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5월의 제주 ( 3박 4일 )보롬왓, 바농오름, 거문오름. 포도뮤지엄 그리고 가파도

숨그네 2024. 5. 6. 23:48

 

5월의 제주는 아스라한 녹색의 짙음과 얕음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시사철 아니 매일 다른 표정과 색깔로 오는 이들을 반기거나 밀쳐내는 제주.
이번 여행은 딸과 함께 하는 3박 4일의 여정이다. 제주행 비행기에서 한겨레 신문에 실린 어는 노신사의 법정뉴스. 그는 30일 제주지방법원에서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며  4.3 관련 재심재판에서 ”빨갱이“라는 딱지로 평생 자신을 옥좨왔던 족쇄를 벗었다. 그의 70여 년의 개인사는 한국의 현대사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그는 해방이 되자 그의 고향 제주 가시리로 돌아왔지만 4.3이라는 광풍에 휩쓸려 다닌다. 영문도 모른 채 피신을 다니다 양심적인 토벌대를 만나 간신히 목숨을 건사하고 피신을 하지만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는 국가보안법 위반과 내란죄 명목으로 형을 받는다. 재판도 없이 징역 2년 죄를 받은 전쟁 직후 예비검속의 바람으로 수많은 제주민들이 바다에 수장되거나 총살당하는 과정에서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고 쓴 뒤 명령을 거부한 또 한 번의 양심적인 경찰서장의 용감한 결단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뒤 자신의 근거 없는 좌익죄를 벗어버리기 위해 군에 참전하기도 한다. 결국 그는 4.3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이 재판단에 요구한 무죄요청으로 드디어 무죄를 입증하고 명예회복이 되었다.
이렇듯 제주는 잊히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아픔을 안고 오늘도 나와 같은 여행객을 수없이 품고 있다.
예년과 달리 열대성의 잦은 비가 오는 요즘. 다행히 며칠간은 비소식이 없다.

보롬왓에  간다. 보롬왓은 바람 부는 밭이라는 제주 방언이란다. 청보리, 메밀등 밭작물을 볼 수 있고 튤립이나 유채꽃, 수국, 라벤더 그리고 삼색버드나무도 볼 수 있다. 꽃뿐만 아니라 양, 염소 등 다양한 동물도 볼 수 있다. 양이 있어 딸과 함께 당근을 주었더니 낡아 채듯 먹이를 향해 입을 벌리고 달려든다.

몇 년 전 알게 된 삼색 버드나무 숲이 그림처럼 펼쳐진 곳. 몇 쌍의 신혼부부들이 드레스를 입고 웨딩사진을 찍는 모습이 보인다.

청보리밭.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몸을 나긋나긋 흔들어 대는 청보리. 아름답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쪼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오규원 님의 한 잎의 여자가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나무껍질을 벗겨 물에 담그면 물빛이 푸르스름해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물푸레.
정끝별 시인은 이 시해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남자의 여자다 남자의 엄마이고 누이이고 아내이고 애인이고 딸이다. 남자의 과거이고 미래이다. 남자의 부재이고 심연이고 선물이고 폭력이다. 그러나 시작이고 끝이다. 그런 여자를 어찌 정의할 수 있으랴. 모두 가지지만 결코 가질 수 없는 그런 한 여자를 누가 가졌다 하는가.

조천읍 에코랜드와 돌문화공원과 가까운 곳에 있는 바농오름에 오른다. 친구의 소개로 무턱대고 와 보았다. BTS화보 촬영지라는 안내 문구가 나중에 보였지만 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화산송이 바닥의 주차장이 텅 비어 있고 주변에 사람이 일도 없어 약간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만 용감하게 입구를 찾아 오른다. 안내도에 따르면 3코스까지 있는데 1코스로 올라 3코스로 내려오는 길을 선택한다.  오름 주변과 능선에 가시덤불이 유독 많아 바농 (바늘의 제주방어)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생각보다 가파르고 긴 1코스. 준비 없이 오름을 오른지라 예상밖의 가파름과 헤어진 야자매트로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체감 경사 45도 구간에서는 가쁜 숨으로 헉헉거린다. 용눈이 오름은 이번에도 오픈하지 않아서 숙소 인근의 오름을 오른 건데 아휴… 입구에서 쉬지 않고 20여분 가쁜 숨으로 오르면 작은 전망대가 나오지만 고생의 보람을 주는 분화구나 너른 숲은 없다.

