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6일 일요일 님펜부르크>
가을에 내리는 비는 가슴으로 파고든다. 영혼의 저음부까지 내려와서 밑바닥을 적시며 고적함을 이끌어낸다.
님펜부르크를 가는 날. 카를 광장 (Karl's platz)에서 트램 16번을 타고 로만스플라츠에서 내렸다. old town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고즈넉한 마을이 있다. 궁전 입궁 있는 카페 Housebrandt (Since 1892)에서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과 카푸치노를 주문해서 천천히 쌀쌀한 공기 냄새를 마시며 먹는다. 님펜부르크는 옛날 바이에른 왕국의 통치자였던 비텔스바흐 가문의 여름별궁이었단다. 님프 즉 요정을 뜻하는 아름다운 궁전. 바이에른의 선제후 페르디난트 마리아가 그의 아들 막스 밀 리엔 2세 에마누엘(1662)의 탄생을 기념하여지었다고 한다. 18세기초 에마누엘은 중앙의 5층 저택 주변에 네 개의 파빌리온을 증축하고 여러 개의 아케이드로 이들을 중앙저택과 연결시켰다. 입구에서 영어오디어가이드와 티켓을 37유로에 구입하고 엔트런스홀에서 황제 대관식에 사용됐던 대관식 코치와 여덟 마리의 말들을 재현해 놓은 장소를 관람한다. 화려함 그 자체. 글쎄. 이토록 화려하고 웅장한 대관식 마차를 탐으로서 자신의 위엄을 자랑하고 위용을 뽐내려고 경쟁적으로 분투했을 것이다. 세월 앞에 덧없는 인생들이다.
1734년 칼 알브레히트 선제후가 자신의 아내 마리아 아말리아를 위해지었다는 <아말리아 파빌리온> 실버장식으로 된 거울의 방은 청명한 아름다움이랄까. 네덜란드 스타일의 융숭한 주방과 중국식 장식이 결합된 주방을 둘러본다. 확실히 그 당시 중국의 문화예술 및 과학 기술은 서구에 비해 앞서있었던 것 같다. 유럽의 모든 왕들과 귀족들이 중국의 도자기 및 장식예술을 본뜨고자 열을 올리고 있었으니.
엠마누엘이 목욕탕 용도로 지었다는 <바덴부르크> 무엇보다 지하 2층 규모의 보일러를 사용해서 목욕탕을 채웠다고 하니. 납으로 된 약 54 제곱미터의 수영장규모. 이외에도 지하에는 두 개의 작은 욕실이 있었고 따뜻한 목욕을 위한 대리석 욕조가 있었다고 한다.
호수 북쪽에 위치한 별채인 <파고덴부르크> 중국풍의 내부장식으로 된 중국식 살롱. 중국의 아이돌인 파고다를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옻칠 캠리넷을 비롯한 위층의 "검은빛 살롱"을 장식하고 있는 중국 그림들이 인상적이다.
님펜부르크의 건물들을 들여다보는 것도 솔솔 한 재미가 있었지만 눈으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부지의 숲과 호수 정원의 아름다움은 기가 질릴 정도. 귀족들과 왕족들의 삶은 이렇게 여유 있고 화려했구나. 마치 그들만의 별천지 하지만 그 별천지는 많은 이의 노동으로 가능했겠지. 절대왕정이 끝나고 민주주의가 실현된 지금의 세상에서는 옛날 그들이 실생활에서 누렸던 부귀영화를 마치 박물관구경하듯 사람만 사라진 곳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물과 물건, 장소들을 향유하고 있으니 참 역설적이다. 어쨌든 조금의 입장료로 그들이 만들어 놓은 호화찬란한 공간과 한때는 출입이 제한되었던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들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간다. 본궁을 구경한다. 그레이트 홀 (Great hall)은 화려한 로코코 스타일의 천장 프레스코화와 장식적 벽토(Stucco)는 바이에른 예술가 요한 짐머몬에 의해 설계 제작되었다 한다.
