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나지 않은 일’은 작정하고 읽는 자는 늙지 않고 영원히 성장한다고 말한다. 감정과 사유를 통합하고 불안한 자아를 다듬고 벼려 제대로 연결될 길을 모색하는 그러면서 쇠락하지 않고 진화하는 의식의 일생, 정신의 삶이라니. 이렇게 벅찬 노년의 찬미가, 이렇게 치열한 독서의 옹호가 다시 있을까- 김선형
“나는 여전히 대문자 L로 적인 Life,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 여전히 제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운에 얽매이고 휘둘리는 주인공을 보려고 읽는다. “-비비안 고닉
그녀의 글을 최근에 읽었다. 끝나지 않은 일 은 그녀가 85세가 되던 해에 출간된 책이다. 책에 대한 책이라 할까. 그녀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재독 하면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 내용들을 아주 맛깔스럽고 재치 있게 그리고 재밌게 펼쳐났다. 물론 내가 오래전 읽었던 책도 있고 읽지 않은 책도 있었지만 그녀의 넘치는 유머와 풍부한 지적인 배경으로 다시 태어난 책의 내용은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노년에 이렇게 까지 집중력 있게 재독해 내고 다시 그 의미를 자신이 살아온 삶에 견줘 새김질하는 강철 같은 그녀의 읽고 쓰는 행위의 성실성과 치열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본다. 아. 나도 남은 인생동안 이토록 지겹지만 결코 내 삶의 일부가 돼버린 어쩌면 나의 정체성의 일부인 글 읽기를 놓지 않으면서 천천히 기꺼이 늙어가도 되겠구나. 희망이라기보다 안심이 된다.
역자에 의하면 그녀는 1935에 태어나 페미니즘 운동가, 이론가, 문학 비평가로 활동하다 52세에 “사나운 애착”을 전기로 뒤늦게 작가로서 본궤도에 오르고 60대 접어든 1990년 중후반에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와 몇권의 주요한 저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80세가 된 2015년에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짝없는 여자와 도시”라는 아주 섹시한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5년 뒤에 발간된 “ 끝나지 않은 일”.
작가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고닉.
태어나면서 부터 책을 읽었던 것 같다는 고닉은 천생 읽는 사람이다.
역자의 말처럼 “ 비비언 고닉을 읽는다는 것은 , 문장들로부터 모든 욕망과 뉘앙스를 학습한 작가가 텍스트화된 세계를 읽어내는 비범한 의식 그 자체를 읽는다는 의미다. “
그녀의 작품을 “사나운 애착”으로 만났다. 얼마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읽기 경험이었는지. 마치 자신의 자서전적인 생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어떠한 가식과 허위의식 없이 다 드러내면서 촘촘히 짜인 신경줄의 세밀한 망에 독자들의 삶을 끌어들이고 마치 너희 이야기를 이제 해봐 라는 느낌으로 자신의 성장서사를 은밀하고도 과감하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을 느낀 것이다.
탁월하게 번역하고 고닉에 대한 너무나 훌륭한 후기를 써주신 옮긴이의 말을 옮긴다.
“끝나지 않은 일”의 첫머리에서 고닉은 읽고 쓰는 자아의 중추를 구성하는 의식의 결함과 불완전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들을 다시 펼쳐 든 그는 “긴 의자에 누워 정신분석을 받는 느낌에 빠져든다.
기억의 오류와 노골적인 오독이 과거의 읽기로 부터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고닉은 지금의 자기보다 더 젊은 자기가 불충분한 경험과 불완전한 앎에 가로막혀 위대한 문학적 텍스트의 풍요한 의미에 진정으로 가닿지 못했음을 절감한다.
고닉은 다시 읽기를 통해 비로서 통합적 자아를 희구하는 문학의 기획을 이해하는데 이 앎은 그 자체로 치유적이다. 그의 다른 자아들이 읽고 감응했던 의미들이 차례차례 전복되고 전위되고 수정되고 보완된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우리는 한 시절, 우리가 서 있던 자리의 한계 안에서만 책과 사람을 , 세상을 만난다.
핵심 텍스트로의 거듭되는 귀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애기를 다시 쓰고 우리 의식을 새로 발명한다.
