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서울을 걷다.도시인처럼 ( pretend it's a city)

숨그네 2022. 5. 23. 18:04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제작 연출한 <도시인처럼>은 직설적인 비평가이자 휴머니스트인 뉴욕커 프랜 리보위츠의 일상을 따라가며 찍은 다큐다. 휴대폰 화면이 자신의 세계인양 내려다보며 걷는 뉴욕의 사이보거들과 달리 프랜은 뉴욕거리 바닥 구석구석 새겨둔 동판들을 유심히 내려다 보고 사람들을 구경하며 유유히 걸어다니는 예사롭지 않은 패셔니스타이자 자유인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속도로 도시를 유영하듯 걸어 다니는 방랑인이다. 그녀는 자신이 오랫동안 산 도시 뉴욕에 대한 삐꺽거리지만 굳건한 믿음과 애증이 있다. "Pretend it's a city where there are other peple who are not here just sightseeing who have to go to people." 지하철 역공사를 위해 역을 몇주간 닫는 것은 개모자이크 예술작품을 벽에 걸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객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하니까 정말 수리해야 할 부분들을 위해 세금을 써야한다고 일갈하는 평범한 현실주의자 그녀.. 그녀가 말한다.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은 시골보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 짜증스러운 일이 매일 일어나는 뉴욕에서의 삶이 진짜 고달픈 어른의 삶이지 않겠는가?"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시대의 억압에 강하게 맞서 사회운동가처럼 싸우지는 않지만 그녀가 관찰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분명히 그리고 매우 유쾌하게 반응하고 표현하는 그녀. 자신감 넘치고 감수성이 살아있는 냉소적 위트. 더이상 책은 도통 팔리지 않고 신문가판대가 자전거대여점으로 바뀐 뉴욕의 타임스퀘어, 퀸즈 뮤지엄, 뉴욕 공립도서관, 악명높은 지하철 .. 오늘도 그녀는 뉴욕의 거리를 천천히 걷고 있을 것이다. 그너의 명언이다. " Think before your speak, Read befoure you think."

서울의 거리를 무턱대고 5월의 선선한 바람과 함께 하루 10 킬로 이상을 걸어다녔다. 오랫만에 종로1가와 3가 사이, 광화문일대, 인사동, 북촌, 재동, 청와대로 이어지는 세종로,그리고 청담동을 유유히 걸어다니며 얼마전 감명깊게 보았던 <도시인처럼>을 보고 느낀 점을 적어 둔 일기장을 펴서 옮겨본다. 그녀처럼 오랫동안 산 도시를 매일같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도시의 곳곳을 걸어나니는 모습이 좋았나보다. 단지 유명한 장소를 요즘 사람들처럼 인스타나 네이버에서 검색해 그곳만을 보고 오고싶지가 않았다. 걷다보니 청담동 소전서림 건너편에 오래된 숲이 있어 건너가 봤더니 경기고가 있었고 문정희 시인의 생각하는 숲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서울 재동 거리에 있는 깡통만두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테이블링 시간을 놓쳐 결국은 대기를 포기하고 옆집에 있는 순부두집에서 점심식사, 그리고 입간판 없이 자그마한 천글씨로 되어있는 식빵가게(안국 531))에 들러 맛있는 통밀식빵 하나를 사고, 걸어서 헌법재판소 건너편에 있는 이곳 아테네 라는 카페에 들러 맛있는 아테네라테 한잔.

도시의 무심하고 개성없는 현대식 건물곁에서 수십년간 살림집으로 살았을 한옥이 골목에 두어채 있어서 슬쩍 내다 본다. 종각 옆 종로 테라로사 커피집 바로 앞에 예쁜 돌담길을 끼고 있는 기와집처럼 도시에 표정을 입히는 것은 이런 모습의 전통가옥이 아닐까. 젠트리피케이션( 1964년 영국의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신사계급을 뜨하하는 젠트리에서 파생한 말로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는 혀상. 이과정에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에서 비껴있기를 살아남기주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독립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있는 것이 서울의 매력중 하나인것 같다. 이번에 가본 곳은 종각지하철에서 가까운 씨네큐브. 이곳에서 전 세계인에게 평화와 행복의 가르침을 남긴 이 시대의 스승인 틱낫한 스님, 그가 프랑스 보르도 근교에 설립한 명상 공동체 "플럼 빌리지"에서 함께 걷고, 먹고, 일하고, 차를 마시며 3년에 걸쳐 최초로 기록한 마음챙김의 일상을 영화로 담아낸 " 나를 만나는 길 Walk with me"을 보았다.  명상 그 자체가 되는 느린 템포의  몰입영화였다. 