중앙홀을 중심으로 남북 아파트가 쭉 뻗어있고 그들 가문의 초상화들이 전시된 방들이 있고 마지막으로 루드비히 1세에 의해 만들어진 <미녀들의 갤러리> 방에는 궁정화가 조셉 스티엘이 구두수선공의 딸에서 다양한 사회계층 출신인 36명의 미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하고 있다. 초상화 중 하나인 <댄서 롤라몬테즈>와 왕의 스캔들은 1848년 뮌헨혁명의 원인이 되어 그가 퇴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시 넘어서 카를 광장으로 돌아와 마리엔 광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성미하헬교회에 간다. 미사가 진행 중이라 장중한 오르건 연주와 성가를 들으며 하루를 갈무리 짓는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거의 1킬로를 걸어 한식당 유미에 들러 돌솥비빔밥과 돼지고기 볶음밥을 먹는다. 먹는 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맞는 말이다.








<10월 8일 화요일: 브란덴부르크, 홀로코스트 미모리얼센터, 티어가르텐>
베를린.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유가 뭘까. 뮌헨보다 날씨가 더 쌀쌀하다. 새콤하다고 해야 할까.
아파트에 딸린 유치원바로 앞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곳은 일반인들의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이 까르르까르르, 때론 장난치는 맑은 음이 쌀쌀한 가을 아침의 공기에 묻어 나온다.
집 근처 Rosenthaler Platz 역에서 M1을 타고 여섯 정거장을 거쳐 Stu Friedrichstr에서 하차한다. 그리고 브란덴부크크까지 걸어간다. 1791년에 지어진 개선문이 있다. 고대 그리스가 아크로폴리스 입구를 모방해서 만든 건축물로 동서 베를린의 경계를 짓는 곳에 있는 브란덴 부르크.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도로들이 뻗어있다. 아침 11시부터 사람들이 관광객을 포함 인산인해를 이룬다. 어디가 동베를린이고 어디가 서베를린인지..
연방의회가 브란덴부르크에서 코 앞에 있지만 20여 일 전에 사전예약을 한 경우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여기 와서 알게 되다니. 결국 돔까지 올라가 베를린 전경을 보고 싶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도심 한가운데 있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깊은 <티어가르텐> 숲으로 들어선다. 잠시 벤치에 앉아 도시락으로 싸 온 달걀과 과일로 요기를 한다. 우리가 앉은 벤치도 그라피티 문양이 요란하다. 표현주의자 베를리너들.. 드럼통이며 빈벽틈 그리고 쓰레기통 할 것 없이 빈 곳이 보이면 어김없이 빼꼭하게 그라피티로 장식하고 있는 베를리너들의 자유표현의식이 맘에 든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는 듯한 느낌이랄까.
브란덴을 보며 “Peace”를 외치고 있는 통독일의 상징인 “ 프란세스코 페트라르카( 14 시계 이탈리아 시인이자 인문주의자) 동상을 본다..
두 번째 방문지. 홀로코스트 미모리얼 센터 ( Holocaust Memorial Center). 시각적인 충격.
사각의 석관 같은 밋밋한 조형물들이 각기 높이와 크기가 다른데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사각의 조형물들 사이로 난 작은 미로들을 헤맨다. 길을 잃는다.
같아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사각의 조형물들. 지극히 단순한 것들이 압도하는 감정의 복잡한 쓰나미 같은 감정의 몰아침은 뭘까. 모든 존재는 총체로 프레임화 되지 않는다. 각각의 고통은 고유하고 개별적이다.
지하의 전시관으로 향한다.
1944년 아우스비치 집단수용소로 끌려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시인이자 역사적 증언가로 살다 결국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유대인 Primo Levi의 시의 한 구절 ‘ It happened ,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이미 발생한 것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해야 할 핵심이다.
어젯밤에 오랜만에 알자지라 방송을 보았다. 2023년 10월 7일. 어제가 1주년이 된 날이었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이스라엘이 자행한 제노사이드로 가자지구의 건물 70퍼센트가 파괴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생존한 사람들도 거의 다 그곳에서 떠나 난민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총리는 레바논과 이란으로 전쟁을 확대하고자 한다니. 언제 이 역사적인 비극들은 끝날 것인지.
