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야기

말- 장폴 샤르트르

숨그네 2025. 5. 15. 23:13

“구토"는 사물과 자기와의 거리를 느낄 때의 감정이다. ”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 문학가 사르트르를 우연찮게 다시 만난다. 아들이 최근에 빠져들었던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언급된 사르트르에 대해 궁금해한지라 20대 초에 어렵게 접했던 그의 작품을 다시 구매해서 두 권을 읽었다.  구토와 말. 
먼저 구토에 대해 살펴보자. 
그가 30대 초에 쓴 구토는 실존에 직면한 불안한 젊은이의 불안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재미로 읽는 책은 아니고 대단한 서사적 구조가 있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사유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먼저 읽은 그의 작품에서 인상적인 말들을 담아 본다. 
구토는 앙투앙 로캉탱의 서류 속에서 발견된 기록이라고 소개된다. 그는 그 당시 아프리카 중앙유럽 극동지역을 여행하고 나서 드 롤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연구를 완성하고자 3년째 부빙에 체류하고 있다. 
그가 생각한 최선의 일은 그날그날 일어난 일들을 적어두는 것이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일이라도 그 위앙스며 사소한 사실들을 놓치지 말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킨다. 그의 일상은 지루하고 따분하다. 
<나의 추억은 악마의 지갑 속에 있는 금화와도 같다. 그 지갑을 열면 낙엽밖에 없으니 말이다. >라며 주인공은 현재 속에서 도피할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나날이 아무런 운율도 이유도 없이 덮친다고 허무적으로 말한다. 
"내 생활의 순간순간이 추억으로 되씹는 생활의 순간처럼 연결되고 질서 있는 것이기를 바랐어. 그것은 시간의 꼬리를 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라는 말을 한다. 
"어휘가 사라지자 그것과 함께 사물의 의의며 그것들의 사용법이며 가냘픈 기호가 사라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나는 혼자서 그 검고 울퉁불퉁하고 마디가 져서 내게 공포를 주는 나뭇더미와 마주 앉아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을 " 여분의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고독과 자유에서 자유는 어쩐지 죽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오랫동안 사귀었다 헤어진 여자친구 안 나와 만나고 나서 그는 또다시 깊은 절망감과 함께 안도감을 느낀다. 
"나는 안나처럼 연명하련다. 먹고, 자고, 먹고 나무들처럼 천천히 고요히 존재하련다. " 
"습관은 여전히 분주하다. 조용히 약삭빠르게 그들의 피륙을 짜고 있다. "
그리고 그는" 지금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공허한 것 같다. 그러나 그 공허를 견뎌내고 구토를 지연시킬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즉 삶의 비극성과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 자신을 구원하고 신을 위해 쓰는 작가, 샤르트르.
샤르트르의 사상은 우선 이 사물들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사물들에 인간이 부여한 의미를 제거하고 존재하는 사물 자체를 보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 존재하는 사물에 본질이  수여됨으로써 그것은 하나의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한없이 구토만을 느끼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 구토의 심한 허무주의에 사르트르는 빠져버리지 않고 목적도 이유도 없는 우리 존재의 우연성을 인정하기로 한다. 그러면서 이 목적도 없고 이유 없는 현존성에 이유를 주고 시체를 이룩하기 위한 사르트르의 사고는 곧 대상과 의식의 문제로 옮겨간다.  "의식"을 지탱하는 어떤 절대 혹은 칸트식의 물자체를 상정할 수 없는 그는 유일한 방법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의식"만을 말할 뿐이다. 
<말>
"인간들이여, 가볍게 스쳐 가라. 힘껏 딛지 말아라.
내 광기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것이 첫날부터 나를 엘리트의 유혹에서 지켜주었다는 점이다. 일찍이 나는 재능의 행복한 소유자라고 자처해 본 적이 없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적수공권 무일푼으로 , 노력과 믿음만으로 나 자신을 추구하려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나의 순수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어느 누구의 위로 올라선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장비도 연장도 없이, 나 자신을 완전히 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만약 내가 그 불가능한 구언을 소품 창고에라도 치워놓는다면 대체 무엇이 남겠는가. 그것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모든 사람들만큼의 가치가 있고 ㄸ 어느 누구보다도 잘나지 않은 한 진정한 인간이다. "
그의 자서전 <말>의 마지막 부분이다. 