틱낫한은 명상과 마음챙김 수행을 통해 평화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한다. 1926년 배트남에서 태어나 1942년 16살의 나이에 출가했다고 한다. 실천을 강조하는 참여 불교를 통해 소외된 자들을 위한 사회운동을 펼치고 배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강의했다고 한다. 이후 배트남에서 망명을 종용받고 프랑스에 정착, 불교수도원이자 명상공동체인 플럼빌리지를 설립했고 1982년 뇌출혈로쓰러진후 요양을 하다 2-21 1월 22일 95세의 일기로 열반했다. 그의 뼈는 유언대로 플럼빌리지의 명상의 길에 뿌려졌다고 한다. 영화 중 어떤 젊은 수도승이 부모님들이 사는 곳을 방문해서 자신의 어린시절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일생동안 하고싶거나 해야할 일들을 연령별로 정리해 둔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었다. 무소유로 자유롭게 명상을 하며 소외된 자들을 위해 묵상기도를 하고 마음챙김행사를 하며 사는 그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거다. 우리모두처럼.

그는 그  욕망의 궤도에서 자진 이탈해서 무채색의 승복을 입고 하루하루를 걷고 명상하고 스승의 가르침대로 오직 현재의 이순간에만 존재하는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직 현재의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 도착하기 위해 명상을 하고 걷고......

 

경복궁. 뒤에 청와대가 있다. 얼마전 5월 10일 부터 국민에게 청와대를 개방한다는 윤정부의 정책으로 인근 거리들이 부산하고 사람들이 엄청 붐볐다.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청와대를 국민에게 개방하고 용산으로 집무실과 외교부공관으로 저를 이전한 윤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제각각 이겠지만 현대사와 함께한 대통령관저를  숱한 염려, 불편을 초래하면서 국민여론수렴 과정없이 5년 짧은 대통령 임기인데도 전격적으로 고집스럽게 서둘러 옮기는 것은 합리적인 의혹을 증폭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은 국방전문가 김종대씨가 한겨레와 인터뷰한 내용을 요약한것이다.

 

"청와대가 여태껏 운영해왔던 위기관리센터는 국보급 존재, 반드시 사수했어야 될 국가 핵심 자산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의 정보 시스템만 국방부 벙커에 옮겼다. 문제는 하드웨어에서 관련 시스템 30여개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제한된 공간에서 운영되려면, 그렇게 잘 돌아가도록 하는 시스템을 또 설계해야 하는데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공간에 최적화되도록 각종 디스플레이에 이게 실현되고, 충돌하지 않고, 거기 맞춰서 전문 요원들이 움직이고, 이런 부분들까지 새로운 상황실에 맞춰 설계해야 된다. 플러그만 옮겨서 꽂으면 된다는 건 위기관리 시스템이 뭔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몰라서 비롯된 언사들이다.”―청와대 지하 벙커에 원래 있던 시설과 장비는 어떻게 됐나. 그 자체를 옮긴 건가, 카피를 뜬 건가?“상황실은 이사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청와대에 있는 망과 장비를 뜯어다가 여기다 설치한다 이런 개념은 없다. 전부 새로 연결하고, 장비도 그 장비를 그대로 쓸 수 없는 게 많다. 기존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무력화된 거고, 그냥 매몰돼버린 것으로 보는 게 맞다.”―청와대 위기관리센터가 옮겨진 게 아니라 사장돼버렸다?“인수위 기간 국무총리실 업무보고 과정에서 ‘신흥안보위원회 설치’ 방안이 보고가 된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자칫 재앙의 시작이 될 수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군사·외교 위기가 아닌 일반적 사회재난이나 자연재해 등은 몽땅 관련 매뉴얼을 행정자치부로 이관하고 청와대는 외교안보만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매뉴얼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대응 시스템이 구축됐다는 얘기 아닌가. 관계 부처 간 협동 방식, 또 그것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정보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건데, 이걸 싹 없애버리는 순간 그 부작용은 2014년 세월호 참사 때처럼 나타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때 만든 그 매뉴얼이 바로 해난 사고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규정한 것인데, 그게 사라졌으니 참사가 벌어졌을 때 관계기관 간 협조가 됐겠나?”―당시 ‘컨트롤타워’가 어디냐는 얘기가 나왔다.“청와대가 ‘우리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다’ 이렇게 하고, 박근혜 대통령에겐 ‘전원 구조’ 허위 보고가 올라가고 그랬다. 지금 총리실에 신흥안보위원회를 두겠다는 건, 지금까지 청와대가 관리해온 사회재난이나 자연재해에 관한 매뉴얼은 총리실에 다 넘기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2008년과 똑같은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거다.”

