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이야기

서울 책방 순례 -풀무질

숨그네 2022. 12. 1. 12:37


먼저 책방지기 김치현 님이 한겨레 동네책방에 올린 글을 인용한다
어떤 존재도 소외되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공간. 무한 경쟁의 도심 속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 세상에 걷어 차인 온갖 소외된 것들이 굴러들어 와 여기서 안식을 취하고, 그렇게 사회에서 소홀하게 다뤄진 가치들을 오롯이 품고 보듬는 공간.”

풀무질은 ‘독립책방'도 아니고 ‘대형책방'도 아닌 그 어중간한 어딘가에 있다. 독립책방이라는 단어에 드리워진 이미지는 작고 아담한 공간에 옹기종기 모인 독립 서적들이거나 여기 아니면 찾기 힘든 책들을 파는 그런 곳 아닌지. 그에 비해 우리는 공간도 널찍하고 독립 서적도 잘 들여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책은 다 들여온다는 얘기는 또 아니다. 대형서점이라 말하기엔 부족하다. 굳이 콕 집어 말하면 ‘우리 멋대로' 들여온다. 인문사회과학 전문 책방이라 하나 뭔들 ‘인문사회과학'에 들어가지 않을까. 결국은 우리가 ‘읽고 싶은' 책을 들여오고, 우리가 ‘귀하다' 생각하는 것을 선보이고, 소개하는 거로 만족한다.

풀무질은 세상에 걷어 차인 온갖 것이 잔류하고 남아있는 책방이다. 소형과 중형 가운데에 모호하게 끼어서 낡은 책과 새로운 책이 한데 뒤섞여 있다. 인문사회과학은 자본주의에 걷어차였고, 그중에서도 노동이니 여성이니 환경이니 하는 분야들은 경제, 경영, 자격증에 걷어차였다. 떠밀려서, 혹은 연대하다 보니 여기에 뭉친 아련한 존재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맞대고 있는 공간이다.
피가 튀기는 치열한 시장에서 너무 낭만적으로, 한편으론 자기만족적으로 꾸려나가는 책방이다. ‘풀무질’이라는 이름의 서점이 처음 문을 연 1985년부터 그랬다.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의 아지트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타협하고, 고민하며 ‘팔릴 만한 것'을 들여올 때도 물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우리의 기조를 유지하는 건 우리의 취향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러져 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닦는다. 그 반짝임은 분명 누군가에게 필요한 반짝임임을 믿는다. 언젠가 필요한 이에게 발견되는 순간 바로 그 사람에게 눈부심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우리는 각자의 찰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고 , 모두에게 예비된 특별한 순간들을 모아놓는 사람들이다.

나는, 풀무질은 은근히 타오르고 싶다. 오래오래 따뜻하고 싶다. 초반에 풀무질은 ‘불씨를 나른다’는 표현을 썼다. 지금 우리가 다섯 번째로 불씨를 넘겨받았다. 까딱하면 사그라질 불씨라 온몸으로 품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들까지 품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세상이라 다들 법석이지만, 그 와중에 밑에 깔리는 무언가를 밝히고, 감싸고 싶어서 이러고 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어쩌면 그냥 여길 떠나서 각자 살길 찾는 게 빠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다들 떠나지 못하고 있다. 책방으로 도서 출판계의 거상을 꿈꾸고 그런 건 없다. 풀무질 들어온 계기도 그냥 이게 없어지지 않길 바랐던 거고, 지금도 마을 한쪽에 자리 잡고 오래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 책의 흐름이, 책을 통해 이어지는 사람 사이의 흐름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월이 갈수록 마음이 가늘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아직 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걸 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나도 계속 걷는다. 먼 길을 걷겠지만 같이 걸으면 덜 힘들다. 오늘 좀 느리게 걸었다고 해서 내일 뛴답시고 허둥대지 말자. 어쨌든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책방을 운영하다 보면 책을 추천할 일이 많다. 매주 올리는 ‘이주의 책'도 어느새 100권을 넘겼다. (풀무질에서는 매주 책을 한 권씩 소개한다. 그간의 추천 책을 모아보려면 인스타그램에서 ‘#풀무질책추천’을 검색해도 좋고, 풀무질 누리집 https://poolmoojil.com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이 책방 전체가 하나의 큐레이션인데. 세상이 봐주지 않던, 모른 척하던 모든 것이 여기에 가지런히 모여있는데. 여기서 소중하지 않은 책이란 하나도 없는데. 풀무질의 더 깊은 곳으로 안내하기 위한 물꼬라고 자신을 설득해도 마음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남고 싶고, 살아남아야 한다. 세상을 향해 너희가 틀렸다고, 우리는 없어지지 않는다고 외치고 싶다. 악당처럼 끈질기게 남고 싶다. 명륜동 지하에 모인 모든 생각과 글들이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풀무질이 지하에 있는 이유는 결국 세상의 뿌리가 여기 모인 책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이 말대로 세상에서 이제 걷어 차이고 뒷방신세가 된 책들이 빼곡하게 서가에 꽂혀있다. 하지만 세상이 밀어내지만 그대로 물러날 기세의 책들이 아니다 이 많은 사회인문학 책들은 풀무질 하듯 뜨겁게 타오르는 메세지들을 강인하게 담고 있는 듯 하다. 이 책들을 읽고 불온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젊은 사회과학도들이 거대한 자본주의 물결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고 사회를 좀 더 나은 궤도로 옮겨놓기 위한 인문적인 힘을 책에서 견인해 내지 않았던가. 책은 잠들어 있지 않다. 비록 지금은 책을 찾는 뜨거운 마음들이 예전에 비해 약해져서 책들이 서가에서 잠시 쉬고 있을 지 모르나 그들은 아직 잠들지 못한다.