고닉의 의식은 흔들리고 착각하고, 왜곡과 오독을 거듭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단단히, 깊이를 확보하고 경계를 확장하며 진화한다.
책을 다시 읽고 싶어서 더 오래 살고 싶다는 못말리는 애서가의 당찬 포부는 유쾌한 전염성이 있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이만한 기세로 책을 읽고 의미를 찾아 글을 쓸 수 있다면 죽기 전까지 내 비루한 의식도 조금은 진화해서 그 세상이 조금은 나아지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 그러니 변화와 늙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 통합된 자아의 꿈을 향해 매일 한 발씩 걸으라고, 좋은 책들을 집요하게 읽어내라고 결핍과 고통도 언젠가는 진리에 빛을 비추는 의식의 자양분이 되리라고 이 책은 우리의 등을 떠밀려 어깨를 두드려준다.
옮긴이는 고닉의 작품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의식”을 조명한다.
의식. 몸의 느낌과 마음의 사유를 통합해 재정의한 의식 개념은 고닉의 “통합된 자아”를 가늠하기 위해 꼭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의식의 조명이 비추는 순간, 무지로부터 앎으로의 전이가 일어나고 자신의 상태로의 이행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마음, 마음 안의 의식 행동을 공유하며 , 이 때문에 인간 마음의 과학, 행동은 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명백한 상호관계에 근거한다.
“외부로 향하며 공적인 정서가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거슨 내부로 향하며 사적인 느낌을 통해서다. “
그녀가 재독해서 새롭게 우리에게 건넨 그녀의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다시 읽기를 결정한 그녀의 말>
“ 책들은 얼마나 훌륭한 동행이 되어주었는지. 그 무엇도 책에는 비할 데가 없다. 우리는 거기서 흥분화 평화, 안온과 위안을 얻는다. 무엇보다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인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시끌벅쩍한 좌파 집안에서 자랐고, 우리 집안에서 카를 마르크스와 국제노동계급은 감히 따지거나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신념이었다. 그렇게 나의 구체적 경험들은 처음부터 낱낱이 삶의 정치성에 물들었고 독서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사를 설정할 때 나 자신을 참여적 서술자로 활용하니 독자로 하여금 그날 밤 겪은 그대로 경험하고 내가 느낀 날 것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가 있었다.
일하는 여성이라는 자아 관념이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니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이 통찰은 새롭고도 심오했고 설득력이 있었다. 성차별주의는 어디에 가도 있었다. 날것의, 잔혹한, 범상하고도 내밀한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건재해온 성차별주의.
성장기 때 함께한 책들을 펼쳐 들고 그제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책들에 나오는 대다수 여자가 피도 살도 없는 뻣뻣한 막대기이고, 오로지 주인공의 운명에 좌절을 안기거나 행운을 선사하ㅣ 위해 등장할 뿐이라는 것을. 주인공은 거의 언제나 남자였다. 그들이 헤치고 나아가는 삶의 행보는 나와 닮은 점이 없는 데도 일평생 독자로 살면서 그 남자들과 나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분석으로 통합된 연대를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이미 상처 입고 훼손된 자아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려면 이데올로기만으론 어림도 없다는 사실을 , 열렬한 수사와 엄정한 현실의 요구 사이에 전혀 검증되지 않은 확신이라는 위태로운 무인지대가 가로 놓여 있었다. 이론과 실천의 괴리라는..
내 인격에 내재한 모순이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대화를 하면 남의 말 허리를 자르고 호전적으로 따지고 들었고, 가족 모임은 따분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며 시들어가면서도 인간관계는 오히려 하나씩 끊어내고 있었다. 자아분열에 매몰된 나머지 자처해 버린 편협한 경험의 궁지란 , 이젠 얼마나 소름 끼치게 느껴지던지!
통합된 자아에 대한 갈망.
안톤 체홉이 말한 내용처럼 “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다 해도 ,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방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 “
도 다시 나는 다르게 읽게 되었다.
시대가 언제이든 문학작품의 중심 드라마는 치명적으로 유독한 인간의 자아 분열에 달려 있다는 사실. 자아분열이 유발하는 두려움과 무지, 그로부터 올라오는 수치심, 수의처럼 우리를 뒤덮어 말려 죽이는 그 미스터리는 항상 언제나 문학의 관건이었다
글에 암묵적으로 내재하는 그 힘을 알게 되었다. 위대한 문학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이 아니라 그 위업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다.
