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47

노년의 의미에 대하여

청춘을 그리워하고 중년을 기억하며 노년으로 살아가는 준비를 하는 시기에 와 있는 것 같다. 나이라는 굴레에 얽매이지 말고 인생을 살아야지 라는 다짐은 한낫 힘없고 나약한 다짐에 그치게 하는 말인것 같다. 날마다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쌓여서 어느 새 일정한 나이대에 다다른다. 육체의 늙음과 정신의 느슨함을 선택이 아닌 필연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에 늙음마저 젊음이라는 절대적인 가치기준에 빗대 평가절하되어 싸구려 염가판매되는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이 좀 슬프다. 철학자 김진영의 말투대로 표현하자면 슬픈 늙음이다. 늙어보지지 않기 위해 눈처짐 수술을 하고 주름진 이마를 펴기 위해 보톡스를 맞고 삐꺽대는 관절을 위해 적절한 운동법을 찾아 유트브를 찾고 비문증으로 늙은 수정체를 위해 안과수술을 감행해야하는..

나의 이야기 2022.12.24

그레고리라는 나방

오늘 읽은 한겨레 신문에서는 이런 글이 실렸다. 말은 투쟁만큼 중요하다. 말의 악의적 쓰임과 정략적인 선동을 위한 말의 오염은 우리의 인식을 흐리게 하고 휩쓸리게 한다. 예를 들어 “귀족 노조”라는 말은 모든 노조를 아우르는 말이 아니다. 복지조건과 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기업노조에 해당될 수는 있지만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으로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과연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이 맞는가. 적절한 말의 발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노조활동을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을 씌워 노조활동의 기본권을 옥죄고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나를 포함한 일반대중들은 쉽게 그런 언론의 악의적 여론몰이에 휩쓸릴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을 초당파적인 논리로 수렴시키려는 의도는 대단히 권력적인 의도이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관적..

나의 이야기 2022.12.24

서울 개미마을 그리고 인왕산

진작부터 오고 싶었던 개미마을을 걷는다. 세검정로 4길. 홍제천이 흐르는 곳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금세 개미마을버스가 다니는 인왕산 들머리에 있는 개미마을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겹다. 그리고 아파트로 재개발되어 성형수술한 미인들처럼 표정을 잃어버린 도시인들의 거주지에 허름하지만 살림살이 냄새가 가득한 옛 집들이 지붕을 맞대고 산그늘아래 엎드려있는 풍경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어린 왕자가 벽화처럼 그려져 있다. 어린 왕자가 머무르면서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은 아마 이런 마을일 것이다. 사람들의 이쁜 마음들이 모여 가난한 동네의 살풍경한 벽에 따뜻함을 새겨 넣었다. 봉지커피 500원. 그리고 라면을 파는 동네슈퍼. 겨울이라 한참 김장을 하는 동네 아줌마들이 시끌벅적하니 웃음을 주고받으며 정겹게 ..

나의 이야기 2022.12.23

일상의 루틴이 강박이 되지 않기를

주기적으로 태양 둘레를 도는 지구처럼, 지구를 돌고 있는 달 처럼 주기적으로 변함없이 일정한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삶의 안정성과 질서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가끔은 이런 루틴이 강박이 되어 정해진 틀에 자신을 가두고 작은 변화를 주는 것에도 두려움과 불안이 생기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속성과 변화의 리듬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더운 여름을 견뎌내어 가을의 햇살과 바람한줄기에 감사하는 마음에는 일상의 변화가 주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집에 놓여있는 가구들을 한달에 한번씩 재배치하여 한결같은 공간의 테두리가 정신을 압박하고 획일화시키는 위험에서 의도적으로 빠져나오는 시도를 한다고 했다. 어제 읽은 미국흑인 여성 작가 토니 모리슨의 “ The blueset Eye” 한 등장인물 폴..

나의 이야기 2022.09.22

8월의 노고단

둥근이질풀. 찌는 폭염의 한낮으로 시들해질 법도 한데 해발 1500 노고단을 올라가는 능선길 옆에 다소곳하게 꽃을 피워 눈길을 사로잡는 여름 꽃 이질풀꽃을 보는 즐거움은 사뭇 감동스럽다. 수년전 이성복 시인의 아포리즘 “꽃피는 나무들의 괴로움” 이 생각이 난다. 생태적인 원리는 잘 모르지만 꽃피는 것들의 처연한 아름다움은 보는 이들에게는 주관적인 감정이입으로 느껴지겠지만 꽃피고 죽음으로 서서히 생을 마감하는 절정의 순간의 고달픔을 시인은 이야기했을 것이다. 무픞이 아파오는 고도가 높은 곳의 산행을 달래주듯 살포시 피어있는 둥근이질풀꽃. 가만히 들여다 본다. 산가지꽃. 꽃대가 밑으로 쭉 쳐지면서 이쁜 꽃술을 달고 있는 산가지꽃. 인위적으로 꽃을 상상해서 그린다해도 이렇게 고운 연보라빛 꽃의 생김새를 만들어..

