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 ....

숨그네 2022. 4. 10. 19:31

완도군 군래리 1구. 이곳이 내 유년을 보낸 동네이다. 너무 많은 것들이 개발의 물결에 휩쓸려가버렸지만 그래도 몇군데는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름 장마가 거칠게 오면 바닷물이 초등학교 앞에 있는 다리를 넘어 낮은 지대의 집들을 침수시키곤 했다. 그러면 우린 살림살이를 포기하고 몸만 겨우 헤험쳐 나와 높은 지대인 군내리 3구로 도피해서 낯선 이들의 집에서 곁살이를 하다 비가 잦아지면 돌아와 황토물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이불이며 살림도구들을 씻어 햇볕에 말리곤 했다.

이끼낀 돌담과 철문을 넘어 안마당을 훔쳐보며, 아 이곳이 우리 가족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사했던 세번째 집이 아닌가 싶었다. 석권네 집. 대게 큰아이의 이름을 붙여 우리는 누구누구네 집 이렇게 불렀다.성미가 사나운 주인 아주머니에게 잘 보일려고 아침 일찍 시멘으로 된 마당을 싸리비로 쓸곤했다. 그래도 열린 토방으로 문만 열면 안방이 다 내다보이는 옛 기와집보단 현관문이 있어 큰방과 딸린 작은방이 보호되는 곳을 나는 좋아했었다. 중학교 때 학교시험을 준비하느라 밤늦게까지 불을 밝혀두면 성미사나운 주인아주머니는 전기세가 많이 나간다고 두꺼비집의 전원을 내려버리곤 해서 앉은뱅이 책상에서 촛불을 켜고 공부를 하곤했다. 

동네 어귀에 있었던 또랑가 가게, 원이네. 분식점 및 수퍼를 동시에 하는 가게랄까. 동네 아이들이 푼돈을 짤랑거리면서 주전부리를 할 수 있는 온갖 맛있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은 기름에 바로 튀겨 바삭바삭한 핫도그를 20원에 팔았다. 봄이면 친구들 몇과 토실토실 기름진 삐비와 쑥을 무덤가에서 캐서 그 당시 허름한 슬레이트로집에 살던 떡집 아줌마에게 한 광주리에 30원에 팔아 원이 가게에 가서 핫도그며 하늬껌, 그리고 뽀빠이를 사서 먹었다. 그래서 난 봄이 너무 기다려지곤 했다. 아직도 그곳에서 팔았던 아삭아삭한 핫도그를 잊지 못한다. 신기하게도 가게는 없어졌지만그 터에서 가게 주인 아저씨가 살고 계셨다. 그분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난 그분의 주름진 얼굴에 감춰진 옛모습을 슬핏 보고 마음이 울렁거리고 벅차올랐다.

골목이 한참 길었졌는데 이제와서 보니 몇걸음밖에 되지 않는다. 1구 두번째 셋방살이하던 집. 지금은 철문이 있지만 그당시엔 철문이 없고 바로 흙마당이 있는 허름한 기와집이었다. 이 집 주인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신학문을 하고 돌아와서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모든 동네의 송사를 도맡아 법률조언을 하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일등을 하는 공부 잘하는 손자인 종호오빠를 대청에 앉혀두고 붓글씨를 가르치며 글씨가 좋다며 칭찬을 하면 나는 살그머미 어깨 너머로 글씨 쓰는 것을 훔쳐보면서 부러워 하곤했다. 엄했지만 사리가 밝아서 청상과부가 되어 네 아이들을 건사하느라 바쁜 엄마에게는 아마 믿음직한 시아버님처럼 울타리가 되어 주었을 것이라 어림짐작한다. 낡은 집이라 밤에 잠들 때면 이부자리까지 파고들던 쥐에 놀라 한밤중에 괴성을 지르며 혼비백산 놀라 목청껏 울었었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한 종호오빠를 좋아하면서 자존심 때문에 새초럼하게 대하곤 했다. 아마도 어린 나에게 가슴이 설레게 한 첫사랑이 아니었나 싶다. 그 뒤 남 모르게 나는 종호오빠의 소식을 쫒아 듣곤했다. 완도는 미역공장이 많았다. 그 당시에 학교에 갈 나이가 된 가난한 아이들은 용돈벌이로 공장에서 미역을 다듬어 플라스틱 광주리에 근을 달아 팔곤했다. 물론 그 돈은 모두 부모의 주머니로 들어갔지만. 엄마는 자주 미역을 몇 광주리씩 집에 까지 가지고 와서 큰 다라이에 둘러 앉아 저녁내 혹은 일요일에도 미역일을 시키곤했다. 너무 지치고 싫어하는 일이어서 어서 빨리 어른이 되어 이런 심심하고 재미없는 노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햇볕이 따사한 날이면 토방에 앉아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우면 언니는 머리에 있는 하얀 샛가리며 통통한 이를 잡아 주곤했다. 그 때는 삼퓨니 액체 비누가 없어 그냥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고 속옷도 오랫동안 갈아입지 않아서 위생상태가 좋지않아 이가 없는 아이가 드물던 시절이었다. 40여년이 지나서 가본 종호네 집은 지금도 넉넉치 못한 살림살이를 하는 이들이 세들어 사는지 집꼴이 허름하고 처마가 내려앉아 있었다.