두어 시간에 걸쳐 전시물들 - 연대별로 유대인과 집시( Rome) 정치범들이 extermination 될 때까지의 과정과 그들을 수용했던 게토와 집단수용소에서 어떻게 반인륜적인 죄악들이 저질러졌는지를 기록한 것들-을 숙연하게 관람했다.
무엇보다 집단수용소에서 살다 죽어간 이들이 남긴 글들을 바닥에 유리관을 덥어 전시한 공간은 너무 먹먹했다.
“ Dear Father, I’m saying goodbye to you before I die. We would love to live, but they wouldn’t let us and we’ll die. I’m so scared of his death. because the small children are thrown alive into the pit. Goodbye forever.I kiss you.”
어린아이가 미증유의 공포에 맞다고 들었을 때 얼마나 무력하고 무서웠을까. 무엇보다 불안과 공포감을 덜어 줄 아빠가 옆에 없고 혼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아이의 두려움이 고스란히 마음에 전해지며 전율이 느껴졌다.
착잡한 마음으로 Mitte에 있는 Amy’s. 평점이 좋다고 딸이 추천해 준 곳인데 글쎄..
Checkpoint Charlie로 향하는 길에 Kochstraße에 있는 “ The Barn”이라는 커피전문카페에서 오랜만에 handdrip 커피를 마셨다. 여기에선 아메리카노 커피보다는 카페라테나 카푸치노를 많이 마시는 것 같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는 없다. 그리고 카페라고 파는 것이 블랙커피에 가까운 커피다.
동서베를린이 연합군 분할 통치로 분단되어 있을 때 이 자리에 있었던 미군 검문소는 아직 남아있다. 그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전승연합국과 소련이 대치했던 상태에서 동서 베를린 혹은 동독과 서독을 가르던 곳에 있었던 검문소는 냉전을 상징하는 것 그 자체다.
통독 이전에 서로 대치하던 독일의 상황을 담은 사진과 기록물, 서독으로 탈출하려다 죽은 병사의 사진, 이때 무차별 사살한 병사들은 통독후 재판을 받아 2년 구속형을 받았다 한다.
Checkpoint Chalie 역에서 U반을 타고 Brunenstrase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온다. 오늘도 귀가시간은 8시를 넘겼다.






베를린 홀로코스트 미모리얼 센터




체크포인트 찰리
<10월 9일 수요일: 베를린 필하모니 런치무료공연 케테 콜비츠박물관>
오늘은 생전처음으로 연주회라는 곳엘 간다. 그것도 베를린 필하모니 런치무료공연 아닌가. 필하모니가 매주 수요일 런치무료공연을 40여 분에 걸쳐한다고 한다. 가슴이 아침부터 떨린다. 이런 문화자산을 시민들을 위해 공유한다고 하니 부럽고 슬쩍 질투가 난다. 아침 10시경 Rosenthaler Platz에서 U반을 타고 운테르덴린덴까지 간다. 가는 길에 훔볼트 대학교 입구에서 잠깐 쉰다. 아름다운 분수와 담쟁이덩굴이 색색이 물들어 가고 있다. 단아하면서도 육중한 건축양식이다의. 한참을 앉아서 건물을 구경한다. 그리고 전사한 병사들을 위한 위병소로 사용된 건물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케테 콜비츠 작가의 “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피에타”를 보러 노이에 바헤로 향한다. 콜비츠의 피에타는 비애감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상실 후 애통해하는 어머니의 슬픔을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동작과 표정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피에타가 놓인 위로 뚫린 천장이 있다. 그곳으로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아들을 잃은 고통받는 어머니는 그렇게 그곳에 언제나 있다. 유일하게 한국어 안내판이 있다. ‘노이에 바헤-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독일 연방공화국 국립추모관-이라고 쓰여있다.
