이지만 그냥 가보았다. 다행히 식사시간을 두 시간으로 짧게 갖는다면 자리를 줄 수 있다 해서 오케이 했다. 예상대로 코스별로 나오는 요리
11월 13일 여행 14일째 카를로비 바리

까를로바리 온천마을

까를로바리 온천마을

카페 포프
아침에 프라하 마을버스인 194번을 타고 카를보비 바리로 가는 플로렌스 버스정거장까지 간다. 생각보다 정거장이 많은 아주 작은 미니버스. 버스기사는 무뚝뚝한 체코아저씨. 그곳까지는 2시간 반정도 걸릴 예정. 티켓은 2만 원 정도. 카를로비 업타운 버스터미덜에서 13번 버스를 타고 10여분 정도가 가면 구굴에선 없는 다운타운으로 가는 푸니쿨라가 있는 임페리얼 호텔까지 간다. 전동케이블카인 푸니쿨라가 이곳에도 있다니. 테플라강을 따라 아름다운 중세식 건물들이 쭉 도열하고 있는 다운타운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온천마을이다. 숙소를 그랜드포트 호텔로 예약했다. 그곳에 있는 Cafe Popp에서 디저트와 커피를 마시려고 들른다. 이곳은 가이드북에 소개가 될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맛있는 디저트카페이다. 하지만 여자종업원들이 불친절하고 거만해서 기분이 상하고 만다. 처음으로 구굴에 리뷰를 남기면서 화풀이를 한다. 이곳까지 굳이 찾아온 손님들에게 저렇게 약간은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보여도 되는지.

여행은 길을 잃어야 예기치 않은 풍경들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도 그렇다. <다이나 전망대>를 검색했더니 구굴맵에서는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서 볼트택시를 호출 200 쿠르나 싹이나 주고 디아나 전망대를 갔다. 해가 저무는 오후 시간이고 비가 추저추적 내리는 어둑한 산길에 있는 주차장에서 하차한다. 이곳이 맞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숲길을 한 시간가량 걸었는데도 안개가 깔린 저물녘 산길은 끝이 나지 않는다. 약간 으슥한 곳이라 사람들은 없고 해는 저물고 있고 이러다 길을 잃어 버리면 어쩌나 라는 생각으로 불안초조해하면서 한참을 걷다 보니 안갯속에 다이나 전망대가 흐릿하게 보여 아 다행이구나 안도감. 그렇지만 이곳을 찾았던 괴테를 비롯한 유명한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이 길을 산책했다고 하니 불안감속에서 걸었던 산책길이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적하고 한가하고 낙엽이 폭신폭신 밟히는 늦가을의 정취를 제대로 만끽했으니까. 다이나 전망대를 갔더니 세상에나 푸니쿨라가 다운타운 호텔까지 바로 5분이면 직하강해서 가는 게 아닌가.. 허망했지만 얻은 것이 더 크니까 뭐.
브리지델리 콜로라다

트리즈니 콜로라다. 레이스 뜨개처럼 섬세한 아치가 눈길을 끄는 목조건물. 카를 4세 온천수로 알려져 있다. 상처받은 사름이 다리를 담갔던 온천수. 에 당시를 재현한 동판이 있다.

자메츠카 콜로나다는 "성"을 뜻하는 체코어다. 카를 4세의 허가를 받아 그의 사냥을 위한 성이 있던 자리에 1910년 3년에 걸쳐 아르누보 양식의 콜로나다를 지은 것.
그 외 블린스키 콜로나다는 가장 큰 콜로나다로 1871년에서 1881년까지 지어진 곳. 건물 위 테라스에서 12개의 조각상이 있고 이는 1년 12개월을 상징한다. 그리고 열주처럼 132개의 기둥들이 쭉 도열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천체험과는 달리 이곳은 "콜로나다"라는 길게기둥이 세워진 곳에서 온천수를 받아 마신다. 온천욕을 하는 곳도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온천욕장이 있어 몸을 담그는 체험과는 사뭇 다르다. 호텔에도 온천욕이 있긴 하지만 보통의 실내수영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온천수가 나오는 곳이 강가를 따라 5~6곳이 있다. 우리도 라젠스키 포하레크라 불리는 손잡이 끝에 온천수가 나오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컵을 하나씩 사서 온천수를 받아 마셔본다. 약간의 철과 미네랄 맛이 난다. 제일 먼저 간 곳은 용솟음치는 온천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3초마다 자체압력으로 12미터 까지 치솟는 간헐천이 실내에 있는 브리지델리 콜로라다. 미네랄이 다량 포함되어 성인병예방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서 예부터 유럽 사람들이 즐겨 찾았다 한다. 온천수 온도는 30,60,90도 이렇게 표시가 되어있다. 18세기부터 의사들이 효능이 있다고 치료제로 추천한 온천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건강체험 삼아 온다고 한다. 근처에서 <오 플라트 커>라는 웨하스처럼 생긴 과자를 기념품으로 산다. 반죽에 온천수와 향신료를 넣어 만들었다.
카를로 바리는 "카를왕의 온천"이라는 뜻이다. 러시아나 유럽의 부호들이 치료 겸 휴양차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러시아인들이 세운 아름다운 비잔틴양식의 정교회당이 있다. 약술인 <바헤로프카>는 마셔보지 않았지만 꽤 유명한가 보다. 온천수와 허브 그리고 향신료를 넣고 만든 술이다. 기념품으로 팔린다.
저녁식사는 호텔 근처 팔라크키 식당. 샐러드와 굴라쉬수프 그리고 미디엄으로 구운 고기로 적당한 가격에 맛있게 먹는다 숙소로 돌아와 온천 수영장과 스파를 이용한다
카를로바리 둘째 날