다니는 사람이 적어서일까.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걷다 보니 겁이 덜컥 난다. 길을 잃어버릴 것 같은 막막한 조바심이 생겨 슬쩍 숲 밖으로 보이는 목초지가 있어 과감히 목책을 넘어서 숲밖으로 나오니 넓게 펼쳐진 목초지 사이로 그림 같은 길이 나온다. 노루인지 사슴인지 후다닥 우리의 발걸음을 눈치챘는지 도망간다. 앞 뒤 아무도 없는 길이라 약간의 무서움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아휴… 해 질 녘에는 절대 가서는 안될 것 같은 오름이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지었지요.

-계절과 시간은 너무 빨리 달아나고 우리는 너무 빨리 늙고..

에코랜드 곶자왈에서 다시 만난 새우난. 뿌리가 새우처럼 생겨서 새우란이란다. 귀엽고 앙증맞은 게 이제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다. 에코랜드 곶자왈은 기차에서 내려 꼭 걸어봐야 한다.

국토서시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 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 치는 돌멩이 하나에 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멀리서 기적을 울리며 오는 기차를 기다리는 일도
우리를 태우고 낙엽 몇 장 같은 유리창을 달고 달리는 일도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꽃과 나무 그리고 사람들에게 시선을 던지는 일도
회답 없는 미소로 서늘하게 차창밖을 바라보는 일도
기차가 좋다.

조천읍 선흘리와 구좌읍 덕천리 일대에 있는 해바 456m의 거문오름. 거문오름은 용암동굴계를 모체로 알려져 이고 분화구에는 깊게 파인 화구가 있으며 그 안에 작은 봉아리가 솟아있다. 2007년에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이후 매년 국제트레킹대회가 개최되곤 한단다.
이곳에서 흘러나온 용암류가 해안선까지 도달하면서 20 여개의 동굴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용암동굴인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물등이 있단다.
트레킹이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당일 예약이 불가하니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매주 화요일은 탐방할 수가 없다.
트레킹은 숲해설전문가와 함께 가는 투어다.
먼저 삼나무 조림지가 펼쳐진 경사도가 꽤 있는 길을 쉼 없이 올라가야 한다. 팀을 비롯한 탐방객이 많이 온지라 해설사님의 발걸음은 전문 트래킹을 하는 사람들의 보폭으로 쉼 없이 올라가서 숨이 턱에 닿았다. 삼나무 군락지는 생장속도가 빠르고 바람 많은 제주에서 방품림의 역할을 하지만 현재는 제주 자연환경의 복원을 위해 인공조림을 없애고 있다고 한다. 삼나무는 제주방언으로 쑥대낭이다.

거문오름 탐방로는 세 코스가 있다. 약 2킬로의 정상코스 ( 약 1시간 소요), 약 5킬로의 분화구 코스 (약 2시간 30분 코스) 그리고 6.7킬로의 자유탐방코스 (약 3시간 30분 소요)  해설사와 함께 하는 코스는 1코스와 2코스다. 3코스는 2코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자유의사로 갈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침략에 대비해  약 8만의 일본군이 제주에 상주해 있었는데 제주에는 120여 개의 갱도 진지가 있으며 거문오름에는 10여 개가 있다고 한다.
만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져 전쟁이 끝나지 않았으면 아마 제주도는 전쟁터로 쑥대밭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식민지의 생채기처럼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갱도와 같은 전쟁을 위한 군사시설로 훼손한 일본인들의 만행이 새삼 분노를 자아낸다.

나무와 가시덩굴 식물이 화산지대라 흙이 없는 지형으로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생장하는 특이한 화산 숲이 곶자왈이다. 해설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흙보다 바위가 물을 품고 있는 수량이 훨씬 많기 때문에 오히려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보다 바위에 뿌리를 내린 곶자왈의 나무들이 수액과 영양분을 흡수하기가 더 좋다고 하신다. 하지만 요즘 곶자왈의 5퍼센트가 사유지여서 개발이 한창이라 곶자왈 지킴이라는 자연보호단체를 만들어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금을 만들고 곶자왈이 해체되는 일을 막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제주에는 구한말 시대에 숯을 활발히 만들다가 점차 쇠퇴했는데 이 숯가마는 현무암을 둥글게 쌓아 올려 아치형으로 만들었다. 가마 뒤쪽에 통풍구가 있다 한다. 바로 근처에 움막을 지어놓고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이렇듯 오름과 분화구등이 제주인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했다.