300번 버스로 필하모니아 거리 ( Philharmonia straße)에서 내린다. 생각보다 부드러운 하지만 기하학적인 균형미를 가진 공연장이다. 시민들에 합류해 약 30분가량을 기다리자 입장이 시작되었다. 공연은 1시에 있는데 너무 늦게 도착한 탓. 들어가자 Seats for people possesing a severly disabled pass- 중증 장애등급을 가진 이들을 위한 좌석), 즉 장애인 우선석이 공연하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마련되어 있고 자원봉사하시는 분들의 안내를 받는다. 금세 계단참과 위층의 바닥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찼다. 어렵게 일층 계단 끝에 자리를 마련한다. 젊은이들도 많이 왔지만 거의 대부분 시니어들인 듯했다. 베를린에 와서 또 느낀 것은 왠지 무질서해 보이지만 질서가 있다는 것. 공연장에 와서도 또 느낀다. 이게 민주주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 오늘 연주는 슈베르트의 Klaviertrio B -Dur D 898 Allegro moderato, Andante un poco-mosso, Scherzo-Allegro-Trio Rondò Allegro vivoce
피아노 삼중주( Berlin Piano Trio)의 연주다. 너무 감동스럽고 아름다워서 동영상을 찍으려 했지만 제지당했다. 당연해서는 안될 일이지만 너무 욕심이 나서 그만.
앙코르곡까지 들으면서 음악에 심취해 있는 아름다운 관중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오는 길에 St, Mattaus Kirche라는 아주 소박한 교회이자 흥미로운 그림 전시장을 사용되는 곳을 잠깐 들른다. 그리고 가까이에 있는 문화포럼 (Kultur forum)에서 맛있는 파이치즈와 과일로 만든 파이 키쉬를 먹고 잠시 쉰다.
200번 버스를 타고 zoologischer Garden에서 M45으로 갈아타고 Klausen Platz에서 내려 Schlossgarten Charlottenburg에 있는 콜비츠 박물관에 간다.
2층짜리 단아한 크림색 빌딩. 확장이전을 할 계획인가보다. 공사 중이지만 개관을 해서 티켓을 사서 천천히 그녀의 작품들을 감상한다. 1년 전인가. 제주 포도박물관에서 케테 콜비츠 특별 전시를 보았다. 그때의 감동이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집을 사기도 했다. 실제 그녀가 태어난 베를린에 와서 박물관에 전시된 그녀의 작품들을 보니 너무 기뻤다. 케테 콜비츠( 1867-1945)는 20세기 여성 화가 중 가장 강력한 예술적 언어로 당대 그녀가 살았던 현실에 대한 정치적인 목소리를 실었고 소외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연대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자화상을 비롯해 남편의 병원에 찾아온 궁핍한 환자들의 병든 모습과 그들이 실제생활에서 겪고 있는 참담한 생활모습, 가정학대와 죽음, 가난등을 표현한 작품들, 단순히 사실주의적인 작품을 넘어 현실을 바꾸어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이 연대하길 원하는 강한 선동적인 정치 팸플릿과 같은 작품들. 노동계층들의 생활상과 농민폭동, 1차 세계대전 참전 후 둘째 아들을 잃고 극심한 우울과 슬픔에 빠져있었던 시절의 고뇌를 보여주는 어두운 자화상들.
그녀의 작품의 대부분은 에칭이었고 목판화로 강력한 메시지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다. “Weaver’s Revolt, The Prisoner, Charge, Woman with a dead child( 이 작품은 전쟁으로 희생당한 그의 아들 피터가 실제 모델이었다 한다) Death , Woman and Child
그녀는 housing shortage (주거부족) Family vioolence (가정폭력), alchoholism (알코올 중독) unwanted pregnancy( 원치 않은 임신)등 실제 민중들이 겪고 있는 비참한 실상들을 소재로 삼은 것이 많다. 특히 “ Never Again War”는 반전의 주요 선전도구로 사용되었고 자신의 아들을 비롯해 전쟁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병사들과 전쟁으로 인한 일반 시민들의 고통과 비참함을 절대 반대하는 그녀의 강한 의지를 표현한 작품으로 그녀의 작품 중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그녀가 말년에 죽기 전까지 사로잡혔던 죽음에 관한 시리즈는 인생의 말로를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울림이 큰 작품이었다.
