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한정원의 시와 산책을 읽고

숨그네 2022. 9. 20. 15:50



아마 한정원 시인은 그의 따뜻하고 유순한 그러나 마음의 우물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영혼의 비밀을 시간의 두레박으로 천천히 길어올려 매마른 마음밭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당찬 그녀의 글을 닮아 있을 것 같다. 우연히 다른 책을 읽다 만나서 구입한 아포리즘과 같은 그녀의 글들이 마음을 조용히 뒤흔들며 자꾸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다시 마음을 다소곳하게 만들어 멈춘 곳에 살그머니 있는 그녀의 깊은 사유를 따라가는 재미가 있어 아끼면서 몇날을 읽었다. 나의 책읽는 자세 또한 그녀의 단정한 글을 닮아 다소곳해진다. 사납고 힘든 일들이 세상에 넘쳐나 마음결이 심하게 상하고 무력한 자신을 어쩌지 못하고 내면에 화가 쌓일 때 한정원의 글들은 나를 위로해주고 날선 생각들을 가만히 가라앉혀 제자리에 놓아준다.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지만 마치 고양이가 얌전히 앉아 식빵자세로 발톱을 감추고 먹을 것을 탐미하듯 조용히 갈구하는 듯한 한정원작가의 글들은 뿌리깊은 나무의 가지를 세차게 뒤흔드는 바람결에 휩쓸려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잠시 멈추게 한다.
흔적 없이 마냥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들의 무정형함에 떨림과 파장의 물결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글에 무심한 일상의 사물들이 기지개를 켜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녀의 글에 잠시 멈추어 떨림을 길게 느끼며 음미하며 읽어본 것들을 옮겨본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른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드 매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
겨울은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래 추워봐야 한다고…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어쩌면 강도 영영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 소리를 얼려두나 보다. “

인디언 소녀가 친구에게 자신의 집으로 오는 길을 설명한다. -빨강머리 앤 에서 앤의 인디언 친구-
울타리를 지나서 바다 반대편 고사목 쪽으로 와 일렁이는 가는 물줄기가 보이면, 푸른 나무에 둘러싸일 때까지 상류로 올라와, 해가 지는 쪽으로 물길을 따라오면 평평하고 탁 트인 땅이 나오는데 거기가 나의 집이야”
내가 보는 것이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다. 내 몸, 내 걸음걸이, 내 눈빛을 빚는다 그러므로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산책을 사랑했고 산책하던 중 숨을 거둔 로베르트 발저의말” 나는 이제 더 이상 나 자신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다시 나 자신이 되었다. “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쉰한 살에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을 때 파울 첼란은 온전히 혼자였다. 그는 사랑보다 비극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폭력이 뒤섞인 세곙서 헛되게 말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늘 속에 머물기를 택했다.

우리는 구석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구석의 목소리는 곧 꺼질 불씨처럼 위태로워서 구석끼리 자꾸 말을 시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 거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영혼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불을 지른다. “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늙었구나. 노인을 경외하는 것은, 내가 힘겨워하는 내 앞의 남은 시간을 그는 다 살아냈기 때문이다. 늙음은 버젓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한 결과 일 뿐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열차가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그러하듯, 흔들림 없이 잘 멈추기 위해서 늙어가는 사람은 서행하고 있다. “

영원이라는 이불 없이 하루는 흠없이 포근하지 않다. 오늘은 영원 속에서 거듭 존재한다. 절망스럽게도 영원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시간의 범위 안에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지속의 개념 지속에 대한 동경이 필요하다. 어긴가에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
한동안 말을 잃은 적이 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잃은 것이다.
어떤 일을 겪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살 수은 없어, 그건 거짓된 삶이다. 이제 볕이 보이네. 하지만 그늘 속에 몸을 둔 채로 볕을 보는 사람. 내 몫의 볕이 있음을 아는 사람. 볕을 벗어나서도 온기를 믿는 사람을 될 수 있다.

내 안에는 굴뚝이 있다. 땅거미가 지면 거기에서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나는 꼼짝없이 연기 속에 갇혀 없는 사람이 되니다. 그것들은 너를 어느 것에도 온전히 속하게 하지 않는다. -저녁의 시간”릴케 두이노의 비가
선명함을 잃을 때 모든 존재는 쓸쓸함을 얻는다. ‘
사람 하는 사람들이여, 세계란 우리들의 내면에 아니고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삶은 변용하며 떠나간다 그리고 외부세계는 시시로 초라하게 사라진다. “
눈에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옮기는 것 저녁이 하는 일이다.

실비아 플러스
흐린 날에는 모든 것이 떨어진다. 새는 날개를 떨어뜨리고 구름은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사람은 기분을 떨어뜨린다. 흔히 그보다 조금 부드러운 단어인 가라앉다를 선택하지만. 침침한 빛, 자욱한 사물 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향,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언어들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몹시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산책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이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또한 자연이나 스치는 타인과도 순간이나마 일치한다. 그 일치에 나의 희망이 있다. 부조리하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그러한 겹침마저 없다면 , 매 순간 훼손되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견딜까.
- 방안에 있을 대 세계는 내 이해를 넘어선다 그러나 걸을 때 세계는 언덕 서너 개와 구름 한 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살았던 아무개들, 심지어 들판에 버려진 듯 있는 무덤에서도 반드시 걸음을 멈춘다. 죽음은 강한 자력으로 나를 당긴다. 삶만큼 가까이 다가가 보고 싶은 것이 죽음이다. 릴케는 “이 세상 어디에서 죽어가는 사람은 나를 응시하는 사람”이라고 썼는데 그러니까 나는 그 응시에 눈을 맞추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타인의 죽음에서 다른 그 무엇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주 조그만 희망이라도 말이다.
남쪽 도시에 가면 들르는 성직자 묘지가 있다. 입구 기둥에 “오늘은 나에게 , 내일은 너에게” 죽음이 모든 존재를 공평하게 응시하고 있음을 간명히 전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