계약결혼, 실존주의 참여문학, 공산당과의 숨바 꼬질 등으로 세계적으로 화제를 뿌리고 문학가들과 문학애호가들에게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던 사르트르의 책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 문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말>과 <구토>
 더욱 적극적으로 문학의 정치적 참여를 위한 이론과 실천에 헌신해 온 그는 1953년 전후에 이르자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이 착취와 억압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을 다진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의 진정성 여부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 입장에서 그는 특히 어린 시절에 기른 어떤 습성이 근본적 과오의 근원이 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투사로서의 자아를 정립하고,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된 지금, 깨끗이 정산해야 할 그 근본적 과오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그의 모든 작품을 주조를 이루는 일종의 신경병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욕구 때문에 문학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 그의 신경병이었다. 현시링 아니라 상상을 , 사물이 아니라 말을, 새활이 아니라 허구를 섬긴 이 야릇한 병, 30년이 걸려서 이제 경 벗어났다는  이 정신병을 우리는 편의상 문학병이라고 부루는 병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롱과 고뇌와 아이러니가 한 덩어리가 된 그 이야기.  한 살 때 그는 "몇 방울의 정액을 흘려서" 아이 하나를 서둘러 만들어 놓고는 죽음의 길로 달아나 버린 일로 시작된다. 마치 사생아처럼 초자아로 작용하는 아버지 없이 자란 유년.
 
"세상에 훌륭한 아버지란 없다. 내게는 초자아가 없다는 어는 유명한 정신 분석가의 판단에 동의한다. "
"초자아는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도 하년으로는 공격적인 성격도 없었다. 어머니는 애초부터 내 것이었으며, 그녀를 담당하게 독점하는 것을 누구 하나 시비하지 않았다. 나는 폭력도 증오도 모르고 질투라는 이름의 이 괴로운 수련을 겪지도 않았다. 나는 어려운 고비와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알맞게 죽어준 아버지 때문에 자유를 얻었고, 줄곧 죽기를 기다리던 할아버지 때문에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
 
그는 그것을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이 절대적 자유는 어머니가 할아버지 집으로 들어가면서 자기의 존재는 "여분의 것"임을 느끼게 된다. 외손자의 재롱과 자질을 보면서 여생을 행복하게 마치기를 원했던 조부가 만들어 놓은 굴레에 의해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이 자기 존재의 우연성을 필연화하고 그 무근거성에 근거를 주기 위하여 어떠한 술책을 꾸미는지를 살피는 것이 이른바 실존적 심리분석이라면, 그는 자서전의 시작부터 이 실존적 심리 분석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며 그 후의 문학병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조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난 원초적 범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책의 세계는 그의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책이 세계는 그가 인식한 최초의 세계며 유일한 세계다. 오직 책들만이 나의 새들이며 둥지며 가축이며 외양간이며 시골이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책을 통해서 얻은 관념과 상상이 현실을 대신하고 현실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유년기 그의 재능을 칭찬하는 주변의 어른의 시선이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었고 존재증명서였지만 점차 이 거울에 대한 의심이 싹트는 날이 다가온다. 
자신이 주연이었던 연극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필연성 없는 여분의 인간으로서 고뇌에 빠진다. 아버지 없는 자유는 자기 창조를 위한 바탕이기는커녕 유기상태라는 것이 다시 절실하게 자각된다. 
완전한 일인극이라는 자기기만적인 연극에서 벗어나자 그에게 삶의 해결책을 베풀어 준 것이 문학병이다. 관념과 상상이 현실을 잡아먹게 한 그 문학병이 이제 새로운 존재의 유희에 동원된다. 
<읽기>와 <쓰기>라는 2부로 구성된 <글>은 책을 중심소재로 자신의 존재를 형성해 온 사르트르의 행적을 보여준다. 
사르트르의 글쓰기는 일곱 살 때 할아버지와 운문의 펴지를 주고받으면서 시작된다. 이후 글쓰기는 산문으로 기울였고 그는 구 속에서 행복에 젖는다. 하지만 이 또한 자기기만적인 면이 많다. 책 읽기의 단계에서 등장인물과의 일체화를 통하여 영웅 겸 배우라는 이중의 속임수를 써온 것에 비하면 글쓰기는 한결 만족스러운 장난이다. 