놀로네 집.. 놀랍도록 변하지 않았지만 실제 와 보니 내 머릿속에 있는 집보다 훨씬 작고 마당도 비좁다. 유일하게 아버지랑 같이 셋방살이하던 곳. 아버지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섬 면단위 경찰지소에서 차석으로 있다가 읍에 있는 본청으로 발령을 받아 온 통신계장이었다.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처자식을 먹여살리면서 고향 해남에 있는 큰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논과 밭마지기를 장만해 드리느라 애를 쓰고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청춘인 사십대 초에  이 집에서 간암을 앓다가 결국은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엄했지만 따뜻하고 친절했던 아버지.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그때 새로 나온 빵기계로 직접 빵을 구워 우리에게 주곤 했다. 무좀이 심한 언니를 위해 마늘쫑을 삶아 발에 담구게 하고 업어주기도 하셨다.바다 건너 작은 섬인 청산에서 근무하실 땐 읍내에 살던 우리는 여객선을 타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곤했다. 간혹 풍랑을 만나 배가 출렁일때는 심한 배멀미를 앓았지만 아버지에게 응석을 부리는 재미와 아프면 배를 잿더미에 묻어서 익힌 다음 달콤한 꿀을 섞어 마시게 하고 동네 치과에 가면 눈알만한 알사탕을 사주면서 우리를 꼬셨던 정 많은 아버지.. 나이가 세살터라 우린 자주 싸우곤 했는데 그 땐 아버지가 회초리를 가지고 와서 손바닥을 때렸다. 하지만 잠들기 전 이불을 걷어내며 우리를 안아주면서 아이고 이쁜 내 새끼들 손바닥 아팠지 하면서 호호 불어주며 꼭 안아주곤 하셨다. 아버지..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완도 추섬. 물이 빠지면 간혹 사람들은 진도의 갈라진 바닷길처럼 본섬에서 추섬까지 걸어가기도 한다고 그랬다. 나는 한번도 가본 적은 없다. 온갖 생태림으로 울창한 그 곳을 선창가 부두에서 우두커니 바라볼 때가 많았다. 미역을 생산하고 출하하는 선주의 딸도 아니고 김양식과 관련된 일로 선착장 부근에서 장사를 하는 상업인의 딸도 아닌, 경찰공무원이었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아 빨리 커서 완도를 벗어나 멀리 제주도로 가던지 (그때  쾌속 한일 카페리호가 완도에서 출항하기 시작했다) 도시로 공부를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생활이 따분하거나 놀 친구가 없어 외로우면 난 추섬을 마주보며 그냥 선창가에서 어스렁거리면서 고깃배에서 건져올린 고기들을 무심히 보곤했다.