 

청와대의 역사적의미 

 

-1993년 10월 철거되고 있는 청와대 옛 본관. 1939년 9월20일 새 총독관저로 낙성된지 54년만에 사라졌다. 옛 본관은 20세기 초 일본 전통 지붕 양식과 서구의 모던한 입방체 건축이 결합된 건축물이었다. 일제 공공기관 관저들의 권위적인 양식을 본떠 지었다. 1993년 8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전격 철거됐다. 현재 터엔 흙을 돋운 언덕과 본관 들머리 진입 시설(캐노피) 지붕의 꼭지 장식 절병통이 남아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권력 공간 청와대의 기원은 사실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결정적인 배경이다. 1926년 경복궁을 가로막고 총독부 청사가 완공된 뒤 여전히 회현동 근처 남촌의 왜성대 관저에서 머물던 총독이 출퇴근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경호상의 불편함도 있어 1930년대 중반 이전 방침이 결정되었지만 계속 공사가 늦어졌다. 곡절 끝에 미나미 총독이 부임한 1937년 착공했지만, 중일전쟁에 따른 물자 부족과 전시 경제 통제로 1938년 한차례 공사가 중단됐다가 1939년 9월20일 일본 신관이 참석해 전통 신도의 기원 예식을 올리면서 관저가 낙성됐다. 500년 조선 왕조의 위엄과 기품이 서려 있는, 나라의 법궁인 경복궁의 상징 공간에 관저가 들어간 데는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위력도 사실상 단박에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총독부 청사 옆 서촌과 북촌에 일본인들의 사택촌과 경성의전 병원 등의 관공서가 확실히 들어선 뒤인 1939년에, 그러니까 해방되기 불과 6년 전에 경무대 관저가 완성된 건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공간적으로 조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상징적 작업이 해방을 불과 6년 남겨 둔 시점에서야 최종적인 마무리를 지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청와대 관저는 이런 일제의 상징적 공간 침탈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는지를 증언하는 역사적 증거물로서도 의미가 있다.미나미 이후 1942~45년 총독으로 재임한 고이소 구니아키와 아베 노부유키는 바로 이 관저에서 인력 및 물자 공출령, 징병령, 정신대 동원 등 최후 발악기의 강제동원과 착취 정책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겼다. 관저와 용산 조선군(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한반도 수탈과 침탈의 양대 중추 거점이었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 미나미는 부하들이 지키는 용산의 조선군사령부 또한 통치의 텃밭으로 활용했다. 총독 관저와 사령부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였다.해방 뒤 총독 아베가 집기를 불태운 관저를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그대로 사용한다. 이승만이 뒤이어 경무대를 차지했고, 한국전쟁 개전 때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세차례 서울을 방문해 경무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생전 지인들에게 털어놓은 회고에 따르면, 김일성은 내부 가구와 집기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전한다.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백선엽(1920~2020)은 이에 대해 2016년 펴낸 회고록에서 “권력에 민감했던 김일성이 ‘경무대가 곧 내 차지’란 생각에서 아끼고 보존했으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풀이했다.1968년 북한 정권은 특수부대를 보내 청와대 습격 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심화된 남북 정권의 분단 갈등은 관저를 더욱 민심과 동떨어진 권력의 철옹성으로 만들었다. 이런 비사들은 청와대 공간의 역사가 단순한 역대 대통령들의 통치사가 아니라 일제 침탈사의 본류에서 비롯돼 분단 시대로 이어진 한반도의 험난한 현대사 자체였음을 일깨우고 있다.

 

인사동 거리 바로 옆에 숙소를 정했다( 나인트리프리미어호텔).숙소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수제 에일맥주와 맛있는 전통차와 음료를 파는 47번지와 쌈밥집 그리고 예쁜 한국정원과 대청마루로 된 바닥과 절에서 철거된 화문석문짝을 가져와 벽에 전시한 센스쟁이 주인장이 있는 한옥전통찻집,그리고 쌈지길. 서울 여행을 마루리 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