<아들과 연인- D, H. 로렌스>
20대에 읽었던 아들과 연인. 성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의 요체였다. 거의 신성한 텍스트가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이 흐르는 사이 이 책을 3번 더 읽었다. 그때마다 동일시하는 인물들이 바뀌었다.
30대 중반에 두 번 결혼하고 두번 이혼하고 여성으로서 갓 해방된 상태 성적 주체로서 폴에 감정이입했다.
그리고 이 책이 단순히 성애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오독만이 아니라 앎이 아직 여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국 중부 지방 관산촌을 배경으로 서사는 모레 부부와 제 자녀의 행보를 따른다.
중심인물은 모렐 부인과 아들.
모렐부인은 남편을 혐오하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낭만적 감수성을, 정서적인 굶주림을 달래줄 반려의 관계성을 아들들에게서 찾는다. 특히 폴에게서
어머니의 영혼의 불안은 아기에게 침투하고 그녀의 숭모와 의지에 속박된 소년은 10대가 되어 어머니 곁을 영영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하지만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알게 된다. 내면의 삶이 이끄는 방향으로 자기 발견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어어미는 뒤에 홀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폴의 딜레마를 로렌스는 에로스적 사랑이라는 은유다.
나 역시 인간 존재의 중핵에 다다르려면 감각을 통해 자기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고 확신의 정수로서 그 책을 체험했다.
말년에 들어 다시 읽은 이 책의 인물들은 성애게 인생을 건 데 대한 대가를 치르며 사무치는 원통함에 적어있다. 폴의 엄마는 영혼의 고독에 포위된 채 단절되었다는 느낌에 질식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부 나랑 대체 무슨 상관이지 이게 다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앞으로 낳을 아기까지다. 나는 아예 계산에 없는 것 같잖아. “
그녀는 박탈 중에서도 아주 치명적인 박탈 실종된 내면의 삶을 의식한다.
그리고 모렐 씨. 그는 상호 공감하는 동반자 관계를 상실하고 그 때문에 생래의 타고난 재능인 천진난만한 관능성을 계속해서 잠식당하는 미성숙한 남자일 따름이었다.
감각하는 인간이면서도 자기 내면과 대화할 줄 모르고 언어가 없어서 기쁨을 잃은 본연의 자아에 접근할 길도 막혀버린 그의 머릿속엔 혼돈만이 가득하다. 감정을 표현할 길 없는 모렐은 일이 끝나도 곧장 집에 갈 수 없고 아내는 이제 그런 남편을 보기만 해도 진저리를 치며 혐오했다.
작가는 내면을 분열을 사유하도록 등장인물들을 이끌지 않고 독자가 대신 사유하게 한다.
사랑보다 전쟁에 가까운 정념. 성적 황홀경에 대한 갈망 배후에 도사린 날것의 야성, 그 번민의 깊이, 파멸의 두려움, 다시는 돌이 킬 수 없는 결과, 여기에 성애에 굶주려 치러야 했던 대가를 적나라하고도 냉정하게 응시하는 백 년 전의 시선이 있다. 로렌스.
나는 노년에 와서야 아들과 연인에 근본적으로 깔린 진짜 문제를 깨달았다.
“ 어떻게 해야 안에서 밖으로, 내면을 외재화하며 자아를 구축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
로렌스는 평생 조롱과 연민을 번갈아 오가는 감정. 일평생 이 감정을 마음에 품었고 그것이 성장기 주변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로런스는 서구 문화가 내면의 번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지건이었던 프로이트의 세게 초반에 글을 썼다. 관능성 억업이라는 그의 은유는 실제로 모더니즘이 인간 의식이라는 가보지 않은 땅의 관문을 열어젖힐 때 쐐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내면을 외현 한 자아를 형성하려면 감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도 경험으로 터득했으니 성애의 황홀감은 가대를 배신하기 일쑤고 행여 황홀감이 찾아온다 해도 그 걸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면 이미 완성된 자아가 있어야만 한다.