풍혈. 숨골이라고 한다. 다량의 낙반이나 암석들이 성글게 쌓여 있는 틈 사이에서 바람이 나오는 곳을 말한다. 지열이 평균 11도라서 여름엔 매우 시원하고 겨울엔 춥지 않게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풍혈이 분화구 주변에 여러 군데 있다.
풍혈 때문에 남방계, 북방계 식물들이 공생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다고 한다.

내가 듣기에 식나무, 붓순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붓순나무는 나무를 떼도 연기가 나지 않아 4.3 때 밥을 짓던 나무라고 한다. 이번 탐방에는 붓순나무는 보지 못했다.
해설사님의 설명으론 서로 가지를 포개어 생장하는 나무들은 가장 진화된 종이라 한다. 이런 나무들을 곶자왈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숲에 들면 코를 찌르는 냄새를 내는 나무가 상산나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주인들은 시체낭이라 한단다. 나무냄새가 강해 오일장을 하던 제주인들이 시체를 덮거나 말이나 돼지막에서 나는 악취를 막기 위해 이 나무의 잎사귀를 사용했다고 한다.

거문오름 수직동굴
35미터의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는 용암동굴인데 2층 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생겼다고 한다. 멀리서 조망한다. 위험한 곳이라서 입구에 철창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이곳에도 4.3의 비극적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토벌대들이 4.3에 가담했다고 생각한 민간인들을 이곳에 데려와 동굴에 던져 넣었다고 한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난 후 공포로 인해 입을 막고 살았던 목격자의 증언에 의해 이곳에서 몇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4.3이 비극이 제주 이곳저곳에 증언하듯 묻어있다.

쉬지 않고 3시간이 족히 넘는 트레킹을 한지라 자유탐방인 3코스를 하고 싶었지만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2코스 후 하산하기로 했다. 하산 코스는 슬슬 걸어올 수 있는 완만한 길이다.

세계자연유산 등재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 바닥의 원은 지구, 그 위에 굴곡진 타원은 제주를 상징하고. 기둥과 두 개의 겹쳐진 원은 세계자원유산의 가치가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한다고 한다.

친절한 해설사님이 근처 맛집을 소개해주신다. 선흘방주할머니 식당. 그리고 빌레와 너드랑 (영양밥 한정식)
빌레와 너드랑은 식재료가 떨어지면 식당을 마감하기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대신 선흘 방주 할머니 식당에서 맛있는 도토리 부침개 그리고 삼채곰취만두. 검정콩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꼭 오고싶은 곳. 사진 찍기도 전에 너무 배가고파 허겁지겁 먹었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 속에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원재부터 우리는 잠시 스키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터 왔고, 아직도 세상에 호의를 느낄 수 있음을 기뻐하자. 행 독한 인생이었던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던, 어느덧 땅거림가 내려왔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크기가 가늠된다.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함을 얻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 맣다. 그러나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백배로 성취도기도 해다. 위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파스칼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거문오름 탐방을 마치고 1시간가량을 달려 < 포도 뮤지엄>에 왔다.  언제나 의미 있는 기획전을 하는 미술관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기획자 김희영 님의 아름다운 글을 옮긴다.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오늘날 노년의 삶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온기를 더하고 세대 간의 공감을 모색하기 위해 기획되었다고 한다.
전시에 참여한  10명의 작가는 노화 가운데서도 특히 인지저하증을 통해 한 사람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고독의 순간을 예술적 시선으로 집중하고 우리의 정체성과 기억의 연속성을 해체하고 사물과 감각의 지층을 서서히 허물어뜨리는 과정으로 마침내 우리를 완전히 고립시켜 내면의 무한한 공간 앞에 홀로 서게 한다. 그렇기에 이 전시에서 인지저하증은 단순한 질병의 형태를 넘어 ㄷ가장 외딴 구석까지 탐험하게 하는 은유이다. 이것이 언젠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고 모든 생명의 불가피한 취약함에 공감할 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삶의 위트를 ㄹ빛나는 조각보처럼 엮어내고 있는 예술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연약함과 존엄함을 발견해 나갈 수 있다.