본난게비.. 공식적인 행정구역이름은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한텐 그냥 외래어같기도 한 지명, 본난개비인 곳이다. 
어릴 적 여름 무더위가 시작되면 친구들이랑 우루루 읍내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이곳 바닷가에서 수영복도 입지 않고 팬티바람으로 헤험을 쳤다 ( 분명 수영이라 할 수는 없고 그냥 게해험이랄 수 밖에) 이런 반라의 헤엄은 사춘기 성증이 나타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지속되었다. 헤험을 치지 않은 날은 손가락으로 모래를 긁어 바닷조개를 한웅큼씩 건졌다. 해거름 까지 바다에서 논다고 눈에 쌍불을 켜고 당장 볼따기를 갈길 것 같던 무서운 홀엄마에게 그나마 늦은 마실놀이를 면피할려고 한바가지를 집에 가져오면 엄마는 이걸 어디다 쓴다냐 그러면서 마당에 휙 부어버렸다. 해마다 익사사건이 있어 바로 아랫마을에 사는 오빠뻘 사내도 빠져죽은지라 엄마는 그게 두려운 거였다. 그래도 나는 여름철 본난개비에서 물놀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빚쟁이한테 빚을 받아오라며 해질녁에 삼형제 묘가 있는 언덕배기를 넘어 한참을 걸어 절벽아래에 있는 이곳 마을까지 심부름을 하러갔다가 빚돈은 받지 못하고 저녁 밥때를 한참 넘긴 후 깜깜해져 버린 언덕을 겁에 질려 내려오다 지금도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깨비불이라고 생각한 파란 인광이 짚더미 둘레를 빙빙 도는 것을 보면서 걸음아 나 살려라며 혼비백산 그 언덕길을 동생과 울며 달려내려온 뒤로는 내 여름철 취미생활은 아쉽게도 안녕이었다.

가파른 계단을 타고 죽 올라가면 그네가 매달린 공원이 나온다. 어릴 적 나는 왜 그랬을까. 그네를 밀어주는 친구없이 혼자서 다리와 엉덩이를 굴려가며 곧 뒤집어질 정도까지 높게 그네를 탔다. 그네가 있는 공원 정상에서 내려오다보면 어둑어둑한 다리가 하나 나온다. 때꾹이 덕지덕지한 홈리스들이 머무는 곳이어서 그곳을 지날 때면 겁이나 정신 없이 내달리곤 했다. 하지만 초등 6학년 때 앉은뱅이 책상이 아닌 두다리가 달린 책상을 사고싶은 욕심으로 하교 후 신문을 돌렸다. 신문을 돌리고 나면 언제나 두세부가 남곤 했는데 난 이것을 따로 팔아 여분의 푼돈을 챙겼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 돈의 일부로 시장에서 떡을 사서 그토록 무서워했던 다리 아래 홈리스 아저씨에게 가져다 드렸다. 지금도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신문팔이 소녀는 악착스럽게 월급을 주지 않고 버티는 배급소 아주머니를 찾아가 돈을 받아내곤 했다. 그 언덕배기의 배급소 집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어른들의 뻔뻔함이 이해가 되지 않아 몇번이나 서성이며 내 노동의 댓가를 받아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어설픈 언어로 따져물었던 그 때.. 신문돌리기 일은 중학생이 되면서 끝이 났다. 높은 담장에 가슴설레며 몰래 훔쳐보았던 박지송. 신문을 돌리는것이 창피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 아이에 대한 풍문은 나중에 까지 들었는데 글쓰기로 초등학교 때 같이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고 난 뒤부터 마치 영혼의 뭔가를 함께 은밀히 같이 하고 있다는 근거없는 생각으로 그 아이를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마음에 병을 얻어 오랫동안 귀향해서 집에 틀어박혀 면벽만 하고 산다 들었다. 안타까왔다. 그러면서도 응 그럴만해.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뭘까?
 

정도리... 구계동보다는 우리에겐 정도리가 더 익숙하고 친숙한 깻돌밭. 완도아이들은 그 시절 행군이나 소풍을 언제나 이곳으로 왔다. 그렇지만 행군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학교와 집에서 십리길은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바위 덩어리만한 갯돌에서 자잘한 공기놀이 돌 만큼 작은 것 까지 아홉계단으로 층층이 쌓여있는 너른 자갈밭에서 친구들끼리 깔깔대며 엄마가 싸 준 주먹밥과 계란을 까먹고 멀디 먼 길을 되걸어 집에 까지 가면서 둔덕에 앉아 다리쉼을 하곤했다. 정도리는 여름 한낮의 햇볕이 작렬하면 바다로 뛰어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갯돌밭 뒤에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어 어둑신한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피한다.다양한 해양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잔돌들과 까르륵 까르륵 소리를 내며 거뭇하게 서있는 것이다. 밤에 숲속에서 비박이라도 할라치면 자갈들이 파도에 쓸려가며 내는 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때로는 무섭게 때로는 장엄하게 들리는 것이다. 깻돌소리로 여름의 무더위는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주춤되는 곳. 정도리 깻돌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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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구 소심이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동네 엄니들.
이 신작로가 뻥 뚫려 논과 밭 그리고 밭모롱이를 지나면 있던 통샘거리, 내친구 엄마 당골레집, 꼬막처럼 엎드려 있던 초가집들, 그 중 내친구 소심이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온전히 방향감각도 사라져 버린채 길을 잃고 헤매이는 나에게 동네 엄니들은 과거의 흔적들을 소환해 주시느라 애쓰셨지만 이제는 너무 두터워져 버린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기가 여간 힘든 일... 배가 고픈 오후면 난 소심이가 한솥가득 삶아주는 고구마를 눅눅한 고구마 썩는 냄세가 나는 흙방에서 얼마나 맛나게 먹었던가. 나보다 한살 위였던 소심이. 마치 어린 동생 대하듯 가난한 동네에서 3구 상업지역 잘살고 잘나가는 아이들에 맞선 대항마처럼 공부잘하는 나를 응원해주던 언니같았던 가난한 내 친구 소심이. 고등학교진학을 하지많고 부산으로 돈을 벌러갔다했나.. 수소문해보니 부산에서 야간 방송통신대학을 나와서 결혼도 하고 이이들을 낳아 반듯하게 잘도 키웠다고 .. 간혹 여기에 온다고 가게 아주머니가 그러신다.. 죽기전에 만날 수 있을까..