<연인-뒤라스>
“내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 버려서. 열여덟에 이미 되돌 수없이 늦어 버,,, 나는 열여덟에 이미 늙어버렸다...”
젊음의 숨겨진 자락들, 내가 파묻어버린 어떤 사실들, 감정과 사건들에 대해 말하려 한다. 뒤라스는 이 주제로 다년간 독자를 홀리고 매혹했다. 자아를 형성한 기억에 엄습당하면서도 동시에 그 기억을 떨쳐버리고 , 자유로워지려는 욕망에 모든 걸 잠식당한다. 아니, 에테르에 마취되어 버린다.
압도하고 유린하는 욕망. 소녀의 눈에는, 자신의 욕망이라는 굶주림을 통해 인간관계의 노구적 본질을 이해하게 되리라는 사실이 훤히 보인다. 그 앎이야말로 탈출의 티켓이라는 것도.
뒤라스는 30년에 걸쳐 이 소재를 허구적 추상에 담아 내놓고 또 내놓으면서 알아버렸다.
그건 바로 그가 혼자라는 것. 혼자야말로 그라는 것. 죽을 때까지 쾌락을 추구했기에 더더욱 누구 하나 없는 혼자라는 교훈이다. 단절이 인간을 쾌락으로 내몰고 쾌락은 마약처럼 작용하며 그 마약에 취해 심지어 단절을 더욱 첨예하게 느끼는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를 뒤라스는 심오한 실존의 문제로 절감했다. 그 결과 에로틱한 사라아이라는 중독적이고 복잡한 실체를 파헤치며 독자를 끌고 들어가는 뒤라스의 기교는 가히 어마 어마한 힘을 과시한다.
연인에서 도가를 뒤라스의 가족이라는 잔인무도한 상태로 거듭 초대받지만 결국 튕겨 나온다.
이 불행한 부적응자들의 집단은 항구적인 주변성으로 자아를 경험하는 사람들 특유의 쓰디쓴 무표현으로 수시로 퇴행한다.
“언제나 말이 없고 서로 멀찍이 거리를 둔다. 이것은 돌이 된 가족이다. 속속들이 화석화되어 절대 뚫을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서로 죽이려고 든다. 살해를 시도한다. 서로 말하지 않고 심지어 보지도 않는다. 본다는 건 언제나 굴욕이다. 우리는 살아야 한다는 근본적 치욕으로 단합한다. 이 지점에서 공통 운명의 핵심에 다다른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사실에.”
다르게 펼쳐졌을 삶의 비전에 관통당하면서도도 뒤라스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실제로 태어난 삶의 현실이란 상실과 방기 그 자체이며, 가석방의 희망마저 품을 수 없는 구금형을 선고받았음을 절감한다.
나도 뒤라스처럼 훽 방향을 틀어 회피해버리곤 했던 기억이 있다. 뒤라스가 생을 바쳐 집착한 감정의 자유낙하를 확증하기보다 차라리 은폐하려는 계산이었다는 것을. 그건 그가 성애의 망각에 평생을 바치고도 자유를 얻지 못했듯이 어른이 된 나의 앎도 나르시시스트적 상처에서 나를 해방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쩌다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과 차마 알려고 들 수도 없는 것 사이에 일부 탁월한 작가들이 필사적으로 예술을 창작해 모든 걸 쏟아버리는 감정의 쓰레기장이 있다. 뒤라스가 그런 작가였다.
<낮의 열기- 보엔>
극단적인 심리상태의 힘을 실감 나게 만드는 데 있는 작가. 그 심리야말로 우리가 서로의 영혼을 자근자근 살해하ㅗ 정기를 마취하고 심장을 옥죄는 원인이다. 산문이라는 표면아래로 신경의 저류가 흐르고 그 근원엔 심리적 손상이 있는 작가들이 있다.
감정적 단절은 사람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지만 그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내면의 공허다.
불안은 두려움만큼 영혼을 잠식하지만 불안이 등장하면 모더니즘의 전의는 뒷자리로 물러선다.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실존적 허무에 골몰하기는커녕 소외의 절망을 달변으로 표현하느라 여념이 없다.