쉐릴 세인트 온 지 <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사진작가의 어머니는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고 농장에서 수십 년 간 함께 살아온 모녀의 추억과 감정은 어머니의 기억과 함께 점점 상실되어 가는 듯했고, 작가는 사진 작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런 중 나른한 새살이 창에 스며드는 어느 오후에 문득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 작가는 어머니의 삶 속에서 가볍고도 명랑한 순간들을 포착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의 모습을 기록했다고 한다.

쉐릴 세인트 온 지 <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백발의 노인은 처음 맞는 햇빛인 양 수줍게 얼굴을 감싸 안고 있다. 잡풀이 묻어있는 윗도리와 얼굴을 가린 노인의 어색한 팔동작이 자연 속에선 마치 풀숲을 헤치며 그저 자리를 옮겨 다니는 휘파람새처럼 아늑하고 애처롭다. 휘파람새는 자신이 낳은 알인 양 뻐꾸기가 둥지에 놓고 간 알을 정성껏 키운다고 한다. 탁란번식이라 했던가. 생존의 법칙에서 놓여난 인간의 모습은 무심한 자연을 닮아간다.

쉐릴 세인트 온 지 <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
늙음은 폭거이다.라고 말한 이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우린 어쩌면 폭거에 휩쓸려가는 육체의 시들어감과 정신의 아득해짐을 견뎌야 하는 존재들 아니던가. 두렵고 애잔하다. 얼마 전 구순을 앞둔 노모의 빨간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톱을 보며 쭈글거리는 손과 대비된 빨간색의 손톱이 내뿜는 애절한 청춘을 동시에 보았다.

시오타 치하루, < 끝없는 선>
길게 늘어진 수 맣은 선들 사이로 문자 또는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무한한 생각과 감정들이 하얀 알파벳이 되어 흩어지낟. 전시질 중앙에 놓인 집필용 책상에는 접이식 상판이 달려있고 편지나 문서들을 수납하는 여러 개의 서랍과 칸막이가 있다. 오롯이 글쓰기만을 위해 마련된 이 가구는 기억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과정의 상징물이 된다. 한 사람의 삶을 구성해 온 무한한 텍스트들이 구조를 잃고 해체되면 무엇이 남을까. 잃어버린 이야기가 끊임없이 망각의 실로 흩어지는 이 공간에서, 손때 묻은 책상은 마치 기억의 보존자로소 잠시 멈춰 선 듯하다. 시오타 치하루는 무수한 실을 엮은 공간을 통해 생명, 삶, 죽음, 기억과 같은 보편적인 기억과 경험에 축적되는 무형의 감정들을 전달하는 설치미술가이다.

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미궁의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기 위해 나타난 영웅 테세우스와 사랑에 빠진 공주 아드리아네가 미궁을 만든 다이달로스에게 얻어서 미궁에서 테세우스를 길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건네준 실이 아드리아네의 실이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 그 실마리.
실은 어쩌면 인간이 결코 빠질 수밖에 없는 미궁과도 같은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그것이 합리적인 이성의 힘이 되었던 신화의 힘, 혹은 경험적인 직관의 힘이 되었던 우리를 구출하거나 구혼하는 그 무엇일 것이다.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무수한 실로 엮어내어 다시 편집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읽힌다.

데이비스 벅스, <재구성된 풍경 39>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의 풍경이 파편화되어 부서진 일상처럼 펼쳐진다. 조각난 캔버스와 합판은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재구성된 풍경> 연작은 쓰임을 다헀거나 건축 현장에서 버려진 합판들 위에 풍경화를 그려 파괴한 후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으로 완성된다. 전통적인 의미의 풍경화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도 여전히 또 다른 풍경을 펼쳐내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파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상실,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데이비스 벅스는 사회적 상호관계 지정학, 경제, 환경,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조각, 설치, 회화, 사진등의  매체를 활용하여 탐구한다.