Klausen Platz에서 M 45를 타고 Zoologischer Garden에서 내려 일식당 I shin에서 수시와 사시미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베를린 필하모니 공연장

콜비츠 박물관



<10월 10일 목요일>
하늘이 회색빛이다. 우산을 챙겨 나선다. 로젠트 할리 역에서 U8을 타고 알렉산더플라츠로 간다. Karl Lievknech Strase에서 내려 아름다운 교회 St Marien에 잠깐 들른다. 이곳에 설치된 안내판에 의하면 성마리엔 교회 옆에서 고고학자들이 250여 개가 넘는 해골이 있는 매장지를 발굴했다고 한다. 아마 교회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794년 법령에 따라 도시 위생상 묘지는 폐쇄되었고 부지는 이전되었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전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마리엔비에텔 지구가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3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중세교회는 1290년에서 1340년에 세워졌었고 1789년 이후에야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중세교회의 위력이 어떤 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중세의 거의 모든 잉여자본은 더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건축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고 그때 당시 중세의 설득권력은 가난한 농민들이 신을 위한 자신의 노역을 바치고 예배를 드림으로써 일상의 비참함을 천국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민중들에게 설파했을 것이다. 은
지금껏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1325년 전염병이 창궐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던 베를린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이교회의 교구장을 린치하는 일이 발생했고 이 일로 인해 3미터 높이의 나무십자가를 세워 폭동에 가담한 시민들이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참회의 기도를 드리게 했다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오늘은 바람이 강하게 분다. 모자가 날릴 정도다. 성마리아 교회를 잠깐 들르고 비를 피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간다. 잠시 후 박물관섬에 갈 거다. 친구에 의하면 슈프레강의 삼각지에 박물관섬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삼각지를 중심으로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이 슈 퍼레 강 주변에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다. 베를린 대성당을 보고 싶었지만 가지 않기로 하고 대신 알테스 뮤지엄 ( Altes Museum)으로 향한다. 그리스 로마 유적을 전시한다는데 특히 관심이 많진 않지만 어떤 시각으로 전시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규모가 대단하다. 그리스의 시대적 변천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쭉 각 전시장마다 배열되어 있다. 무엇보다 6천여 명의 배심원들로 구성된 패널이 10개의 부족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선정되어 법정소송을 담당했는데 이 배심원들을 매번 추첨으로 뽑아서 사전협의나 뇌물수수를 방지했다 한다.
이번 특별전시의 목적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성들에 대한 테마인 것 같다. 페미니즘적 접근으로 분석한 것 같아 흥미롭다.
먼저. 메데아 이야기 ( 살인녀 인가 아니면 복수자인가)
남편 제이슨이 다른 여자를 만나 그녀를 배신하고 떠나자 복수심으로 그와 아니 아이들까지 죽인 메데아. 그 대가로 그녀는 기꺼이 살인으로 인한 형벌을 받아들인다. 희대의 치정사건. 고대 비극의 주요 테마 중 하나였던 메데아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창작물의 주요소재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프로젝트는 여성의 전통적인 성역할과 성정체성이 과형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신들에게도 해당되는가. 어쩌면 남성적인 시각으로 여신들을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강한 여성은 나쁜 여성?>
천사였던 아마존. 위험한 마법사 키르케, 영웅 헤라클레스의 정복자 옴팔레, 메두사 이들은 강한 여성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신화적 인물들이다. 남성의 관점에서 보면 위협적이고 사회적 질서에 위험을 가하는 존재로 보이지만 그러나 그녀들은 남성들의 영웅적 조력자들이기도 했다. 남성영웅들은 그녀들과 사랑에 빠지고 키르케는 오디세우스가 잘못된 길로 가려하자 그를 바로 잡아주었으며 메두사는 성폭력 피해자로서 2차 피해를 받은 여성이 아닌가. 어쩜 강한 여성들이 여성해방의 모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 키르케는 circe는 매혹적인 이라는 뜻)
< Are there female Role Models?>
페넬로프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에 그녀의 남편 오디세이를 20년간 기다린다. 다른 이들의 유혹을 물리친 채 그녀는 시아버지의 옷을 짜면서 재혼하지 않는다. 하루 종일 옷을 짰다 풀었다를 반복하면서.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그녀를 충직하고 현명하며 센서블한 여성으로 그린다. 그녀는 이런 관점에서 이상적인 성모델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유럽에서는 완벽한 여성의 모델로 이상화되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페넬로프는 독립적이면서 남편의 부재 시 모든 것들을 관할하는 통치력을 발휘한 여성으로 볼 수도 있다.