<나의 소명, 인간관계, 가족의 말들, 긴츠부르그>
톨스토이가 한 말이 있다. 사회 문제나 저이문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다면 ㄱ그딴 주제에 단 할 글자도 낭비할 생각이 없지만 20년 후에도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삶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책을 쓰라고 한다면 전력을 다 바치겠다고.
긴츠부르크를 읽을 때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중요한 깨달음에 눈을 떴고, 나중에 내가 과연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를 사유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 타인으로 느껴질 만큼 오래 살고 나서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사실에 다른 누구보다 내가 더 놀랐다. 긴츠부르그를 다시 읽으니 계시뿐 아니라 위안도 얻게 된다.
손가락을 키보드에 올려두면 안전하고 단단히 중심이 잡혀 있으며 아무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분되면서도 평화로웠고, 산만해지거나 집중력이 흐트러지거지도 않았으며 내게 없는 것들에 굶주려 허덕일 일도 없었다. 글쓰기가 내게 준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생생한 현실로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긴츠부르크의 유일한 관심사는 초지일관 우리가 서로를 사람답게 대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내면의 갈등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그의 책은 서술자가 자기 자신의 감정적 역사를 탐문하는 천재적인 고찰로부터 서사적 추동력을 획득한다.
성장기에 겪은 가족의 감정적 폭력으로 시작해 끝도 없이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는 부모에게 자신과 형제자매들이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지 도 온 가족이 아버지의 터무니없는 감정 기복에 얽매여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기억한다. 자기 방어는 감정적 거리를 만들어 내고 이는 훗날 무거운 대라고 돌아온다.
“이따금 우리는 오후 내내 각자의 방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장기론 했다. 우리가 상상 속에서 꾸며낸 존재는 아닐까 의문을 가졌다. 텅 빈 공허.
어느새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 영적 거리감은 다른 사람들에게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며 도착적 쾌감을 즐겨도 된다는 면허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연을 끊은 친구는 우리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건 남에게 고통을 줄 힘을 손에 쥐고 있다는 의미이니까.
“이제 우린 어른이 되었고 사춘기인 우리 아이들은 이미 돌 같은 눈길로 우리를 보기 시작했다. 인간관게이 긴 사슬이 반드시 기나긴 포물선을 그리며 펼쳐져야 한다는 것도, 우리가 서로를 향해 작은 연민을 품는 지점에 닿을 때까지 반드시 걸어야 할 그 머나먼 길들도, 이제는 다 알고 있지만, 그래도 속상해져서 불평을 늘어놓는다. “
그의 회고록에서 파괴된 문화란 가족이 살아낸 시대가 아니라 차라리 가족 그 자체다. 그러나 소설이든 회고록이던 주인공은 사막의 풍광을 헤매고 그로 인해 초현실적 재질을 띠게 된다.
긴츠부르그 그 역시 자기 자신에게 타자였고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글을 쓴 것임을 말해준다.
<이름 없는 주드-토마스 하디>
소설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요소는 공유된 감수성의 힘이 지닌 한계가 기가 턱 막힐 정도로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와 같은 감수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 늘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다가 틈만 나면 봇물처럼 터져 나와 빈약한 자기 인식의 평원에 범람할 틈을 내는 원초적 야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는 없다.
소설 속 수
“ 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볼 수 없는 사람이기에,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 때문에 겪는 불행위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기에 알기를 원치 않기에 자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홀로 선 자아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족감이라는 신비스럽고 흥분되는 가능성.
하지만 10년 후 수를 보면서 그가 그냥 불감인 것처럼 보였고 종교에 엽기적으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율했다. 합리적 정신의 피막 아래 얼마나 어마어마한 미신적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지. 절대로 안 그럴 것 같은 사람들에게서 조차. 처음으로 나는 느꼈고, 이해했다. 처음으로 내가 이해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건 수의 수동성 한가운데 자리한 어둠이었다. 내가 너무나 잘 아는 고의적 맹목, 아 물론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잘못된 계급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하디가 수의 내면에서 빛나게 만든 그것은 자기 경험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두려워하는 태고의 공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 공포가 얼마나 부지불식간에 난장을 불이는지. 그 저항은 또 얼마나 조롱에 차 있는지.
그녀는 말한다.
오래오래 살다가 언젠가 손에 또 다른 색 펜을 들고 그 책을 다시 읽을 날이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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