나의 이야기 2022.08.23

빨강머리 앤을 위하여 1 (메슈)

“ 우리가 그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아이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잖아.” 이렇게 달콤하고 눈물나오게 사랑스러운 말이 최근 캐나다 CBC에서 제작하고 넷플릭스에서 내보낸 빨강머리 앤에서 메슈가 한 말이다. 어린시절 초등 3학년때로 기억된다. 저녁 무렵까지 아껴가며 책장을 넘기면서 앤과 함께 저녁나절을 책속에서 만나곤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가여운 말걀량이 앤만 보였다. 내 또래 였으니까. 이번에 넷플릿스 에서 만난 빨강머리 앤에서는 앤을 둘러싼 많은 인물들과 새롭게 서사구조를 이끌고 가는 다양한 이슈들, 가족,패미니스트로서의 앤, 공동체, 노예제와 인종차별, 원주민문제, 동성애, 교육등이 매 에피소드에 녹아있어 생각할 수 있는 폭을 넓혀놓은 것 같다. 그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인..

나의 이야기 2022.08.23

우리의 늙음을 위하여

오십의 나이에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기 위해 제주살이를 결심하고 떠났다던 가까운 어떤 시인의 말을 사십대에 들었을 때 나는 그럴 수 있겠다. 그 나이가 갖는 늙음의 정도가 엄청 커 보였다. 사십의 나이에 내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병환으로 돌아가셨으니 나에게 40의 나이는 죽는 나이였으니까. 벌써 40을 넘겨 오십대 후반을 살고 있는 내 자신의 실존이 가끔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살 더 많은 좋아하는 소설가 언니는 얼마전 자신이 죽으면 남겨놓은 수천권의 책들을 처리하기가 난망하다고, 자식들에게 폐가 될 수 있다며 장서들을 정리해서 출판사와 알음알음 헌책방에 기증했다. 50의 황망한 나이에 살고 있으면서 십대 이십대 삼십대 이렇게 10년 단위로 묶여진 나..

나의 이야기 2022.08.06

추상의 아름다움. 유영국 그림 전시회를 가다.

삶은 그렇게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비가 질척거리더니 마침내 물고랑을 큰 호흡으로 덮치고 냅다 바다를 향해 힘차게 내달리는 물줄기처럼 서울 거리를 휩쓸고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우리의 걸음을 이리저리 재촉하는 것이다. 보고 싶어도 별일 없이 끈질긴 일상의 덧없음에 정신 팔려서 보지 못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예기치 못한 자연의 힘이나 상황에 떠밀려 어는 순간 번개처럼 일순간 정수리를 때리는 일을 하기도 또는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희 컬랙션 전에서 유영국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나고"와 이 색감과 구도는 뭐지." 둘 다 마음을 휘잡는 그의 작품에 빨려 들어간 적이 있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불가사의하게 폭우 속에서 걸음을 재촉해 간 곳이 그의 20주년 전시회였다. 기획전시회답게 전시공간도 우산을 ..

나의 이야기 2022.08.04

치아바타- 납짝한 슬리퍼

나인 투 파이브의 일상을 33년 살고 평범한 비직장인으로 돌아온지가 금새 5개월째이다. 은퇴 후 생활이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편안한고 평화롭기도 한 날들이었다.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였을까? 좋아하는 책들을 가득 쌓아놓고 충분히 읽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일단 좀 많이 읽자 그리고 시간을 내 마음대로 이러저리 무계획적으로 사용해서 자유롭게 하루를 살자. 시간표가 있는 곳에 등록해서 뭘 배우고 그러지 말자. 그냥 스스로 공부하고 배우자. 간혹 시간을 내서 여행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자. 두려워서 게을러서 미뤄 두었던 블러그 글 포스팅을 다시 시작해서 내 생각을 적어보자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시 공적인 삶을 위해 내 역량상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노년까지 내 삶을 이어 줄 북카페..

나의 이야기 2022.07.08

이사하다

서울시 서대문구로 아이들이 이사를 했다. 남도를 거슬러 올라간 북태평양 고기압이 서울에 장마비를 거세게 내리게 한 6월 말에 비를 뚫고 필요한 살림도구 몇가지를 챙겨 박스를 만들어 장시간 차를 몰아 서울에 갔다. 다행히 아이들이 이사를 한 7월 1일은 비가 잦아들고 말갛고 눈부시게 환한 한여름의 태양이 작렬했다. 5년여의 원룸생활을 견뎌낸 둘째 아들의 짐을 풀면서 좀 울컥했다. 침대베드는 곰팡이가 피고 통풍되지 않아서 주변에 엉킨 먼지와 냄세가 진동했다. 한평남짓한 요즘 젊은이들의 원룸생활은 물론 고시촌 방보다는 좀 낫겠지만 한방에 모든 살림도구를 놓고 빨랫감을 말리고 이불과 옷을 쌓아두고 부실한 음식을 조리하면서 생긴 냄세와 잘 말리지 않은 세탁물에서 나는 섬유유연제냄세와 세탁세제 냄세. 충분히 세탁되..

나의 이야기 2022.07.05