Hera는 어떠한가. 남편 제우스가 여러 명의 여자와 수없이 바람을 피우고 난잡한 생활을 하지만 책임감 있게 가정을 지키고 제우스에 대항하며 자신을 지켜낸다.
아프로디테는 가정에 충실한 와이프 (Faithful wife)라는 이상화된 여인상을 거부하고 수없이 외도 (Extramarrital affair)를 한다.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을 좇아 그 욕망을 실현시키는 아프로디테 그녀는 단지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여인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욕망을 실현시키고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여성성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날씨가 변덕스럽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다 다시 개이기도 하고 요물 같다.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마르크스 엥겔스 동상을 발견한다. 그래 독일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고향이지.
Hackesche Market에서 독일 전통되지 족발인 학센을 처음으로 맛보고 맥주와 함께 먹어본다. 숙소에 8시에 돌아와 보니 스토브와 레디에이터가 작동되지 않아 숙소 매니저와 문자로 연락한다. 춥다. 다행히 보이로 전기담요 소형을 가져온 게 도움이 된다. 역시 유럽여행을 할 땐 난방용품을 준비해서 다니는 게 꿀팁이다.


마리엔 성당








<10월 11일 금요일 카이저빌헬름 교회, 오버디움다리,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11시경에 베를린 구경에 나선다. 피로가 누적되긴 했지만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는 즐거움이 더 크다. Brunnenstrase에서 M 8을 타고 중앙역까지 가서 Re2로 갈아탄다. 중앙역에, U반/ S반/ RE/ IC/ ICE 독일의 모든 철도가 출발하는 곳이라 RE를 찾아가는 게 쉽지는 않다. 처음으로 친구와 노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소한 오해로 인한 다툼이 있었다. 좀 더 관대하게 상대방의 의견이나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결국 사소한 마음 상함이 몇 시간 지속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보다 더 관대하고 마음씨가 좋은 친구 덕분에 간신히 마음의 감옥에서 빠져나왔다.
빌헬름 카이저 교회는 Zoologischer Garten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전쟁의 파괴성에 대한 환기를 위한 기념물이랄까.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냉전의 시절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전쟁이 할퀸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카이저 교회. 2010년에서 2015에 걸쳐 외관 및 파사드 공사를 하며 보존작업이 수행되었다.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파손된 채 흉측하게 드러나 있는 것 자체가 전쟁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기록물인 듯하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보수공사는 민간의 자금지원을 받고 있고 자금을 도네이션 한 이들의 이름은 교회 건물에 새겨진다고 한다.
그동안 기증자들의 이름을 쓴 두루마리가 무너진 폐허 벽돌에 새겨졌고 청동명판이 멱에 설치되었다 한다. 2016년에는 12월 19일 저녁, 도난당한 트럭을 테러리스트가 크리스마스 마켓의 군중들을 향해 돌진해 12명의 사상자를 내는 비극적 사건이 있었다. 계단의 비문에는 ‘2016년 크리스마켓 테러공격의 희생자를 기리며 모든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라는 비문이 있다고 한다. 1층에 있는 기념관을 둘러본다. 이 교회는 1943년 11월 22일 베를린 공습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사용될 수 없게 되었고 옛 교회의 현관을 현재 박물관으로 고쳐 기록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즉 이곳은 기억과 묵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바로 옆, The Blue Room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신교회가 현대적인 양식으로 바로 옆에 신축되었다. 불꽃이 가장 뜨거울 때 색깔이 파란색이라 했던가. 이 교회에서 매일 1시에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한다. 전체공간이 파랑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있는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곳이다. 중앙의 예수 모습은 전형적인 예수의 모습이 아닌 인간과 묘하게 닮아 있는 모습이랄까. 감동적인 연주를 20여분을 듣고 나왔다.
이 교회는 <Time in the Blue>라고 쓰여있다.
