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시선으로부터

숨그네 2022. 3. 31. 10:26

『시선으로부터,』는 시대의 폭력과 억압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던 심시선과 그에게서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중심의 삼대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심시선과, 20세기의 막바지를 살아낸 시선의 딸 명혜, 명은,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손녀 화수와 우윤. 심시선에게서 뻗어나온 여성들의 삶은 우리에게 가능한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협력업체 사장이 자행한 테러에 움츠러들었던 화수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설명할 언어를 찾고자 한다. 해림은 친구에게 가해진 인종차별 발언에 대신 화를 내다가 괴롭힘을 당했지만 후회하거나 굴하지 않는다. 경아는 무난한 자질을 가지고도 오래 견디는 여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뒤따라오는 여성들에게 힘을 주고자 한다. 바로 심시선이 그러했듯이.

이제 내가 그 아주머니들보다 나이가 많은데, 나는 영영 음식을 못하는 사람으로 남았으니 비척거리는 젊은이가 찾아와도 먹일 것이 없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_299쪽

정세랑이 불러낸 인물들은 인간이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서 다른 존재들과 어우러지는 세상을 희망한다. 까만 고양이를 실수로 밟으면 안 되니 센서등을 달아야 한다고 말하는 난정, 인간만의 미감을 위해 새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분노하는 해림, 꽃목걸이의 면실이 거북이를 죽일 수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 “남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이랑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인간. 후자 쪽이 훨씬 낫지”라는 말은 이들을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자신이 잘못한 것 위주로 기억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절실하게 통감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위기와 위험을 예민하게 짚어낸다. 유조선 침몰 소식에 새들을 씻기러 가는 지수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정세랑의 섬세한 감수성이 가리키는 세상이 멀지만은 않음을 예감할 수 있다.

심시선 여사와 그의 가족들은 부조리와 불합리에 소리낼 만큼 강단 있으면서 세상을 예민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 연약함은 세상의 빈틈을 날카롭게 감각하고, 빈틈의 존재들은 강단 있는 마음을 나누며 목소리를 획득한다. 정세랑의 세계에서 선함은 강함으로 쓰인다. 선한 의지는 강한 행동을 추동하고, 어떤 존재도 소외시키지 않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고안해낼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정세랑이 건네주는 선함의 상상력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서 "보건교사 안은영"을 주문했다. 

간간이 정세랑의 글들을 읽어볼려고 한다. 내게는 새로운 작가이고 이야기 전개 방식이나 묘사가 낯설지만 그가 만들어 내는 서사공간은 충분히 새로운 세상을, 아니 현재를 선한 방식으로 꿋꿋히 살아내는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것 같다. 매일 똑 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것...그것이 대단한 재능이다. 아무리 대가라 하더라도 즐거워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가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맂 않는다면 해볼 만 하다. .-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