엘리폰트 카페

엘리펀트 카페

엘리펀트카페

엘리펀트카페

카를로비리
여전히 흐린 날씨에 보슬비가 내린다. 300년이 됐다는 <엘리펀트 카페>에서 상당히 맛있는 당근케이크 와 부드러운 smoked 무랭이 듬뿍 있는 스펀지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다. 3시 버스를 타고 업타운의 버스터미널까지 가는데 학생들이 하교시간이라 버스에 재잘거리는 말과 웃음이 가득하다. 절로 마음이 흐뭇하다.
무사히 2주간의 체코여행을 마칠 때가 되었다. 여행기념으로 "Svejk"식당에서 보헤미안 전통 족발인 콜레뇨-훈제된 돼지갈비를 바베크 소스와 마늘 마요네이즈 그리고 머스터드를 이용해 만듦- 와 그릭 샐러드와 발칸 치즈를 먹어본다. 기본 상차림으로 오는 몇 조금의 빵과 양통통에 <쿠베르차지>를 매기는 것이 참 맘에 들진 않는다. 밑반찬을 무료로 무한 리필 해주는 우리나라가 참 대단하다. 미리 알았다면 선택사항이라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꼭 주문하지 않아도 된다. No , Thanks가 이럴 때 필요하다. 체코에 와서 필스너 라거 맥주사랑에 푹 빠졌다. 마지막으로 체코여행을 기념하며 이번엔 미디엄 사이즈로 건배를 한다. 다시 체코에 올 수 있을까.

"Svejk"식당 보헤미안 족발

기본상차림 쿠베르

11월 15일 여행 15일째 프라하 유대인지구 그리고 구시가광장

올드뉴 시나고그

유대인지구 시나고그

체코여행 마지막 날. 금세 두 주가 지나간 것이 믿기질 않는다. 느긋하게 숙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프런트에 짐을 맡긴 뒤 근처에 있는 <유대인지구>에 가서 시나고그 건물의 외관만 구경한다. 그곳에 있는 기념품가게에서 예쁜 색깔이 생생한 크리스털 컵을 선물로 하나 산다. 비행기는 6 시행이라 이곳에서 4시쯤에 볼트를 이용해서 공항까지 가면 된다. 긴장감이 풀리니 위장염에 미열이 느껴진다. 아쉽지만 돌아가서 쉴 집이 있어 행복하다.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있는 것일까.
프라하에 있는 유대인지구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0세기부터 프라하에서 살기 시작한 유대인들은 13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게토라는 곳에 분리되어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았다고 한다
"마이셀 시나고그" 에는 유대인들의 삶의 흔적이 담긴 물품들이 수없이 많이 소장되어 있는데 유대인을 말살한 후 이곳을 그들이 유물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계획적으로 나치가 그들이 생활용품과 기록물들을 모았다 한다.
"올드뉴 시나고그"는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밖에서 잠깐 안내문을 읽는다. 1270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로 특이한 것은 유대교식 시계가 보통시계와 반대방향으로 돌고 있다는 것. 무엇을 의미할까.
골렘 (Golem)을 알게 되었다. 체코의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인형. 기독교의 유대인 탄압이 극심하던 1580년대 랍비 로위가 기독교인들에 맞서 성경에 나노는 골렘을 만들었다. 골렘은 몸집이 커서 유대인을 보호하지만 어느 날 난동을 부리자 올드뉴시나고그 다락방에 가뒀다고 한다. 나뭇가지에 흙을 발라서 사람의 형상처럼 생겼다고 한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에 와서 나치의 인종청소였던 유대인학살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하지만 가자지구에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가자지구 거주 팔레스타인이 죽음을 당하고 있다. 사망한 팔레스타인 수는 희생된 유대인수의 몇십 배가 넘는다. 그리고 가자지구의 80퍼센트 이상의 거주자들이 건물이 파손되고 유엔에서 보내준 기본 의약품과 생필품이 차단되고 턱없이 부족한 이주민 신세로 전락했다. 반인륜적인 역사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나치의 집단수용소와 끔찍한 가스실 학살 및 생체실험 희생자가 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핍박받으며 유럽의 변방지역, 분리지역인 게토에서 차별받는 삶을 살았던 유대인들이 또다시 팔레스타인들이 살던 곳을 점령하고 그들을 삶의 터전에서 추방하고 가두는 일이 20세기와 21세기에 일어나고 있으니 얼마나 한심한 역사적 아이러니인지. 단지 인종과 종교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코스타 커피숍은 여행자들에게 편안한 쉼터가 되는 곳인 것 같다. 편안하게 한쪽 구석에 오랫동안 앉아서 여행기를 쓸 수도 있고 인터넷을 이용 필요한 정보를 검색할 수도 있는, 그렇게 비싸지 않은 커피와 쿠키를 먹을 수 있다.

마소 버거

구시가광장 스트릿마켓

구시장 스트릿마켓 굴뚝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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