파편화된 조각들을  마치 퍼즐놀이를 하듯 다시 재구성하여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거나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은 욕망이 기본적으로 이 작품을 보면서 든 느낌이다.
파란 하늘이 조각나 무너져 내릴 때 우린 불안과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언젠가 의식을 잃거나 인지의 부분이 장애를 일으켜 기능을 상실해 갈 때 우리 주변의 풍경이 이럴까. 우리의 인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테마공간 <Forget Me Not>
100년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배롱나무가 포도 뮤지엄과 수무의 공동작업으로 전시장 안에서 다시 태어난다. 생명의 기운을 머금어 싹을 틔우고, 녹음이 무성해지고,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백일 동안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이 나무는 모든 여정을 마치고 쓸쓸한 별이 되어 우주로 돌아가는 듯 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현들이 일제히 조화롭게 튜닝을 시작하면서 다시금 새롭게 발아하는 생명의 순환성이 암시된다 만물 속에 재생되는 나무의 영롱한 기억들을 몰입형 설치미술로 표현한 이 공간에는 총 여덟 대의 프로젝터가 사용되며 포도뮤지엄의 추억의 비디어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이 실제 비디오도 등장한다.

음악에 맞춰 펼쳐지는 입체적인 배롱나무의 탄생과 환희 죽음이 빛과 색의 변화로 연출되는 장면은 너무 감동적이다. 마치 인간의 삶을 재현해 놓은 듯 상징적이다.
삶의 기쁨과 슬픔, 열정과 절망, 환희와 파괴적 욕망, 그리고 절멸과 죽음, 다시 별로 돌아가는 고요와 새로운 삶, 윤회적인 모습이 보인다.

제주 3일째. 날씨는 여전히 5월의 화사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몸 상태가 거의 얼음상태. 전날 거문오름을 너무 빡세게 했나. 무릎 아래로 근육통인지 뻣뻣한 게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을 정도. 원래 계획으론 올레 21코스를 하려고 했으나 포기하고 대신 가파도를 간다.
작년 4월 가파도 청보리 축제가 열릴 때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해안가와 보리밭길을 달리던 기억이 나를 다시 가파도로 이끈다. 무엇보다 딸에게 추억거리를 줄 수 있을 거라 확신이 들어서..
가파도는 제주도 부속섬 주 4번째로  큰 섬이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바다를 헤엄쳐 가는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름은 가오리 (가파리)를 닮아 가파도가 되었다는 설과 덮게 모양을 닮아 ‘ 개도“로 부르던 것이 가파도라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설은 제주도에서 이곳으로 초기 이주한 사람들이 돈을 빌려준 본 섬사람들에게 돈을 가파도 그만 마라도 그만이라고 해서 한섬은 가파도, 다른 섬은 마라도라 불리게 된 거라는 농 섞인 설.ㅠ
해수면이 가장 낮은 섬. 가파도. 오르막길이 없어 1~2시간 이면 섬 전체를 도보로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포구 근처에 자전거를 대여하는 곳이 있어 자전거를 타고 씽씽 달려 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신분증을 맡길 필요가 없다.
매년 4월 초에서 5월 초에 가파도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청보리 밭 걷기, 올레길 보물찾기 야외공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단다.
파도너울 같은 청보리 물결이 넘실대는 곳은 장관이다.
가파도의 보리는 얼기설기 쌓아 올린 제주의 돌담과 바다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티스트 인 레지던스“라는 예술, 문화작가들의 창작 공간이 조성돼 있다.

역시 젊은 아이라 딸은 가파도에서 맛볼 수 있는 특이한 것들을 찾아낸다. 청보리로 만든 막걸리와 아이스크림도 있지만 청보리반죽으로 만든 핫도그에 꼴렸는지 자전거를 타고 보리밭을 돌더니 곧장 핫도그가게로 직진한다.

무꽃 인지 아니면 다른 꽃인지. 청보리 밭도 너무 넘실거리며 예뼜지만 바닷바람에 온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는 이 무더기 꽃들의 춤사위는 꺾이지 않는 들꽃의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이렇듯 바다와 가깝게 맞닿아 있는 길과 키 작은 초목들 그리고 사람들이 밭작물을 키우기 위해 방풍으로 쌓아 올린 구성진 돌담들이 앙증맞게 보인다.

어멍 아방 바위…
바위의 모양을 이렇게 상상하듯 붙였다. 먼바다를 나란히 앉아 돌아오지 않은 자식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먼 곳에 있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는지, 아님 힘든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바다를 보며 다리 쉼을 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서로 허허롭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지.

가파도 정기 여객선 블루레이, 운항시간은  아침 8시 40분부터 오후 4시 20분까지 30분 가격으로 있다. 승선요금은 성인 왕복 2만 원이다. 모든 매표는 승선신고서와 신분증이 필요하다. 모바일로도 승선예매를 할 수 있다. 여객선은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운진항에서 출발한다. 소요시간은 10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