사물은 말에서 태어난다는 그의 원초적 체험은 그의 창작을 정당화하고 크게 고무하게 한다."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글짓기를 위해서였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의 소설 쓰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밥벌이가 되지 않은 문사보다는 문학교수라는 성직으로 명예로운 공인노릇을 하며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수상이나 평론을 써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한다. 그의 권유로 문학교수 겸 문사로서의 소양을 쌓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필연화하고 정당화하려는 새로운 자기기만의 작업이 시작된다. 
작가영웅이 되고자 한 그의 소망은 볼테르나 루소와 달이 그에게는 미워하고 타도해야 할 적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아 결국 작가 영웅의 소망은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그 곤경에서 할아버지가 또다시 그를 구한다. 즉 자가는 진선미라는 순교자라는 환상을 피어오르게 한 것이다. 문학이란 거룩한 이데아의 세계를 관조하는 전문가의 작업이며 형이상학적인 산물이라는 할아버지의 생각을 이어받는 것이다. 즉 일조의 사제로서 인류를 구언하고 그 결과로 자신을 구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수행은 오직 고민과 시련을 겪음으로써 진실로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시련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의 슬픔, 날카로운 언어로 진실을 밝혔기 때문에 겪는 학대, 이름난 문인에게 따르는 유혹과의 대결 인세를 빈민을 위해서 내놓고 스스로 감내하는 가난... 그러나 이런 순교자로서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얻은 만족감은 그늘이 진다. 
작가가 영웅, 작가가 순교자 작가가 사후의 영광으로 초점을 옮긴 이 자기기만적인 문학병은 그 후 어떠한 곡절을 거치고 어떻게 극복된 것인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그는 불가피하게 환상에서 현실의 세계로 끌려 나오 자기의 실체가 사기꾼이었다는 인식에 이른다. 현실과의 접촉은 글로 하여금 자위적인 내성을 중단하고 구체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으로 들어서게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외양에 불과했다. 타자와의  바람직한 관계의 성립은 한 자폐적 어린이를  현실 상황 속에서 실존적 존재로 변모시켜 주지만 이 또한 무너진 환상에 대한 화풀이였다.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그는 여전히 문학의 신이 특별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데 언젠가는 그것을 자신에게 주리라는 희망을 떨쳐버리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말로는 이 골수로 스며든 정신착란이 그 후의 30년을 지배했다고 하는데 이는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 부단한 진보와 창조를 약속하는 미래로 뻗어 간다는 신념이었다. 그리고 그의 종교적 성향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오랫동안 죽음에게 , 가면을 쓴 종교에게, 내 인생을 우연으로부터 구추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라고 말한다. 
문학적 창조라는 종교의 대리물을 통한 존재의 필연성과 정당성의 획득, 그의 유년 시절은 이 문학병의 형성을 위해서 바쳐진 시간이고, 그의 청년기와 장년기는 그 병에 끌려서 글을 써 온 시절이며, <말>을 구상한 시점은 그 병을 극복하고는 "나는 달라졌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전환점이다는 것이다. 
결국 글을 쓰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병을 벗어난 글쓰기, 즉 "모든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모든 사람의 문제와 가치를 지니고 모든 사람과 똑같은 한 사람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의 용어로 " 단독적 보편자"의 양상이다. 저마다 독특한 시대를 살면서도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지니는 그런 개인이다. 
하지만 이 또한 문학적 형상화를 떠나서는 부각될 수 가없다. 
자멸적이며 문학적 기호로 가득 찬 자서전인 <말>이 어린이는 천사라는 신화를 무너뜨리고  모든 어린이가 제 나름대로 연출하는 자기기만적 연극의 실체를 단독적 보편자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냉혹한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한 패러다임을 이룬다. 사르트르는 심미적 글쓰기와 글쓰기의 예술성에 이후 매혹되었고 문학을 포기하기는커녕 도리어 좁은 의미의 정치적 참여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문학에 더욱 깊은 뜻을 부여하면서 글쓰기를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그의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1부. 읽기>
" 나는 책에 둘러싸여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죽을 때도 필경 그렇게 죽게 되리라. 할아버지의 서재는 도처에 책이 있었다.... 그 신전에서 놀았다. "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책 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나로서는 서재가 내 신전이었다. "
"사물에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사물을 창조하는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인 환상이 없었던들 나는 결코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
<2부. 쓰기>
나는 말이 사물의 진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글을 스기 전에는 거울 놀이밖에 없었다  한데 초초의 소설을 쓰자마자 나는 한 어린애가 거울의 궁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공중의 어린애와 같았던 어린애가 이제 자기 자신과 사적인 데이트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불안이나 정열은 내 글재주의 농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농간이 매일처럼 나를 책상으로 끌고 가며, 경험이 쌓이고 원숙해져서 훌륭한 글이 저절로 나오게 될 때까지 내 나이에 어울리는 작문 과제를 내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할아버지의 견해였다. 모파상을 플로베르그 가르칠 때 나무 옆에 그를 앉히고 두 시간 동안 그것을 묘사하게 했다고 한다. 