디지털 미디어의 영향으로 모든 것이 핸드폰 안의 디지털 정보검색으로 가능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필요한 정보의 유통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의 원천은 물질로 되어 있는 책일 수 밖에 없다. 쉽게 눈앞에 나타나서 번쩍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와 같은 지식의 얄팍함에 언제 부턴가 마치 오래된 그리움처럼 손안에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을 느끼면서 한장한장 책장을 넘기면서 종이냄세를 직접 맡고 싶어하는, 지식의 지층을 좀 더 물질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으니까. 지금의 풀무질 서점은 어쩜 낡은 전설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소비상품의 신비화로 자신의 누추한 존재감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에 힘입어 우리는 얼마나 자의식에 시달리면서 성찰없이 소비문화에 쉽게 편승하면서 살아왔는가. 그게 다른 이들도 다 그러니까. 저렇게 마치 그 행렬에 끼지 못하면 낙오가 되는 듯이 티비를 켜기만 하면 정신없이 화려하게 광고하면서 우리의 허약한 정신을 빼앗기는 상품의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늘어가는 과소비로 우리의 정신 근력은 많이 야위웠고 방향감각은 상실되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인가라는 어쩌면 고루하고 진부한 아도르노적인 질문이 우리를 늘 따라 다니며 우리의 발길을 결국은 책방으로 돌리게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니까.

의자. 단독자로서의 삶과 마주침. 단독자로서 우리는 살아봤는가. 오래된 농담처럼 느껴진다. 쉴새없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는 세상에서 가만히 책상에 앉아 자신의 숨소리 목소리 그리고 조용한 침묵의 소리를 들어본적이 언제였던가. 진정한 사유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 이처럼 단독자로서의 자신과의 마추침이 먼저 있어야 그 힘으로 타인과 마주하며 살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공부방이 아니라 책을 읽고 생각 할 수 있는 혼자만의 방. 혼자만의 의자. 이 공간의 메타포는 깊고도 의미심장하다.

나와 다른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질문들에 대한 궁금증으로 책방에 달려가곤 했다. 예전처럼 책장을 넘기며 저자의 말 이나 책뒷편에 있는 평론가들의 서평이나 출판사의 추전의 글을 꼼꼼히 읽고 책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아서 일까. 요즘은 파와 마늘을 깨끗이 씻어서 손질하여 바로 조리 할 수 있도록 판매자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은 너무도 불편한 편리함처럼 책에 대한 소개를 이렇게 해 두는 곳이 많다. 참 많이 책방지기와 서점 운영인들이 독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노력을 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까지 독자들을 위한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가 라는 씁쓸함이 들기도 한다. 책은 어쩔 수 없이 독자들이 자신이 필요한 지적인 갈망과 욕구를 찾아서 헤메이는 여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문사회과학 책이나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들은 쪽집게 참고서가 아니니까.

어렵게 물어물어 찾아간 풀무질은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한다는 독특하고 화려한 인스타그램용 공간이 아니다. 상업용 건물 한켠에 작게 지하로 난 길을 내려가 녹색문을 열면 이렇게 묵직한 책들이 진열돼어 있다. 요즘들어 인터넷 서점에서도 찾기 힘든 한세기의 지적인 지층을 흔들며 지식인들에게 논쟁거리를 제공하고 사유하게 했던 작가들의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책방 구석에 놓인 작은 책상앞에 앉아 컴퓨터로 일을 하고 있는 책방지기의 눈은 피곤함이 묻어나고 이마에 근심과 힘듦이 여러겹으로 교차하고 있었다. 책읽는 이들이 활발하게 책을 뒤적이고,책방주인과 소통하며 책을 구입하고 또 필요한 독서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책방운영비를 비롯한 책방지기로서의 노동의 댓가를 정당하게 받는다면 그의 열의는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나 지금도 빚을 갚아나가야 하는 사정이라면.
유럽과 선진국들의 작은 책방들의 생존비결은 물론 정부나 지자체의 재정적이고 문화정책적인 지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그 책들을 읽어내는 독자들이 꾸준히 줄지 않고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으로 대체되지 않은 독자층이 두껍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네책방이 신자유주의 디지털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할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가볍지 않은 물음과 함께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 고 김현 평론가님의 사라짐, 맺힘, 그리고 김소연작가의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우즈의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책을 구입했다. 풀무질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