거의 50여년동안 변하지 않고 이끼로  덮힌 거무티티한 담장들. 이 길들을 냅다 달리는 나와 내 또래 아이들의 생글거리는 얼굴들과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담장 너머 누구누구네는 어쩠다더라 이런 소문들을 늘 달고 다녔던 그래서 민망하고 부끄럽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던. 왜 가난뱅이들의 이야기들은 저 담장에 끼인 검은 이끼처럼 달라붙어 벗겨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번성하는지. 어린 아이들은 해맑게 웃고 있지만 그 웃음속에 동네에 혹은 가족들에게 생긴 무섭고 흉흉한 사건들을 조개처럼 꽉 껴안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어느날 터져나오는 눈물들은 그 동안 말로 표현되지 않은 오랜 공포와 두려움이 터져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이유가 있는 울음들.

군래리 1구로 이어지는 2구 인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전매청과 미역공장들이 즐비하고 나름 큰 길이었다. 중학교가 읍내에 있지 않고 걸어서 십리나 되는 먼 외곽에 있어서 그 때는 걸어서 학교까지 가는 일이 힘들었다. 하지만 어려서 그랬는지 그렇게 많이 힘들진 않았다. 오며가며 분식점에서 모찌나 고구마말랭이 과자며 불량식품들을 간혹 사먹을 수 있었고 때론 십대 감성들을 오버해서 만끽하느라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내리는 여름철 장대비를 다 맞으며 학교에서 집에까지 걸어오다 심한 감기에 걸려 며칠 씩 앓은 적도 있었다. 그 즐거운 기억들도 있지만 여전히 잊혀지지 않은 두려운 기억들도 있으니... 상환이네.. 그 아저씨 이름인지 아니면 아들이름인지 모른다. 하지만 절대 잊혀지지 않은 이름. 팔에 갈고리를 끼운 상이용사.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형님동생하며 잘 지냈다고.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이 아저씨는 돌변해서 우리집을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엄마를 괴롭혔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거의 악몽같았다. 이 큰 대로를 가다가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나는 오금이 저려 그 자리에 비석처럼 서있는 것이다. 두려움이 사람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통과 신경증이 그 이후 학창시절 따라다녔던 것도 많은 학습시간과 스트레스도 원인이었지만 아마 어린시절 극단적으로 겪었던 입에서 꺼내기도 무서웠던 상환이 아저씨의 만행으로 인한 상처와 두려움이 더 켰을 것이다. 두번 다시 보고싶지 않은 얼굴.  고등학교를 광주로 진학하고 나서 부터 완도에서의 생활은 끝이 났다. 가족들이 광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곳에 적을 둔 친척일가가 없어 갈 일이 없었다. 자주 동창들이 모임을 갖자고 연락이 오지만 난 가지 않았다. 가고싶지 않았다. 수십년이 지나 몇년전 ,2017년 여름에 친구와 큰 맘먹고 방문한 고향 완도. 나도 이제 그 시절을 두려움없이 건너가야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를 위무하면서 찾아갔던 곳. 내 막동이 동생 철이가 칠석바위 바닷가에 묻힌 곳. 나는 이제 그 유년을 이렇게 사진 몇장으로 되돌아보면서 떠나보낼 것이다. 그리고 웃으면서 고향을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찾아갈 것이다. 안녕. 나의 유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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