결국 나를 문학에서 멀리하려던 할아버지의 노력이 도리어 나를 문학의 길로 밀어 넣었다. 내 빈곤한 영혼을 덥혀 준 것은 있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글을 쓰는 영웅주의였다. "
"작가로서의 나의 계율은 상처처럼 몸속에 꿰매져 있다.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그 상처 자국이 근질근질하다. 너무 쉽게 써도 근질하다. 오늘날에도 이런 거친 욕구가 마치 너무 융통성 없고 미숙한 것임을 나는 절실히 느낀다. "
"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우리들은 모두가 그렇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모두가 낙인찍힌 도형수들이다. 말의 본질로 보아 어쩔 수 없는 것은 글짓기의 명수는 없다. "
"타자로서의 나가 되기 위하여, 자연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나는 내 운명을 마주 보았고 똑바로 인식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자유였다. 나는 내 자유를 마치 외적인 힘처럼 내 앞에 우뚝 세워 놓았던 것이다.... 이 부분이 사르트르의 존재론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필연성 없는 존재임을 의식할 때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창조해 나가는 대신, 흔히 남들의 눈을 통해서 마치 필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단단히 정립하기를 바란다. 어린 사르트르는 자가가가 되어 만인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스스로 타이르지만, 그것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운명은 우리의 원초적인 자유가 존재의 불안엣 벗어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진정치 못한 수작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들뜨게 하는 자유와 내 존재를 정당화해 줄 필연성 어느 쪽도 완전히 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마음의 평화를 꾀하려고 했다.
볼테르와 루소가 그 시대에 다부지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아직도 폭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는 건지에서 나폴레옹 3세를 혹독하게 규탄했고, 할아버지도 그를 미워하도록 내게 가르쳤다. 
오랫동안 예술 작품이 형이상학적인 산물이며 그 탄생이 세계 그 자체와 관련된다고 생각해 왔다. 플로베르와 공쿠르와 고티에의 그 낡아 빠진 울화가 나를 중독시켰다. 인간에 대한 그 들의 추상적인 증오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 안으로 스며들어 병균과 같은 새로운 자부심을 길러 놓았다.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 쓰거나 신을 위해서 쓴다. 내 이웃을 살린다는 목적으로 신을 위해서 쓰기로 결심했다. 내가 바란 것은 내 글을 읽어 줄 독자가 아니라 나를 은인으로 받들어 줄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인간에 대한 멸시가 나의 고매한 정신을 좀 먹어갔다. 
나는 나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서 덤으로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서 민중들의 공인 구제사를 자처했던 것이다. 
나는 죽음에 현혹되었다. 남들로부터 생존의 구실을 얻기 위해서 글을 쓰겠다는 나의 주책없는 기도에는 비록 허풍과 거짓이 많았지만 동시에 어떤 현실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5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그것은 '그리부이유'식의 자살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가령 비를 피하려고 물속으로 뛰어난 따위를 하는 등 피하고 싶은 곤경으로 빠져드는 어리석은 사람. 
나는 희미한 출생의 반영처럼 희미하게 죽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수다를 떠는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음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가. 그리고 육체 대신 문체를 시간이라는 연약한 나선대신 영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남들이 나를 읽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의 눈 속으로 뛰어든다는 말이다. 남들이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내가 보편적이면서도 독특한 언어로 변모해서 그 모든 사람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자코메티는 이탈리 광장에서 자동차에 부딪쳐 쓰러지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고 한다. " 나는 조각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 태어난 것조차 아니었어. 나는 그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 그를 흥분시킨 것은 재앙처럼 사물을 석화시키는 시선으로 거리의 불빛이며 사람들이며 흙탕 속에 나자빠진 자신의 몸뚱이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하낟.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인간은 그 속에 자기를 투사하고 , 거기서 제 모습을 알아본다. 오직 그 비판적 거울만이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 버릴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 없는 법이디. 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의 온갖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