이 동네는 Bikini Berili로 불리는 구역이 있다. 서베를린의 전후 건축물을 보여주는 랜드마크인데 2013년 뮌헨이 건축가에 의해 광범위한 복구작업으로 인한 high-ride Building과 복합쇼핑센터인 비키니 건물이 들어섰다. 인근의 동물원을 조망할 수 있는 7천 평방미터 이 그린 테라스를 가진 비키니 건물.
잠시 쉬어가기 위해 오랜만에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바로 앞에 Globe 분수가 보인다. 계단을 흘러내리는 분수. 중앙에서 뿜어 나오져 나오는 물과 아크제트가 큰 반구체와 카이저 빌헬름교회를 마주 보고 있는 반원형 분지에 노아의 방주가 있다. 물은 유로파 중심을 향해 구불구불한 계단을 따라 아래 분지로 흘러든다.
유로센터 만남의 장소 바로 앞에 있다. U3을 타고 Schlesisches Tor에서 내려 약 400 미터를 걸어 오베르바움 다리 ( Oberbaum Bridge)로 간다. 마치 오레엔털리즘의 느낌을 갖게 하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다리다. 1894년에 만들어진 다리라는데 아직도 견고하다.
1989년 11월 9일 SED 중앙위원회가 시민의 여행제한해제가 발표된 후 이 다리의 국경도 개방되었다고 한다. 장벽이 건설된 수 2년이 지난 후 19년 사이에 동베를린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벽이 생기면서 동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탈출하기 위해 강에 뛰어들었다가 죽거나 사살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오베르디움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설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서베를린의 데이비드 몬티와 동베를린의 하이케스테판이 베를린 장벽을 세상에서 가장 긴 갤러리로 만들었다. 길이 1.3킬로 길이의 이스트사이드 갤러리가 1990년 9월 28일에 개장 됐다.
1972년 국경횡단이 오베르바움 가리에 설치되어 서베를린에서 동베를린까지 도보로 통과할 수 있었고 서로 여행이 가능했지만 강과 장벽은 동독에서 탈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61년에 동독 탈출을 막기 위해 주변에 벽을 쌓았다.
이스트사이드갤러리에 그려진 전 세계예술가들의 작품을 큐알 코드를 찍어 직접 작가의 말을 글로 확인할 수 있었다.
“ The wall to me was a source of pain, sadness, There was no time or place to play.
교사의 직업을 ㅠㅗ기하고 서베를린으로 이주해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이탈리아 화가는
“My painting iin the East Side Gallery is quite heavy and quite chaotic like the situation at the time
러시아화가인 Dmithry Vrubel 은 사회주의 리더 호네커와 브레즈네프의 키스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그림을 남겼다.
“ It seems as if I was between Brshbevs and Honecker’s lips.
장벽의 다른 한쪽은 좀 더 강한 매체인 그라피티로 끝없이 이어진다. 베를린 장벽 미모리얼은 여기저기 곳곳에 있다. 그중 우리가 머무는 숙소가 있는 Bernauer Stras에도 있었다.
동서로 베를린이 분할 통치가 되면서 함께 살았던 이웃이 바로 동서로 갈리고 장벽이 세워지고 통행이 제한되었다. 슬픈 역사의 현장이 베를린 곳곳에 있고 정부는 기념물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고 보존하고 있다.
숙소로 가기 전 REWE에 들러 초밥과 과일을 산다. 오랜만에 여행 중 읽기 위해 가져온 권여선의 단편소설집 ‘안녕 술수정뱅이’에서 ‘봄밤’을 읽고 잠에 든다.

빌헬름 카이저 교회





오벨리움 다리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프스를 품은 스위스를 가다 (2) | 2024.07.16 |
---|---|
인생은 아름다워 (1) | 2024.05.11 |
5월의 제주 ( 3박 4일 )보롬왓, 바농오름, 거문오름. 포도뮤지엄 그리고 가파도 (1) | 2024.05.06 |
에드워드 호퍼전에 가다 -길위의 날들 (1) | 2023.08.20 |
2023. 5월의 제주여행 -사려니 숲길, 에코랜드, 절몰오름 한라산 생태숲길 (3박 4일) (7) | 2023.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