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정끝별 해설>
-이 시는 조용필이 부른 <바람이 전하는 말>의 노랫말과 흡사하다. 의사이기도 한 마종기 시인은 고희를 앞두고도 여전히 젊고 댄디하다. 어더 ㄴ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나 권위로부터 자유롭다. 동화자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 무용가 박외선 사이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성장해 의과대학 재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40여 년간 방사선과 전문의로 지내며 시를 써왔다. 오롯한 그리움과 따뜻한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시. -
햇살이 차갑게 내려앉는 5월의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국가정원을 찾았다. 철마다 꽃을 바꾸어 오는 이들을 위해 선물처럼 주는 곳. 앉은뱅이 의자를 허리춤에 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꽃밭을 가꾸었을 나이 드신 아줌마들의 노고가 눈물 나도록 고맙다. 양귀비. 딸내미에 의하면 양귀비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하기 전 어느 병사가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양귀비꽃을 보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마지막으로 전한 것이 나중에 알려지면서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그 시를 읽었다 한다. 캐나다에선 마치 미모리얼 데이처럼 포피 ( Poppy) 모양의 배치를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전사한 군인들을 기리는 날에 일반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기념한다.
죽음과 양귀비 그리고 죽어간 병사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양귀비를 보면 생각난다.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 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 외 저를 비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대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술 한병 차고 병차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정끝별 해설>
참혹은 당신으로 상징되는 모든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총체적 참혹이다. 사랑을 떠나보낸 실연의 참혹 아버지를 여읜 망부의 참혹, 신념을 잃은 한 시대의 참혹, 끝내 버릴 수 없고 무를 수도 없는 , 죄다 마음에 묻어야 하는 참혹이다. 그런 당신을 웃으면서 울면서 혹은 취해서 부르는 이 시의 언어는 언어 이전이거나 이후이다.
허수경 시인은 울음 같은 비명 같은 취생몽사 같은 시집을 낸 후 독일로 휘리릭 날아가 버렸다. 고고학을 공부한다고.
허수경. 내 젊은 시절. 기형도와 같은 느낌으로 흠모하고 아끼던 시인. 어쩔 수 없이 언어는 그 사람의 내면에 살다 나온 분신이어서 그럴까. 그녀를 몹시 닮아 있었다.
슬픔이 뚝뚝 선혈처럼 떨어지는 듯 나눌 수 없는 허무와 고독과 절망 그리고 애써 지상의 한 칸 방에 정 붙여 살아보려는 그녀의 안간힘이 느껴지던 시들. 그녀는 쓸쓸하게 이역만리에서 혼자 가는 먼 집을 향해 허허롭게 가버렸다. 그녀는 몇 년 전 참혹한 죽음으로 우리에게 건너왔다.

찔레꽃 피면 -양희은
찔레꽃 피면 내게로 온다고
노을이 질 땐 피리를 불어준다고
그랬지
찔레꽃 피고 산비둘기 울고
저녁 바람에 찔레꽃 떨어지는 데
너는 이렇게 차가운 차가운 땅에 누워
저기 흐르는 하얀 구름들만 바라보고 있는지
바라보고만 있는지
너는 이렇게 차가운 차가운 땅에 누워
나도 그렇게 네가 있는 나라
보았으면 좋겠다
좋겠다.
5월의 꽃 중 가장 수수하면서도 향기가 강해 어느 꽃 보다 우리의 눈길을 멈추게 하는 꽃. 찔레꽃은 왜 이리 슬픔의 정조를 자아내게 하는지.
마치 엄마 잃은 아이를 포대기로 둘러 매고 동구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며 기약 없이 헤어진 그리운 이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위로하듯 동무처럼 옆에 살며시 피어 있을 것 같은 꽃. 찔레꽃.

먼지투성이 쑥,
길섶에 무심히 이름 없는 잡초와 섞여 하늘거리며 피어있는 쑥
맨손으로 미안해하지 않은 채 훑어도 괜찮아하는 쑥
그저 쑥쑥 거리며 아무한테도 정을 주며 안기는 쑥
쑥쑥이는 쑥을 데려와 쑥버무리, 쑥떡, 쑥붕어빵, 쑥국을 쑥쑥 해 먹는 쑥
나의 오월 어느 하루를 무릎 꿇게 하고 어깨를 낮추어 똥똥한 손을 가늘게 뻗어 가는 허리를 쑥 끊어내게 하는 쑥.
쏙 붕어빵 가게 앞에선 붕어빵을 닮은 이들.
백운산 자락을 구경하러 온 이들의 배고픈 속사정을 위로하는 쑥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위에
먼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정끝별 해석>
천지에 꽃피는 소리 가득하다. 산수유 닮은 생강나무 꽃, 사람 환장하게 한다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그리고 제비꽃, 달맞이꽃, 애기똥풀꽃, 쑥부쟁이꽃,
이 꽃들이 소요. 사람 홀린다는 흰 동백꽃,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꿩의바람꽃, 아침이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다가 해가 나면 자줏 빛 꽃잎을 활짝 연다는 바람난 처녀꽃 엘레지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며느리배꼽꽃, 아직 못 보았다. 저 꽃들의 고요..
조지훈 시인은 섭리로서의 소멸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보여준다. 꽃이 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인간의 촛불을 꺼야 어둠 속에서 목숨이 지는 자연의 꽃이 내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다.
흰 창호지 문을 물들이는 유련( 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붉은, 낙화의 그림자. 지는 꽃의 그림자….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과묵한 슬픔 앞에 목이 멘다.
어진이는 만월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다니/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 <한용운의 모순>
그렇다. 꽃핀 나무들의 괴로움을 우리는 즐기며 황홀해한다. 아침에는 멀구슬나무의 아련한 보라색 꽃을 처음 알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때죽나무꽃을 아쉬워하며 꽃이 다 지기 전에 때죽나무가 있는 산에 가야겠다고.
장미가 어느새 활짝 피어있는 광양 서천가를 다녀왔다. 누군가는 노랑장미를 나는 하얀 장미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꽃향기 속에 아련히 번지는 낙화의 그림자를 앞당겨 느낀다.


잘 익은 사과 -김혜순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큇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빰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 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느 가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굴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 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정끝별 해석>
여름 여치가 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가을 정미소를 지난다. 차가운 구름이 떠 있다. 그렇게 자전거는 골목 모퉁이를 돈다 (아가였던) 할머니가 구멍가게 앉아 있다. 잘 익은 사과는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다채로운 감가의 성찬으로 펼쳐 놓고 있다. 백 마리의 여치소리는 자전거의 바퀴도는 소리, 정미소에서 나락 빻는 소리와 겹친다. 고향 마을은 금세 큰 사과로 축소되고 마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는 사과를 깎는 칼날 소리로 변환된다. 노망 든 할머니가 숟가락으로 야금야금 파먹는 사과는 시간의 신이 돌리는 물레이 실타래에 비견할 많다. 기발하면서도 유쾌하다. 아가, 처녀, 엄마, 할머니로 숨 가쁘게 이동하는 시간을 ‘천년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으로 정지시켜 놓는 것도 흥미롭다. 김혜순 시인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시인. 그는 겹침의 시학을 즐겨 구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가 하면 수축시키고, 감각과 시점을 겹쳐 놓는가 하면 뚝 떨어뜨린다. 여성의 환상적 내면을 몸의 감각과 경험으로 그려냄으로써 일견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떠올리게 한다. “환상 시”의 대모이다.
최근 뉴스. 김혜순 시인은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다. (2024년) 미국 평단이 영어권 문학 주변부로 치부했던 아시아 여성의 시에 주목한 것이다.
그녀의 시집 “날개 환상통”으로 이 상을 수상했다. “놀랍도록 독창적이고 대담하게, 전쟁과 독재의 여파,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삶의 고통, 이를 극복하는 의식을 대안적 상상의 세계로 반영한다”라고 평가했다. 그녀의 시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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